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77화 일확천금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보물섬. 모두가 허겁지겁 삽으로 땅을 파느라 정신없는 이곳에, 어느 순간 이상한 자들이 나타났다. [가장 많은 보물을 가지고 온 브루트는 본체가 될 기회를 얻는다고 했다!] [보물! 보물이 필요하다!] 갑자기 난입한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경쟁하듯 보물을 찾겠다며 온 땅을 헤집고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괴물들은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각자 복장이나 사용하는 도구가 달랐다. 이들은 주위에 사람이 있건 없건 땅이 보이면 미친 듯이 파헤치며 보물을 찾는 데 열중했다. “이, 이봐! 뭘 하는 거야! 여긴 우리가 먼저 왔다고!” [나는 약초사 브루트! 약초가 있을 만한 땅에 보물도 있다!] [나는 낚시꾼 브루트! 낚싯대로 땅을 판다!] 성인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 이 브루트란 존재를 붙잡아 쫓아내려 했지만 너무 힘이 세서 막을 수가 없었다. 역으로 사람들이 가볍게 튕겨 나가기 일쑤. 몇몇 사람들은 브루트를 피해 다른 곳을 뒤지려 했지만. “젠장! 여기도 그놈이 있어!” [나는 탐정 브루트!] 돋보기를 든 브루트가 코를 벌렁거리며 다가왔다. [여기서 사건! 아니! 보물의 냄새가 난다! 찾는다!] “아니! 사건의 냄새를 왜 우리 쪽 땅에서 맡냐고!” 에이션트 언데드는 인간에게 있어 아득히 상식 밖의 존재. 이해하려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미식가 브루트! 땅의 맛을 보면 보물이 있는 땅을 알 수 있다!] 이해하려고 하면 지성에 괴리가 올 뿐이다. “이 미친 언데드 놈들을 어쩌죠? 보물섬 전체를 들쑤시고 있습니다!” “어쩌긴 뭘 어째!” 키이이잉! 그렇게 말한 네크로맨서가 손바닥에 흑마법을 펼쳤다. “죽여야지! 저렇게 많으니 한 놈 죽여도 아무도 모를걸.” 그 네크로맨서가 약화 저주를 사용하고 다른 동료들이 도끼로 땅을 뒤지는 브루트의 허리를 절단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다시 보물찾기를 재개하려는 찰나. 쑤우욱! 쑤우우우우욱! 잘린 단면으로부터 두 마리의 브루트가 튀어나왔다. “서, 설마 증식형 언데드……!” [나는 대장장이 브루트! 보물 중에 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리사 브루트! 본체는 내 거다!] 아아아악! 사람들의 짜증스러운 비명이 보물섬에 울려 퍼졌다. * * * ‘저쪽은 잘하고 있네.’ 브루트에게 보물을 찾으라고 명령한 시몬은, 직접 나무가 울창한 언덕 아래의 땅을 삽으로 파보고 있었다. 산골 출신답게 능숙한 삽질로 흙을 덜어내던 시몬이 이내 힘을 주어 삽을 깊게 넣었다. 팍! 땅에 박힌 큰 바위가 떨어져 나오고, 그 뒤로 흐릿한 구슬 같은 것이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시몬이 이마의 땀을 한차례 닦은 뒤 그것을 끄집어냈다. ‘마정석이다.’ 시몬은 흙을 털어낸 뒤 다시 살폈다. 반쯤 흐릿한 금속에 안개가 낀 듯한 외견의 마정석. 대지에 깃든 마나가 오랫동안 갇힌 채 고여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뭔가 대륙의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 건 시몬뿐,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삽질을 하며 마정석을 채취해서 바구니 속에 넣고 있었다. “왜 그래? 유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시몬이 삽을 바닥에 꽂은 뒤, 마정석을 아공간에 넣었다. “나는 이거 하나면 돼.” [브루트! 보물상자 가져왔다!] [브루트! 나도 가져왔다!] 마침 브루트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땅에서 판 보물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 많은 보물을 가져오겠다며 등을 돌려 경쟁적으로 떠났다. 크리스티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런 언데드들은 대체 언제…….” “설명하자면 길어.” 그렇게 말하며 시몬은 보물상자를 열었다.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거나, 자물쇠가 있는 것도 녹이 슬어서 가볍게 부술 수 있었다. 끼이익! 상자 안을 열어보니 과연, 보석이나 귀금속 등이 가득했다. 곳곳에서 부러움 가득한 시선이 꽂혔다. 시몬은 보석을 한번 손으로 붙잡아 이리저리 살펴보고, 빛에 비춰보기도 했다. 예전에 드워프들의 도시에 갔을 때 감정법을 간단히 배운 적이 있었으니까.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종류의 싸구려 보물, 비싼 건 몇 개 되지 않네.’ 시몬이 한숨을 푹 쉬었다. ‘피어, 이거 너무 수상하지 않아요?’ [크흐흐! 그렇군!] 바다에 일어나는 무수한 이상현상. 그중에 나타난 보물섬 던전. 그 안에는 던전주도 없고 보상만 덩그러니 있다. 직접 확인해 보니 엄청 진귀하고 순도 높은 보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귀족들의 창고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니 사람들의 눈이 돌아갈 만 하다. ‘가능 여부를 떠나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던전에 보물을 숨겨둔 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게 목적이라면…….’ 이유가 뭘까. 왜 바다에 사람들을 모으는 걸까. 무슨 이유로? “이봐!”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시몬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저 언데드들을 풀어놓은 네크로맨서지? 이래도 되는 건가!” “트레져 헌터 간에도 상도의가 있다고!” 시몬은 태연히 안경을 추켜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 이들이 움찔하며 시몬의 눈치를 보았다. 그 정도 수의 언데드를 다룰 정도면 상당한 강자일 테니까.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시몬의 행동은 다소 의외였다. “별로 관심 없어졌습니다. 알아서 가져가시죠.” 시몬이 발로 보물상자를 밀어버렸고 그 안의 보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자 두 눈에 탐욕이 가득 찬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와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시몬은 등을 돌려 걸어가며 브루트들에게 사념으로 명령했다. [보물을 특출나게 많이 찾아온 브루트가 없네. 시간이 없어서 선별 대회는 중단이야. 모두 돌아와.] [브루트 아깝다!] [브루트! 다음에는 꼭 내가 이긴다!] 브루트들을 모두 아공간에 회수한 시몬이 허리를 펴고 검은 바다를 보았다. 몇몇 모험가들은 일찌감치 적당량의 보물만을 챙긴 채 배를 타고 출구로 나아가고 있었다. “슬슬 출구가 닫히고 있어!” “욕심부리지 말고 움직여! 담을 만큼만 담아!” 욕망과 목숨의 줄다리기. 너무 보물섬에 오래 있으면 던전의 출구가 닫혀 버려서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된다. 물론 시몬은 이곳에 흥미가 사라졌기에 그 줄다리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바다로 나가서 배를 찾은 그가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리.” 그동안 조용히 지켜만 보던 크리스티나 셀린이 말을 걸어왔다.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던전은 다른 차원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 일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곳이라 들었어. 시몬은 불안함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결국 그녀가 폭탄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 “우리 다시 합치는 거, 어떻게 생각해?” * * * 엘드릭 선단에 머무르면서 시간이 조금 남을 때. 시몬은 잠깐 크리스티나의 여동생이자 키젠 동기, 유령함대의 엘리사 셀린에게 연락한 적이 있었다. 이때는 도둑길드에 연줄이 있는 카쟌의 정보력을 사용했고, 어렵지 않게 해적 무리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통신 수정구로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여, 여보세요옷! 통신 수정구로부터 한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싶었던지 목소리가 바뀌었다. -누구냐! 나 스틸리프 해적단 부선장 이졸데의 연락망을 알고 있는 놈이! ‘엘리사가 해적선에 무사히 취업했고 이졸데라는 위장 신분을 쓰고 있구나.’ 모든 상황을 파악한 시몬이었지만, 엘리사의 긴장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조금 장난기가 생겼다. -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히끅! -너희 동료들에게 그 사실이 까발려지면 어떻게 될까? 사실 위엄 넘치는 부선장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셀린가 가주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도- -누, 누누누, 누구세요! 살려주세요! 하라는 거 뭐든지 다 할게요! 바로 무장해제되며 바들바들 떠는 엘리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몬은 웃음을 흘리며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겨우 이 정도로 협박으로 정체를 드러내면 안 돼, 엘리사. 모른 척 밀어붙어야지. -네? -나 시몬이야. -??! 악! 아악! 이 나쁜 놈아아아! 그렇게 한동안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가득 찬 엘리사의 투정을 실컷 들어줘야 했다. 그러다 간신히 본론으로 넘어갔다. -나도 임무 중이야, 엘리사. 너처럼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너희 언니를 만나게 돼서 곤란해졌어. -어, 진짜? 언니 누구? 크리스티나 언니? 아니면 이네즈 언니? -크리스티나 셀린. 시몬은 엘리사에게 가족으로서 크리스티나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았고, 엘리사는 아주 잘 물어봤다는 듯 묻지 않은 이야기나 에피소드까지 콸콸 쏟아냈다. 그렇게 시몬은 크리스티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다시 합치는 거,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보물섬에서 크리스티나의 불쑥 들어오는 한마디. 시몬은 당황했지만, 무표정한 유리를 연기하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말 그대로의 의미야.” 크리스티나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엘리사에게 들어서 그녀가 언젠가 이럴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중요한 때에 바로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이야. “……각자 약혼자가 있잖아.” “약혼 따위 파기하면 돼! 나부터 당장 할게!”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도 아버님 명령 때문에 억지로 로잘린과 약혼한 거잖아? 끝내구 우리 다시 만나자! 나는 역시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우리 다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보구……!” 시몬은 이야기를 더 듣지 않고 배를 밀어서 바다로 끌고 갔다. 크리스티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유리!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 “그 전에.” 시몬이 묵묵히 배를 밀며 냉랭하게 말했다.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 “!” 크리스티나 셀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더니, 입을 오물거리며 뭔가 낱말을 내뱉으려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시몬이 배를 충분히 깊은 물가에 끌고 간 뒤 그 위에 올라타려는 그때. “자, 잠깐만!” 시몬이 먼저 떠나려는 줄 알고 당황한 크리스티나가 급하게 달려오다가 첨벙! 하고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크허헙 소리를 내며 입에 들어간 바닷물을 뿜어내고 콧물까지 흘리며 뛰어들어 와 배를 붙잡았다. “무, 물론!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쿨럭 쿨럭! 너도 그때 나쁜 소문이 돌았을 때 제대로 해명 안 했잖아! 내가 의심한 것도 충분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유리!” 그녀가 급히 배에 올라타려다 배의 균형이 기우뚱했고, 크리스티나 셀린이 ‘앗!’ 하고 이마를 갑판에 처박고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한번 망가지면 끝도 없이 망가지는 게 셀린가의 집안 내력인가?’ “미안해!” 그녀가 외쳤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고! 이 나쁜 놈아! 다 알면서 사람 자존심 그렇게 짓밟으니까 좋냐? 흐아아아아앙!” 놀랍게도 그 크리스티나 셀린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물에 푹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우는 모습이 세상 처량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봤다는 듯 지나가던 배에 탄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설마 진짜 울 줄은 생각 못 했던 시몬이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언제!” 그녀가 떼를 썼다. “지금 말해! 지금! 아직 던전에 있을 때! 내가 울고 바보 같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게 허용될 때! 말하라고!” 으아아아아아앙!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며 스피릿들이 일렁거린다. 정체불명의 사령 현상들이 마구 일어나며 그녀의 음침한 울음소리에 반응하듯 구슬픈 곡조를 토해낸다. 우우우! 우우우우우우우! 시몬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네 마음에 내가 답할 순 없어. 내가 너를 감히 용서할 수도 없어.” “왜!!” 시몬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답해 줄 수는 있지만, 대답을 들은 뒤에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크리스티나 셀린.” 갑자기 시몬의 목소리가 180도로 확 변하자 크리스티나가 히끅 소리를 내며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그녀도 이제야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답을 듣길 원한다면-” 스윽. 시몬이 아공간을 열고 양피지와 깃펜을 꺼내 물에 젖지 않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밀을 지킬 것을 서명하시죠. 저주 계약서입니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저주가 걸리는 저주 계약서. 저주 계약서에 서명하는 건 네크로맨서들에게는 절대 금기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시몬은 그런 위험천만한 물건을 크리스티나에게 쓰고 싶진 않았다. 꼭 그런 물건을 쓰지 않아도 키젠에서 배운 저주로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이건 그녀가 비밀을 지키게 하고, 또 그녀를 시험하기 위한 것. 그녀는 잠시 망설이듯 손을 떨었지만 결국 저주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제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유리 경이 아닙니다.” 시몬이 콧수염을 뜯어내며 흐리멍덩하게 뜬 눈에 힘을 주었다. “임무를 위해 선단에 잠입한 제7군단장 시몬 폴렌티아라고 합니다.” 그녀의 입이 떨 벌어졌다. “배, 배신의 군단장……! 룬 리그의 영웅! 어쩐지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는……!” “네. 그러니 당신이 봤던 모든 행동들, 혹시나 그 행동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면-” 시몬이 다시 수염을 붙였다. “당신이 느낀 감정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몬이 배가 잘 가고 있는지 방향을 한 차례 확인한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이건 당신도, 유리 경도 아닌 제3자인 제가 임무를 겪으면서 느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그녀가 멍한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았고, 시몬이 한숨을 푸욱 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혹여나 유리 경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 * * 보물섬 던전을 빠져나가며, 시몬은 크리스티나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 어떤 연유로 유리가 시몬에게 함장 자격시험을 양보하게 된 건지. 유리가 왜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성인이 된 지금도 극복하지 못하고 방황하는지. 크리스티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유리 경이 말하더라구요.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자신에 대한 조잡하고 질 나쁜 소문이 아니라-” 시몬이 높낮이 없는 톤으로 말을 이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이었다고.” “……!” 그녀가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은 채 숨을 헐떡였다. 어깨가 한 차례 크게 떨리다가 가라앉은 모습을 보니 애써 흐느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유리 경은 누구도 믿지 않게 됐고, 곁에 두지 않게 됐습니다. 친구도, 가족도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 거구요.” 시몬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약혼자였다면 유리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을 테고, 그가 소문처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짐작했을 텐데, 그를 저버린 이유가 뭐겠습니까.” 처음에 경기장에서 크리스티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유리를 경멸했다. 그런 이후에 유리가 활약을 거듭하자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게 됐다. 그 밖에 본선 훈련에서 그녀의 여러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도 결국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가, ‘셀린’ 가문의 일원이었다. “살롱에서 본인의 평판 때문이든, 제대로 해명하지 않은 유리 경의 모습이 좋지 않게 보였든, 결국 유리 경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길을 선택한 건 당신입니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던전의 출구에서 벗어났다. 던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크리스티나 셀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슥슥 닦고는 몸을 일으켰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에 수많은 온갖 후회와 혼란의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는 게 보였다. 주위의 선원들이 보물섬에서 얻은 물건을 세면서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모습과, 그녀의 고개 숙여 눈물을 참는 모습이 상반되고 있었다. -함장님! 무사하셨습니까! 쏴아아아아! 3군단의 함선이 다가왔다. “네, 금방 복귀할게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시몬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바르게 모으고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예를 취했다. “보물섬에 있던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대신 군단장님도.” “?” “……제 추태는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친동생인 엘리사나 다른 동기들에게 엉엉 울면서 다시 유리에게 재결합하자는 이야기를 한 사실을 들키게 된다면, 크리스티나는 정말 수치심에 목숨이라도 끊을지도 모른다. 시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윽. 그녀가 배의 난간에 다리를 올렸다. 저 앞으로 함선 보조용 작은 나룻배 하나가 크리스티나 셀린을 데리러 오고 있었다. “진실도 알았고, 제 잘못도 알았는데, 신기하죠. 유리에 대한 제 감정은 더욱 선명해졌어요.” “……아.” “그가 대단하든 아니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유리를 만나서 용서를 빌어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날듯이 날아올라 반대편 배로 이선했다. 시몬은 턱을 괸 채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한 일일까.’ 크리스티나 셀린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만약 바다에서의 모든 일이 끝나고 그녀가 유리를 찾아낸다면, 그 일이 긍정적인 파급을 불러일으킬지, 더더욱 유리에게 상처를 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유리가 의욕을 되찾으려면 ‘믿음의 상처’를 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회복해야 하는 것도 사실. 그래도 지금 크리스티나의 저 결연한 표정을 보니, 그녀는 유리에게 죗값을 치르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자.’ 시몬이 배의 마정석 엔진을 작동시켜 다시 앵거폴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도착할 즈음에는 7군단의 언데드 함대가 완성되어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소년!] 피어가 말을 걸어왔다. [보물섬에 간 이유는 자금 조달을 위해서가 아니더냐. 이러면 돈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물론 대책이 있죠.” 시몬이 싱긋 웃으며 통신 수정구를 꺼냈다.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을 동기에게 연락해 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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