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111화 몸의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며 라우라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꺄르르륵! -여기야! 여기! 어린 시절, 풀밭에서 테네리페와 함께 뛰어놀던 광경이 꿈결처럼 떠오른다. 어떻게 된 게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이 광경을 보고 있다. 세르네 아인다르크에게 기억을 뽑혔을 때도, 메리다 휴 이켈의 슬립에 걸렸을 때도, 심지어 죽기 직전인 지금까지도 이 광경을 떠올리고 있다. ‘……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련’이다. 분노와 아집 속에서도 이 감정만큼은 끝까지 빛이 바래지 않고 또렷한 색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왕녀의 대역으로 입양됐을 터. 가지지 못할 것에 욕심을 품지 않고, 가진 것에 충실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 하는- 그런 미련. ‘어처구니가 없어.’ 욕망에 사로잡히고, 증오심을 키우며 괴물이 되었다. 왜 이토록 왕녀 같은 것에 집착했을까. 무의미하고, 비틀린 삶이었다. “…….” 시몬과 메리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라우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금지된 마법을 사용해서 몸을 강체화시킨 대가로, 드디어 몸이 조각조각 나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시몬은 그다지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악인이었으니까. “정보를 더 끄집어내지 못한 건 아쉽네.” 메리다가 중얼거렸고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로소 안도감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빼꼼.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기에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기둥 뒤에 숨은 채 달달 떨고 있는 왕녀 후보, 다비가 보인다. “이제 다 끝났어, 다비.” 시몬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긴 위험하니까 1층 아무 방에나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아, 그게요……!” 다비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저 멀리 복도 끝을 가리켰다. 시몬과 메리다가 그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 여기서 다른 유령궁방으로 넘어갈 수 있는 오픈키, 새 모양 조각상이 녹색이 아니라 시뻘겋게 물든 색으로 변해 피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흐흐! 이건 심각하군!] 피어도 한마디 했다. 시몬이 얼른 메리다를 보았다. “메리다. 이건……!” “테네리페 님이 유령궁 억제에 손을 놨으니까. 빨간방의 숫자가 한계까지 늘어난 거야.” 메리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얼마 안 가 고스트스트림이 벌어질 거야.” “당장 막아야 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이제는 새로운 유령왕녀이자 유령궁의 던전주가 된 메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테네리페 님이 있던 5층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 “서두르자.” 메리다의 ‘몽유도원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선로를 보수하고, 다시 한번 장난감 기차를 만들어냈다. 시몬과 메리다가 나란히 앞좌석에 올라타자, 바로 그 뒷좌석에 다비가 뛰어 들어왔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털갈이를 돕는 왕녀 후보로서 교육받았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위험할지 모르는데 괜찮아?” “물론이죠! 유령궁을 지키는 게 소프리아에 사는 사람들의 의무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다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의무. 어떻게 보면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 말에 아직도 자부심을 느끼는 어린 네크로맨서가 남아 있었다. 시몬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메리다가 장난감 기차를 출발시켰다. 칙칙폭폭 유치한 열차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지더니. “우와앗!” “꺄아아아아아!” 예상치 못한 속도로 가속하며 기차가 오픈키로 빨려들어 갔다. * * * 모두를 태운 장난감 기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5층에 도달했다. 라우라를 1층으로 내리꽂은 철로를 그대로 역주행해서 올라온 것이다. 세 사람이 재빨리 열차에서 내렸고, 저 앞에 테네리페가 의식을 되찾았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보였다. “테네리페 님!” “왕녀님!” 시몬과 다비가 얼른 뛰어나가 양옆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테네리페는 괜찮다며 손바닥을 펼쳐 보인 뒤, 고개를 들어 메리다를 응시했다. “……라우라가 아니라 네가 왕녀가 되어서 다행이야. 휴 이켈 후배.” 메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네리페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안해, 유령궁과 관련도 없던 네게 너무 큰 짐을 맡겨 버려서.” “괜찮아요. 이 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예요.” 메리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실 왕녀가 됐지만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나쁘지 않은 기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이번엔 시몬이 몸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테네리페 님,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건너온 모든 유령궁의 방들이 ‘빨간색’이었어요. 지금쯤 밖은 난리가 났을 겁니다.” “응, 고스트 스트림만큼은 막아야겠지.” 테네리페가 메리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줄래?” 메리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네, 물론.” 드디어 유령왕녀로서 메리다의 진정한 데뷔가 시작됐다. 테네리페의 본체가 있던 바로 그 의자에 앉은 그녀가 눈을 감고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네 가슴속 고동을 느껴보렴.” 테네리페의 설명에 따라 메리다가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흐릿했던 스피릿 드레스가 나타나고, 머리에 다시 한번 그 티아라가 생겨났다. “그 고동이 바로 던전주로서의 힘이야. 던전주와 유령궁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몰입 상태에 빠져야 해.” 끄덕. “다비, 메리다가 지치는 것 같으면 바로바로 스피릿을 공급해 주렴.” “알겠습니다!” 테네리페와 메리다, 그리고 다비가 다시 한번 유령궁의 폭주를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시몬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흐흐! 왜 그러나 소년?] ‘……살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이번 사태를 일으키러 넘어온 구원자는 라우라 한 명이 다가 아니었잖아요?’ 시몬이 찜찜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구원자는 한 명은 여전히 밖에 있을 거구요. 고스트스트림 이상으로 바깥 상황이 걱정이네요.’ [크흐흐! 유령궁 측에서 지원을 요청했다고 하지 않나! 지금쯤 키젠을 비롯한 왕국 각지의 네크로맨서들이 도착했을 거다!] 시몬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네, 부디 그 구원자가 제가 알고 있는 그 녀석만 아니었다면 좋겠는데요.’ * * * 유령궁 바깥. 유령궁의 지원 요청을 받고 외부에서 막 넘어온 네크로맨서나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유령궁이라고?” “세상에 종말이 도래한 것 같은 광경이군.” 유령궁이 아무런 명암 없이 그저 피처럼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피가 뚝뚝 흘러나오는 이 유령궁에서 무수히 많은 망령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가히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막아라!” 가까운 드레스덴 왕국의 네크로맨서들을 비롯하여, 암흑연합과 키젠의 네크로맨서들까지 모조리 유령궁으로 날아왔다. 현장을 지휘하는 까마귀 요원, 하반신이 말처럼 바뀐 벡터가 인상을 바짝 구기며 소리쳤다.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해! 본부의 추가 전력 지원이 필요하다!” -현재 파견 인원만으로도 한계입니다! “이건 대륙 전체의 위기다! 본부에 사람이 없으면 남아 있는 사령학과 3학년들이라도 죄다 이쪽으로 보내!” -이, 이미 사령학과와 핵심 학생들이 그쪽으로 갔습니다! 쿠쿠쿠쿠쿵! 곳곳에서 네크로맨서들이 뛰어나와 결계를 펼치거나 저주나 사령마법을 날리며 망령 언데드들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노력에도 보람 없이, 유령궁에서는 끊임없이 망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벡터가 다른 수정구를 들고 말했다. “유령궁 내부에서의 연락은?” -여전히 무반응! 메인홀에 남은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내부에서도 난리인 모양이라……! “빌어먹을!” 유령궁과의 연락이 끊겼다면, 지금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유령궁에서 쏟아져 나오는 망령들을 틀어막는 것뿐이다. 하지만 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지금 유령궁이 저렇게 변한 건, 틀림없이 테네리페의 안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으니까.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게. 벡터. 그때 통신구에 나이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배신의 군단장이 저 안에 있다고 하질 않았나. 7군단이 가진 에이션트 언데드만 자그마치 여덟이야. 그의 군세로도 막지 못한다면 누가 가도 마찬가지일 걸세. “그래도 이렇게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렇게 대꾸한 벡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돗자리를 깔고 여러 수정구들을 띄워놓은 채 통신하는 통신병이 있었다. “여기 물레의 네크로맨서가 와 있다고 했지? 그에게 연락해라.” “예! 잠시……!” 쨍! 그런데 통신 수정구 하나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레의 네크로맨서, 응답 없음. 아무래도…… 전사한 것 같습니다.” 쨍! 쨍! 연달아 통신 수정구 몇 개가 깨졌다. 통신병이 다급히 말했다. “서부 방어선이 급속도로 빠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망령들 때문이냐?” “그쪽으로 연락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치직! 칙! -여기는 C-6! 지금 바로 지원을 요청한다! 흰 코트를 입은 인간이 우리를 공격하……! 아아아악! 연락이 뚝 끊겼다. 벡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망령이 문제가 아니었다. 끔찍한 강적이 있다. * * * 서부 방어선.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백색 코트의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참.” 그의 주위에는 무수한 왕국의 네크로맨서들이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었다. 남자가 하안 구두로 쓰러진 네크로맨서의 얼굴을 화풀이하듯 걷어찼다. “돌아가는 거 방해하지 말라니까. 서로서로 좋게 좀 가자고.” 그의 정체는 구원자 킬로바니안. 그가 그믐달처럼 창백한 잿빛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유령궁 밖에서 대기하던 그는 유령궁이 장난감 성으로 변했을 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고, 뒤늦게 물러나려 했지만 지원 요청을 받고 몰려든 무수한 왕국 및 암흑연합의 네크로맨서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당연히 결사인 그를 암흑연합의 네크로맨서들이 그냥 보내줄 리가 없었다. “저기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를 맞혀!” 하늘에 번쩍번쩍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온갖 원소계열 흑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킬로바니안은 혀를 차고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쪽이다!” 언덕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저주술사들이 저주를 발사했다. 그러나 검은 직선처럼 쏘아진 저주들이 킬로바니안의 몸에 닿지 않고 그의 주위를 빙빙 돌더니 그대로 반대로 날아가 시전자인 주인들에게 맞고 말았다. “네놈이 킬로바니안이냐?” 이번엔 빗자루를 타고 날아온 여성 네크로맨서가 손을 뻗으며 검은 탄환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흑마법이었고, 킬로바니안이 있던 지점이 단숨에 초토화되며 연기가 휘몰아쳤다. “드디어 구원자를……!” 퍼억! 여성의 말이 뭐라 끝나기 전에 그녀의 복부가 방금 발사한 검은 탄환에 꿰뚫렸다. 그녀가 휘청하며 빗자루에서 떨어져 내렸다. “기술 잘 쓰마.” 촤아아아아아! 킬로바니안이 날듯이 뛰어다니며 사방으로 방금 네크로맨서의 검은 탄환을 쏘아 보냈다. 접근전을 위해 돌진하던 마투 네크로맨서들이 하나같이 몸에 구멍이 뚫린 채 폭발했다. 처음 발사한 것과는 속도와 정밀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쓰레기들이 덤벼봐야 나한테는 못 이긴다니까. 제인 부총장이나 배신의 군단장은 안 왔어?” 공중으로 빠르게 이동한 킬로바니안이 단숨에 방어선을 뚫어냈다. 그러고는 필드 저주와 전파마법으로 킬로바니안의 위치를 알려주던 네크로맨서를 찾아냈다. “허, 허억!” “네놈이 내 위치를 알리고 있었구나.” 킬로바니안이 손바닥을 펼쳤다. 통신을 하던 네크로맨서가 덜덜 떨며 소리쳤다. “살려……!” 퍼억! 머리통이 날아간 몸통이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주위의 마법진이 모두 빛이 꺼진 채 사라졌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군.” 휘이이이이이잉! 그러나. 바람을 가르며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시커먼 대포알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투콰아아아아아앙! 강렬한 폭발이 연달아 쏟아지며 킬로바니안이 있는 곳의 지형이 뒤바뀌었다. 그 공격은 하늘. 달이 뜬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유령선들이 대포알을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는 키젠의 사령학과 총대표, 유령함대의 엘리사 셀린.” 제복을 연상케 하는 긴 재킷을 휘날리며, 유령선에 올라탄 엘리사가 통신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결사의 구원자로 추정되는 용의자 발견, 응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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