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07화 시작의 동굴. ‘크읍!’ 결사의 구원자, 시엘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앉아 있었다. 동굴의 벽면 곳곳에 흉흉한 칼자국이 나 있고, 위를 올려다 보면 동굴 천장 일부가 깔끔한 단면을 드러낸 채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악명 높은 심판의 성녀에게 쫓기는 바람에,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저벅 저벅. 저 멀리 다나가 주위를 훑어보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넘쳐 흐르는 신성으로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쳐 오른 그녀의 모습은 끔찍한 죽음의 여신을 연상케 했다. ‘빠져나갈 길이 없어.’ 시엘이 땀방울을 흘리며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해상봉쇄도 철저했다. 암흑연합에서도 최강의 수군력을 자랑하는 3군단의 함선들이 바다를 완전히 틀어막은 뒤였다. 저 함선 중 하나에 3군단장 ‘제독’이 직접 타고 있다면, 바다로 나가는 건 더더욱 자살행위다. 그렇다고 이 동굴에서 버티기에는 심판의 성녀 다나가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도사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히에로미르! 네놈……!’ 그녀가 이를 빠득 갈았다. 아무리 히에로미르가 자신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 줄은 몰랐다. 자신이 죽으면 결국 그 또한 위험해진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인가. 시엘이 수정구를 들고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멀었느냐! 어서 포탈을 열어라!” 그녀가 급하게 보채자, 잠시 후 통신 수정구에서 삐질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 송구하옵니다만 나의 여왕이시여. 본가(本家)에서 포탈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고 있사옵니다. “뭐라?” -지금 이대로는 제1급 위험인자로 지정된 인물이 함께 공간을 넘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1급 위험인자라면 다나였다. 마침 저 멀리 그 악몽 같은 여자가 검을 바닥에 댄 채 불똥을 튀기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엘은 얼른 그녀의 시선을 피해 머리를 숨겼다. -본가에서는 어떻게든 시엘 님이 이 상황을 정리하고, 포탈을 열 안전한 장소를 확보하라고 합니다. “무슨 헛소릴 하는 것이냐! 이 상황에서 안전한 장소를 어떻게……!” 촤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기척을 감지했는지 다나의 검격이 날아왔다. 시엘이 다급히 몸을 던져 물러났고, 방금 그녀가 있던 바위가 두부 갈라지듯 말끔한 단면을 드러내며 잘렸다. 촤아아아아아!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고 동굴의 전체 일부를 갈라 버리며 지나가더니 하늘로 솟구쳐 저 멀리 구름마저 찢어버렸다. 시엘의 등줄기에 땀이 흥건해졌다. 시작의 동굴은 꽤 큰 섬 위에 형성된 장소이나, 다나의 공격에 섬이 버티질 못하고 있었다. 시엘이 더더욱 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안전하니 다시 한번 포탈의 허가를 요청하라.” -예? 방금 뭔가 칼날 같은 게 지나가는 소리가……. “요청하라!” -여, 여왕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통신이 끊기고 시엘이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든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 * * 한편. 구원자 시엘을 쫓고 있는 다나 또한 다나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그녀의 귀에 꽂혀 있는 소형 통신수정구에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여기는 지휘부 제2사령관.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방금 공격으로 구원자가 죽으면 어쩔 뻔했죠? 귓가에 울리는 시끄러운 음성에 다나가 인상을 썼다. “상대는 결사의 구원자다, 제2사령관.” 결사의 구원자 간의 강함은 천차만별이라고 하나 기본적으로는 대륙급 강자. 구원자라면 다나 또한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하는 상대였다. “너희 네크로맨서들이 자랑하는 퀸터라는 자도 그녀에게 당했지 않나. 손속을 두는 건 불가능하거늘.” -퀸터 경이라면 다른 차원에 넘어갔을 뿐, 아직 당한 건 아니에요. 다시 한번 귀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겠습니다. 어떻게든 그 구원자를 죽이지 않고 포탈을 열어 도망치도록 유도해야 해요. 우리의 목적은 고작 구원자 한 명의 처단이 아닙……. 꾹. 다나가 통신을 종료했다. 이 재미도 없고 번거로운 숨바꼭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피곤했다. 마음 같아서는 결사는 물론 여기 있는 증오스러운 네크로맨서들까지 싹 쓸어버리고 싶었고, 자신이라면 그럴 힘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시몬 폴렌티아.’ 시몬 폴렌티아가 결사의 ‘배니쉬’에 휘말려 사라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를 끄집어내 눈앞에 세우고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 있었다. 촤르르르르르! 그녀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발을 딛고 있는 지면이 유리처럼 바뀌더니 사라져 버렸다. 구원자 시엘의 반격이었다. 이내 동굴의 천장도 유리처럼 바뀌며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으나 다나는 발밑에 신성을 일으켜 가뿐히 빠져나온 뒤, 검을 휘둘러 유리로 변하는 세상을 토막내듯 베어버렸다. 촤아아! 다시 동굴로 빠져나와 미끄러지듯 착지한 다나가 콧김을 뿜었다. 구원자는 구원자.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적수를 상대로 죽이지 못하는 숨바꼭질을 해야 하는 건 다나의 입장에서도 피곤한 미션이었다. “역시 귀찮은 일에 휘말렸구나.” * * * 중립지대. 비상사태 합동 지휘부. 룬 리그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지하 벙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중립지대 각료들은 물론,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의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건 이 중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바로 유일한 네프티스의 핏줄인 로레인 아크볼드였다. “어떻게든 그 구원자를 죽이지 않고 포탈을 열어 도망치도록 유도해야 해요. 우리의 목적은 고작 구원자 한 명의 처단이 아닙…….” 꾹. 다나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자 로레인이 발칵 화를 냈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레인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관중들의 대피 상황은요?” “20척 중에서 19척 대피 완료. 늦게 합류한 룬 리그 관계자들도 모두 비상통로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비상통로로 오지 못하는 관계자들도 있을 거예요. 동굴 밖으로도 요원들을 보내세요. 더 이상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발생하면 안 됩니다.” 로레인이 척척 지시를 내리자 사람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네프티스의 핏줄이라는 후광 외에도, 지난 몇 주간 그녀는 본연의 리더십을 뿜어내면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합동 지휘부에 온 건 로레인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본래는 시몬과 함께 룬 리그에 참가할 생각이었지만 네프티스를 비롯한 원로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그 대신 현장에서 지휘를 맡아 시몬을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 원로들도 이것만큼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제1사령관, 중립지대 출신의 뚱뚱한 귀족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을 걸었다. “역시 일단 지금 나와 있는 결사의 구원자를 처단하는 게 급선무이지 않을까 하는…….” 로레인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리더로, 사건이 터질 리가 없다며 모든 일은 자신과 신성연방 측의 제3지휘관에게 맡겼다. 그러다 막상 일이 터지니 이렇게 끼어들고 있었다. “얼마든지 다시 설명드릴게요.” 하지만 상관을 납득시키는 것도 능력이다. 로레인이 손바닥을 펼쳤다. “우리 쪽 제7군단장이 사로잡아 온 구원자 ‘아락무라드’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붙잡혀 온 아락무라드는 여러 저주와 약물에 취하여 결사가 앞으로 벌일 여러 일들을 예언처럼 떠벌렸다. 그중에는 시몬이 아는 것도 있었다. -하늘로 올라간 짐승의 왕이 중동(中東)에 파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예언은 베히모스 떼의 출현과 중립지대 초승섬에서의 사태를 미리 예견한 것으로, 시몬과 소환학과 학생들이 그곳으로 가서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냈다. 그 외에도 여러 예언이 있었고, 해석 불가능한 것들도 있었다. -하계의 쌍둥이가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큰 두 탑을 각각 지울 것이다. 그 자리에는 모래만 남으리라. 세상을 지탱하는 두 탑은 암흑연합의 ‘상아탑’과 신성연방의 ‘천문탑’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했고. 세상에서 지우고 모래만 남으리라는 것은 신성연방에서 자주 일어난 이상현상인 ‘배니쉬’로 추정했다. 실제로 그 자리에 보라색 모래가 남았으니까. 하지만 하계의 쌍둥이가 누군지는 모르니 다들 골치 아파 하고 있던 찰나에. “우리는 배니쉬의 주동자로 추정되는 구원자 ‘히에로미르’에 주목했어요.” 로레인이 말했다. “만약 히에로미르가 하계의 쌍둥이라고 가정했을 때, 지금 다나에게 발각되어 쫓기고 있는 여자는 높은 확률로 히에로미르의 쌍둥이 누이일 거예요. 실제로 둘의 외모도 닮았고 둘 다 공간을 제어할 수 있죠.” “아……!” 제1사령관이 손뼉을 쳤다. “두 사람의 능력이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그 쌍둥이 누이가 포탈을 열게 유도해야 한다는 건 왜…….” 로레인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포탈 장치를 가리켰다. 시몬이 등 뒤에 메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장치였다. 노란색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가 이 장치로 공간 좌표를 확실히 손에 넣기 위해서는 해당 공간에 웜홀, 즉 공간의 틈이 만들어지는 게 필요해요.” 로레인이 말했다. “쌍둥이 누이 쪽이 포탈을 연다면, 시몬이 있는 곳의 좌표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예요.” 현재 결사는 포탈을 비롯한 모든 움직임을 중단하고 숨을 죽인 채 룬 리그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좌표 장치가 지휘부와 화이트랜드 모두에서 작동 중임에도 불구하고, 좌표가 잡히지 않고 있는 상황. 하지만 결사의 핵심 전력인 구원자는 이제 많은 수가 줄어들었다. 결사에서도 저 구원자가 죽도록 단순히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사에서 그녀를 대피시키기 위해 포탈을 여는 순간, 모든 게 성공적이다. 시몬이 있는 곳의 좌표를 획득할 수 있고, 그가 있는 곳으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 “즉, 이번 작전은 두 전장에서 동시에 활약이 이루어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거랍니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들어갔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전투복 차림의 상앗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턱을 괴고 있었다. 바로 세르네 아인다르크였다. “어서 다른 차원으로 가서 시몬을 만나고 싶네요.” “…….” 로레인이 지휘부로 들어온 것보다 놀라운 점은, 세르네 아인다르크 또한 이번 작전에 합류할 것을 자처한 것이다. 로레인이 표정을 굳혔다. 어떤 세계로 떨어지든 인간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세르네의 힘은 무조건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녀가 100% 협력해 준다는 게 전제지만 말이다. “무슨 속셈이야? 세르네.” “속셈이라니, 섭섭하네요. 상아탑을 노리는 결사의 전략을 막으려는 건데 당연히 미래의 상아탑주인 제가 가야죠.”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시몬을 구하기 위해서 제가 발 벗고 현장에 나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누구와는 달리요.” 그 누구라는 게 본인이라는 걸 안 로레인이 인상을 썼지만, 이내 참을성을 갖고 미소 지었다. “그래, 도와줘서 고마워.” 그 말에 세르네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 ‘어른인 척하기는.’ “실례합니다.” 그때 이번엔 신성연방 측 제3사령과 프리스트들이 지휘부로 들어왔다. “제7군단장으로부터 바훌 복음을 넘겨받은 덕분에, 하늘섬에서도 공간을 넘을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구체적인 공간 좌표만 있다면 가능합니다.” “좋아요.” 이제는 포탈이 열고 시몬이 있는 곳으로 전투요원을 순차적으로 보낼 준비만 하면 된다. 세르네를 비롯한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현재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로레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분과 연락은 닿았나요?” “현재 로크섬에 연락을 넣어두었습니다만, 제대로 된 답은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설득하겠어요.” 로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의 일이라면 반드시 나서주실 거예요.” * * * 같은 시각. 로크섬. 또각 또각. 저주학과 수석조교 체에클이 피곤함과 귀찮음이 공존하는 얼굴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퇴사하고 싶다.’ 지금까지 수천만 번은 했던 그 생각을 떠올리며 그녀가 한숨을 포옥 쉬었다. 주위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된, 바힐의 갑작스러운 3주 휴강 선언. 조교진이 준비한 모든 일정이 꼬여 버렸다. 휴강의 이유도 멍청했다. -룬 리그에 참여한 시몬 폴렌티아의 모든 것을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리고는 연구실 문을 닫아버리고 식음을 전폐한 채 룬 리그 영상이 담긴 메모리얼 수정구로 시몬의 활약만 돌려보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둘러대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바힐의 연구실로 향하는 그녀는 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 위에는 간단한 빵이나 음료가 담겨 있었다. 원래는 못 본 척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들었는지 먹을 건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사람을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리오. 마침내 그녀가 바힐의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이미 연구실 문 앞에는 하수인들의 숱한 시도로 보이는 음식들이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칠흑으로 이루어진 검은 가시 덤불 같은 것들에 휘감겨 있었다. 이 세상의 그 누가 바힐 아마가르의 저주를 뚫고 음식을 건네줄 용기를 가지겠는가. 그녀가 쟁반을 근처에 내려놓은 뒤 흑마법을 사용했다. <바힐 리메이크 - 캔슬레이션> 쿠쿠쿵!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문을 휘감은 가시덤불이 사라지며 마침내 시커멓던 문의 색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손등으로 가볍게 노크한 뒤 말했다. “교수님, 체헤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달칵.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섭게 시끄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언제 설치했는지 커다란 마나 스크린 앞에 한 영상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헥스! 룬 리그 마지막, 시몬과 별의 성녀와의 대결. 그중에서도 별의 성녀가 ‘아이기스’라는 강력한 수호마법을 펼치자, 시몬이 바힐이 가르쳐 준 저주인 ‘헥스’를 사용해 방어를 뚫고 그녀에게 저주를 맞추는 광경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물론 그 뒤에 별의 성녀가 축복으로 저주를 상쇄하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그 부분을 자른 채 시몬이 헥스를 쓰는 장면만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의 소파에 앉은 저주학 교수 바힐 아마가르. 그 광경을 보며 턱을 짚은 채 헤벌쭉하게 웃고 있는 게 참으로 가관이었다. ‘나는 상관을 모시고 있는 걸까. 애를 키우고 있는 걸까.’ 체헤클이 화를 낼 힘도 없다는 듯 음식과 음료가 든 쟁반을 근처에 내려놓았다. -헥스! -헥스! 빌어먹을 반복 재생에 벌써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다. 체헤클의 이마에 주름이 더 늘었다. “아, 체헤클! 마침 잘 왔습니다!” 바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장 먼저 입수한 룬 리그 5일 차 광경입니다! 보십시오! 나의 시몬이 헥스를 쓰는 이 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가 두 팔을 쫘악 벌리며 미소지었다. “룬 리그가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든 속성으로 신성 대항 저주를 가르친 보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잘 보입니까? 내가 가르친 저주가 그 미련한 에프넬의 브로데릭이 가르친 수호마법을 보란 듯이 뚫고 들어가는 모습 말입니다!” 그가 팔을 뻗어 시몬이 저주를 사용한 것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팔의 각도, 시선 처리, 번뜩이는 연산과 냉정한 시전까지! 모든 게 완벽에 가깝습니다! 특히 놀라운 건……!” 바힐은 약 20분간 선 자리에서 시몬이 얼마나 완벽하게 저주를 사용했으며 그가 펼친 마법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성녀의 방어마법을 보는 즉시 자신이 가르쳐 준 저주를 떠올리고 구사한 재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입이 닮도록 칭찬했다. 체헤클이 반발심리로 툭 말했다. “그 뒤에는 아마 별의 성녀가 축복을 사용해서 저주가 막히지 않았나요?” “막힌 게 아니지요.” 바힐이 고개를 저어 보인 뒤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프리스트가 저주를 풀기 위해 큰 기술을 강요하는 것으로 시간을 벌었다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그 뒤에 시몬이 거리를 좁혀 마투를 사용한 점은 아쉽군요. 나였다면 헥스를 재시전해서 스택을 쌓는 것으로 승부를 봤을 겁니다.” 터업. 바힐의 입을 막기 위해 체헤클이 빵 하나를 그의 입에 물렸다. 그러나 바힐은 빵을 씹지도 않고 그대로 집어삼킨 뒤 설명을 이어나갔다. 체헤클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시몬 학생회장은 군단장이에요. 룬 리그 기간 중 대부분은 소환학으로 싸웠어요. 저주학 기술을 사용한 건 5일 차의 저 헥스가 전부잖아요.” “하하! 그럴 리가요! 아직 멀었군요 체헤클!” 바힐이 직접 메모리얼 수정구를 조작하더니, 이번엔 7군단과 신성 군단이 맞붙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 “군단의 대규모 전투? 저거야말로 소환학 아닌가요?” “하늘을 보십시오.” 화면의 하늘에는 아주아주 자그맣게 스컬윙들의 모습이 잡혔다. “스컬윙들이 마법진을 펼치고 스스로 움직이는 게 보입니까? 내가 가르쳐 준 ‘군단 저주학’이지요.” ‘아오.’ 본래 인간이란 생물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더니.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군단의 총괄적인 움직임도 보십시오! 나의 시몬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 ‘나의 시몬’이라는 말 좀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군단의 운용에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3일 차의 군단 운용과 5일 차의 군단 운용이 완전히 달라졌죠. 이건 학습으로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바힐이 마나 스크린에 손을 올리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나의 시몬이 ‘콤펠로니아’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아! 한 번 사용하고 봉인했다던…….” “확실합니다. 그 또한 콤펠로니아의 리스크를 알고 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나 보군요.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초월적인 이성으로 세상을 관조할수록 소환학보다 저주학이 더 우월하다는 점을 깨우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똑똑똑똑! 그때 밖에서 다소 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며 바힐의 말이 끊겼다. 체헤클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며 정장을 차려입은 키젠의 본부 직원이 뛰어들어 왔다. “실례했습니다 바힐 교수님! 비상 연락입니다!” “휴가 중입니다.” 바힐이 다시 마나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그러자 본부 직원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룬 리그 합동 지휘부에서 로레인 사령관님의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이 위기에 빠졌으니 도와달라고…….” 펄럭! 바힐이 옷걸이에 걸린 하얀 정장 재킷을 붙잡더니 역동적인 동작으로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뭐 합니까. 출발 안 하고.” * * * 그리고 다시 ‘더 시티’. 철컹 철컹 철컹! 쇳덩이 같은 화물 기차에 시몬과 레테가 투명마법을 건 채 매달려 있었다. “괜찮아?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말해줘.” “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테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챙긴 시몬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보라 끝 너머에서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이제 곧 대륙의 전력이 넘어올 거야.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이 세계의 정보를 모으는 것. 그리고 포탈이 열릴 때 안전한 곳을 마련하는 것.” 시몬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저기가 더 시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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