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75화 오한 선단이 전멸하고 이틀 뒤. “…….” 박살 난 컵 조각이나 바닥에 떨어진 시계가 삐걱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집무실에, 선단주 브랭크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똑딱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거슬려졌다는 듯, 브랭크가 근처의 컵을 집어서 시계에 냅다 던져 버렸다. 쨍! 하는 소리와 시계의 바늘 소리가 멈췄다. “어떻게…….”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유리 미그일 단 한 사람에게, 오한 선단의 모든 전력이 괴멸당했다. 심지어 유리 미그일을 잡아 오겠다고 자신하던 배질 포트시마저 무력하게 패배하고, 역으로 유리 측에 붙잡혀 3군단에 넘겨졌다고. 그 과정을 모두 전해 들은 3군단 선단 측은 극도로 분노하며 오한 선단에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상황. 단적으로 말해 오한은 3군단에 찍히고 말았다. 그 뒤로 문제가 도미노처럼 줄지어 일어났다. 엘드릭 선단은 오한 선단이 한 짓을 그대로 돌려주듯, 이곳 앵커폴 항구의 모든 바닷길을 폐쇄하고 오한의 선박이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운임을 받고 화물을 실어 날라야 할 배의 운행이 늦어지고, 화물주들이 이 사태를 알게 되기 시작했다. 결국. “큰일 났습니다!” 우당탕! 브랭크의 직원들이 온갖 문서를 양손에 붙잡고 겨드랑이에 낀 채 안으로 들어왔다. “백록 상단에서 도착 기일이 늦어졌다며 계약을 끊겠다고 합니다! 막대한 위약금을 요구하고 있겠습니다!” “오티스 상회에서 모든 화물 운송을 중단하겠다고 합니다!” “휘하의 3개 중소 선단이 갑자기 오한에서 독립하겠다는 통보를……!” 온통 나쁜 소식들뿐이었다. 오한이 엘드릭에 패배했다. 3군단의 눈 밖에 났다. 당장의 물동량 또한 처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세 가지 문제로 무수한 소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오한과 연결된 모든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등을 돌리고 있다. ‘……이건 마치.’ 자신이 엘드릭 선단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받듯 말이다. “아아아아아악!” 브랭크가 직원들을 거칠게 밀치며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짜증을 토해내고 울분을 쏟아냈다. “이 브랭크! 아직 죽지 않았다!” 그가 쾅! 하고 선단 사무실에 들어왔다.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들어 브랭크의 모습을 보았다. “오늘 전부 밤샘 근무 준비해라!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화물주들을 어떻게든 구슬려 삶아서 시간을 벌어! 앵커폴 말고 다른 항구의 선단에 연락해서 계약하고, 이쪽의 물건을 그쪽 배로 옮겨라!” 비서가 다급히 달려와 말렸다. “선단주! 앵커폴에 정박한 배에 실린 그 무거운 화물들을 어떻게 다 옮깁니까!” “수레를 써! 수레!” “산이나 숲을 지나야 합니다!” “못 할 것도 없다! 오한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가 손목시계를 본 뒤 말했다. “용병이 안 도와준다면 마을 사람들이라도 동원해! 개밥버러지 같은 너희들도 여기서 반은 수레를 끌러 나가…….” 그렇게 말하던 브랭크가 뒤늦게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선단 사무실이 휑했다. 알고 보니 책상의 절반 이상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남은 직원들도 말을 제대로 듣는 자가 없었다. 남 일처럼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거나 통신 수정구를 사무실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등 개판이었다. “이 밥버러지들이 다 어디 간 거야!” “보면 모르쇼.” 퉁명스럽게 대답한 직원 한 명이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 “다 그만뒀수다.” “뭐라고? 누구 맘대로!” 얼굴이 벌게진 브랭크가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그리고 니들은 뭐 하는 거냐? 너희가 몸담고 있는 선단의 위기란 말이다! 일해! 일하란 말이다!” 덥석! 그가 짐을 챙기고 있는 한 여성 직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넌 또 어딜 가! 앉아서 일…….” 확! 여성 직원이 싸늘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짐을 챙겼다. 너무나 차가운 거절. 뒤늦게 분위기 파악을 마쳤는지,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진 브랭크가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말했다. “이, 이봐! 네 보스가 말하잖아! 진정하고 일단 벌어진 일부터 수습……!” “오한은 망했어요. 선단주님.”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보스도 아니죠. 남보다 못한 아저씨한테 제가 예의를 챙길 필요는 없겠죠?” 크윽! 브랭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이, 이것들아! 내가 다 너희들 벌어먹게 해주고 가족을 건사하게 해줬다! 그런데 선단이 좀 어렵다고 떠나려 해? 엘드릭 직원 놈들은 끝까지 남아서 이를 악물고 일했다! 네놈들은 선단에 대한 의리도! 명예도 없나!” 푸핫! 픽!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이 웃음 짓더니 경멸 어린 표정으로 브랭크를 보았다. “일말의 애사심을 가질 환경은 만들어주고 그렇게 말하시든가.” 평소 브랭크가 직원들에게 하던 짓은 빈말로라도 올바르다 할 수 없었다. -네놈들은 가축이다! -일을 이따위로 해놓고 퇴근하겠다고? 돈은 사람을 일하게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돈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한다. “게다가 엘드릭한테 깨진 당일에 여기 와서 그렇게 죄 없는 직원 머리채 쥐어뜯고 물건 부수고 한 거 기억 안 나요?” -밥버러지 놈들! 네놈들은 뭘 하는 거야! 뭐가 도움이 돼! 네놈들이 배를 조금이라도 더 보수했다면! 시간을 내서 조금이라도 화포를 점검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어! 리더로서 끝까지 자신의 실책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 직원들은 그런 브랭크의 모습에 티끌만큼 있던 정도 다 떠나고 말았다. “갑니다.” “부디 길에서 마주치지 맙시다.” 하나둘 직원들이 선단에서 나가기 시작한다. 선단 사무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미 오한 소속의 해상 지휘권을 가진 함장들, 청파류 사용자들 같은 최고 인재들은 이미 엘드릭이나 다른 선단에 스카웃되어 떠났다. 브랭크가 벌게진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문득 자신이 네이프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그래. 자네의 인덕은 인정해. 그래서 아직도 끈덕지게 직원들이 붙어 있더군. 하지만 과연 자네의 그 가족 같은 직원들이, 사장이 돈을 못 준다고 말한 뒤에도 선단에 계속 남아 있을까? -나는 직원들을 착취하고 일하는 가축으로 취급하지만 적어도 자기 가정을 건사할 돈은 주지! 과연 정을 핑계로 직원들을 계속 묶어두는 사장이 좋은 사장인지, 악랄해도 돈을 주는 사장이 좋은 사장인지! 정말로 궁금하군!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브랭크가 무수한 감정이 범벅이 된 얼굴로 제 머리채를 붙잡았다. 허억 허억 숨이 가빠왔다. 벌컥! 그때 문이 열렸다. “자네 아직 여기 있었군.” 증오스러운 존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드릭 선단의 네이프가 직원 두 명을 대동한 채 들어온 것이다.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네이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가! 네이프으으으!” “사정이 많이 어려운가 보군. 최근에 나도 비슷한 일을 겪어봐서 남 일 같지 않은걸.” “대체 유리 미그일은 누구냐! 유리 미그일의 뒤에는 누가 있는 거지? 정체가 뭐냔 말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유리 선단주께서 제안을 하시고 싶다 하셔서 내가 대신 왔네.” 네이프가 품을 뒤적거리다가 한 서류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인수증> 앵커폴에 있는 오한 선단과 직원을 고용 승계하겠다는 인수 증서였다. 예전에 브랭크가 네이프에게 제안한 내용 그대로. 그리고. <인수금 : 500골드> 금액도 그대로였다. “네이프 이노오오오옴!” 그가 달려들었지만, 네이프의 좌우에 서 있던 두 남자가 제지하자 간단히 넘어져 버렸다. 말리거나 도와야 할 오한 직원들이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웃어댔다. “비서! 용병들 데려와서 저놈들 붙잡아!” “그, 그게…… 아시지 않습니까.” 비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용병들은 더 이상 우리와 일하지 않습니다요.” 아아아악! 브랭크가 뒷목을 붙잡으며 쓰러졌고, 네이프는 그에게 유감의 시선을 보낸 뒤 다른 두 직원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기한은 5일까지일세.” 이 앵커폴 항구의 최종 승자가 정해진 순간이었다. * * * 엘드릭 선단은 빠르게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 점이지만, 네이프는 시몬으로부터 받은 5만 골드를 전액 선단의 신용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결국 선단의 브랜드 이미지는 유지되었고, 거기에 앵커폴을 엘드릭 선단이 완전히 장악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각 화물주들은 발 빠르게 엘드릭 선단의 배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물동량이 늘어나며 선단에 돈이라는 피가 돌기 시작했다. 네이프는 자비롭게도, 오한으로 넘어갔던 전 직원들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으며 오한의 선원들과 해상 지휘권 함장들까지 받아들여 규모를 늘렸다. 그러는 사이 엘드릭 선단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7군단의 준비도 척척 되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시몬!] 프린스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우하하!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앵커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돌섬. 그냥 바다 한복판에 돌이 우뚝 솟아 있는 지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하 터널이다. 본래는 몬스터 나가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7군단이 장악했다. 이후 알라제가 이곳으로 들어가 나가들을 군단의 데드나가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좀 나가 부대라는 느낌이 나네. 그렇지? 라미아.” -삐융! 시몬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라미아가 폴짝거리며 좋아했다. 이곳 뿐만이 아니라 곳곳의 나가들이 있는 곳을 장악해서 영역화하고 있었다. [군단장니임!] 마침 엘드릭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에르제베트가 돌아왔다. 그녀의 배 위에는 거대한 비석들이 가득했다. [모스록섬에 가서 익사자 망령이 깃들어 있는 비석들을 가져왔사와요! 이걸로 닻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수고했어, 에르제. 그 마을 주민들에게 이야기하고 보상도 줬겠지?” [물론이와요! 돌덩이 따위에 지출이 꽤 컸지만요!] “나중에는 몇 배로 벌어들일 수 있을 거야.” 시몬은 3군단으로부터 배운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미스테리 킬’ 작전 준비와, 미래의 7군단 바다 산업 준비도 착착 진행했다. 무엇보다 이제 곧 바닐라 측이 건조 중인 선박들이 완성된다. 각 함대가 준비되는 대로 작전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단 인수와 함대 제작으로 지출이 조금 크긴 크네요. 자금이 더 필요해요. 바닐라 측에서도 자재 구매가 필요하다고 하구요.] “으음.” 시몬이 인상을 구기며 생각에 잠겼다. 프로스트 필드의 마정석 동굴 수입과, 비명의 동굴 통행로 수입은 꾸준하게 들어와서 좋지만 지금처럼 갑자기 많은 지출이 필요한 경우에는 곤란했다. 그러자 바로 떠오르는 얼굴은 북부대공 진 아르스칼트. ‘대공께 또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금을 미리 받아야 하나? 음, 이번에도 부탁드리긴 좀 그런데.’ 내가 네놈 은행이냐며 왁왁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웃음이 지어졌다. 아니면 정말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는 방법도 있다. 시몬이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사이. 우웅! 웅! 시몬의 품에 있던 통신 수정구가 울렸다. 엘드릭 선단과 연결되어 있는 통신구였다. 시몬이 그것을 집어 들고 말했다. “네, 유리 미그일입니다.” -네이프입니다! 선단주님! “아, 무슨 일 있나요?” 네이프의 목소리에서 들뜬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로 근방에 보물섬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선단주께서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보물섬!’ 이 모든 일의 원흉. 바로 보물섬의 등장이었다. 시몬도 한 번은 직접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제대로 체크해 보고 싶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위치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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