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100화 유령궁 첫 출근을 무사히 마친 시몬과 메리다는 ‘별궁’이라 불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시몬은 피곤한 얼굴로 터덜터덜 계단을 걸어와 방에 짐을 풀고 기지개를 쭉 켰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나 싶었는데. “응?”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쪽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늘 밤, 소프리아의 흰 문어 주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우아한 필체. 섬세한 곡선과 매끈한 직선이 어우러진 이 글씨체는 세르네의 것이 틀림없었다. 뒷장을 살펴보니 아예 세르네의 깃털까지 붙어 있었다. ‘소프리아라, 한 번쯤 가봐야 하긴 하지.’ 이곳 유령궁의 근방에는 테네리페가 다스리는 여러 부속 도시들이 존재한다. 당연히 전부 제4군단장 유령왕녀의 영역이며, 암흑연합의 영토가 아닌 독자적인 법률과 행정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외부에 잘 알려진 도시가 바로 ‘소프리아’. 이 소프리아는 유령궁을 중앙에 놓고 둥글게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유령궁과 암흑연합 내 다른 지역의 완충지대 성격이 강하다. 어쩌다 한 번씩 유령궁에서 빠져나온 망령들도 소프리아 도시의 결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냥당한다고 한다. 시몬은 바로 움직였다. 유령궁에서 힘을 많이 써서 그런지 여전히 정신이 말똥말똥한 메리다를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숙소 로비에 있는 뮬리아에게 도시를 나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기꺼이 마차를 한 대 불러주었고, 그렇게 시몬과 메리다는 마차에 몸을 싣고 이동했다. * * * 덜컹덜컹!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한동안은 계속 창밖에 시커먼 정원만 보였다. 그러다 도시에 들어온 순간을 기점으로 경관이 확 바뀌었다. “와!” 소프리아는 어두운 숲과 대비될 만큼 도시 전체가 새하얀 벽돌과 흰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심지어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도 흰옷을 주로 입었다. 깨끗한 순백의 향연. 왜 이렇게 도시가 하얀 거냐고 마부에게 물어보니, 망령을 잘 구분하기 위함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망령의 몸은 스피릿과 칠흑으로 이루어져서 시커멓거나 불그스름한 빛을 띠죠. 온통 흰색인 이 도시에서는 망령을 빠르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마차가 멈추고 시몬과 메리다는 내려서 걸었다. 마부가 알려준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니 금방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흰 문어 주점> 주점도 겉은 흰 도료 등으로 칠한 모습이었으나, 내부로 들어오니 평범한 나무색이었다. 시몬과 메리다는 성큼성큼 걸어와 지하의 작은 주점에 들어섰다. ‘주점은 대륙 어느 곳이나 다를 바가 없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오렌지빛 조명 아래로, 작은 좌석에 앉은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대륙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 의자에 걸어둔 외투가 흰색이 많다는 점이 조금 특이할 뿐이다. “어서 오세요.” 반가운 인사말이 들렸다. 주점 직원이겠거니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시몬은 깜짝 놀랐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바텐더가 눈앞에 있었다. 상앗빛 머리카락을 묶어서 말총머리처럼 만들었고, 바텐더 복장에 검은색 조끼를 걸쳤다. 남장까지는 아니지만 중성미 있는 느낌의 세르네가 잔을 뽀득뽀득 닦으며 생긋 눈웃음쳤다. “잠시 쉬다 갈래요? 잘생긴 청년.” 의외인 모습에 시몬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세르네는 쿡쿡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다른 곳은 다 찼으니 이쪽으로 모실게요.” 세르네는 바텐더와 이야기할 수 있는 바 자리를 가리켰다. 시몬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옆에 있던 메리다가 심술궂게 시몬을 툭 치며 지나갔다. “메리다?” “…….” 메리다가 한쪽 자리를 털썩 차지하고 앉더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옆자리를 향해 턱짓했다. 시몬은 쓰게 웃으며 다가가 그 자리에 앉았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어요? 술? 아니면 달달한 거?” 시몬이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세르네. 정보 조사가 이런 거였어? 여기 원래 장사하시는 분은?” “그동안 바빴던 가장에게 오붓이 가족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죠. 가족들과 근교 여행 중이에요.” 찰칵찰칵. 세르네가 손에 든 셰이커를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앉은 이쪽은 방음 결계를 펼쳤으니까. 목소리 크게 내도 돼요.” “아, 다행이네.” 시몬이 비로소 목소리를 본래 톤으로 냈다. 메리다가 쓱 손을 들어 올렸다. “난 달달하고 잠 잘 오는 거.” “도수 센 거로 드릴게요. 시몬은?” “임무 중이니까 술이 거의 안 들어간 거로 부탁해.” 세르네는 즉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리 썰어둔 과일 조각을 적절히 넣고, 그 밖에 다채로운 재료들을 더한 뒤 춤을 추듯 쉐이커를 흔들었다. 정교한 손기술에는 세련된 기품이 느껴졌다. 동작에도 자신감이 가득했다. ‘……정말 못 하는 게 없네.’ 잠시 후 시몬의 앞에는 레몬이 올려진 음료가 나왔고, 메리다에게는 체리 조각이 통째로 들어간 빨간색 술이 나왔다. 메리다는 꿀떡꿀떡 술을 마신 뒤 바로 바에 퍼질러 누워 졸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잠이 절실해 보였기에, 시몬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세르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유령궁 첫날, 힘들었나 봐요?” “고생했지.” 시몬이 제 목을 매만졌다. “그래도 할 만했어. 테네리페 님도 유령궁에 대해 잘 알려주시고, 위험 지대인 빨간방을 제외하면 그렇게 어려운 곳은 없었어.” 세르네가 눈을 빛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이었나요?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요.” “기브 앤 테이크.” 시몬이 슬쩍 웃으며 두 손바닥을 붙였다. “일단 네가 여기서 모은 정보부터 알려주면 말해줄게.” “짓궂으시네요. 공짜 술도 얻어 마셨으면서.” 세르네가 손바닥을 뺨에 댄 채 촉촉한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여기에 당해줄 시몬이 아니었다. “네가 아직 적일지 아군일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신중하게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고 싶어.” “어쩔 수 없네요.” 결국 세르네는 2주 전부터 활동하며 유령궁과, 이곳 인근 도시 소프리아에 대해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시몬은 음료를 마시며 편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소프리아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세르네가 말했다. “그 원인은 왕녀 후보 강제 차출. 그 유명한 유령왕녀께서는, 나이가 적당하고 아직 코어를 개방하지 않은 소녀들을 모조리 차출해서 강제로 네크로맨서로 만들고 왕녀 후보로 훈련시키나 봐요. 물론 말이 왕녀 후보지, 사실은 털갈이 대타죠.” “……음.”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훈련 과정에서 많이 다치기도 하고, 특히 원래 왕녀 후보이자 매년 털갈이를 책임지던 사람이 이유 모를 이유로 죽은 뒤로는, 이번 일에 대한 의구심 자체가 늘어나고 있어요.” “배부른 소리.”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메리다가 여전히 엎드린 채 잠꼬대처럼 말했다. “권리는 누리면서 의무는 피하려고…… 음냐음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죠.” 테네리페의 영역에 속한 도시들은 지배층인 유령궁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사실 유령궁은 암흑연합 차원에서 막대한 분담금을 지원받기 때문에 세금이 필요 없고, 오히려 남은 분담금으로 소프리아를 비롯한 도시 곳곳에 지원을 해준다고 한다. 몬스터의 공격도 없고, 테네리페의 이름 아래 범죄 조직이나 전쟁의 위협도 없는 가히 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대륙민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만 이민은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만 계속 소프리아에서 지낼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단점이 있다면 궁에서 빠져나오는 망령들에 시달린다는 것, 그리고 테네리페의 왕녀 후보 차출이었다. “저기 봐요, 다들 표정이 불만스럽죠?” 시몬이 귀를 슬쩍 기울여 보았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왕녀’, ‘차출’, 이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차출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주장을 말해보자면, 본래 유령궁에서는 ‘털갈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테네리페 치세 이후로 생긴 개념이다. 원래는 없었던 시민 차출을 강행하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죠.” “살짝 충격인데.” 시몬이 손끝으로 눈썹을 훑었다. “테네리페 님 이전엔 털갈이 시즌이 없었다고?” “내가 조사해 보니 비슷한 사례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이렇게 매해 대규모 차출을 벌일 정도는 아니었단 거죠.” 세르네가 손에 깍지를 꼈다. “그런 이유로 연합 곳곳에서 의심쩍은 시선으로 유령궁을 보는 건 사실인가 봐요.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테네리페가 사실은 그쪽 성향이고 여자들을 노리개로 쓴다느니, 네크로맨서들을 키워 군대를 만들고 있다느니. 아마 우리가 들은 ‘배신 문제’도 이쪽 소문을 기반으로 하겠죠.” “…….” “하지만 여긴 치외법권을 인정받은 테네리페의 영역, 이곳의 주민들은 테네리페의 소유물이나 다름없고 실제로 그런 짓을 벌인다고 해서 처벌할 수 없어요.” 시몬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령궁에서 본 테네리페의 모습에서는 그런 인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테네리페는 상상 이상의 인간 말종이야.” 그때 제3자의 목소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느새 주점 손님 중 한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금발에 긴 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세르네가 방음 결계를 펼쳤는데, 어떻게?’ “방해했다면 미안, 우연히 시선이 갔는데 입 모양과 다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길래 뭔가 했거든. 역시 목소리를 숨기는 이유는 테네리페 때문이겠지?” 시몬이 경계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누구죠?” “이제 제대로 들리네. 한때 유령궁에 소속되었던 네크로맨서, 라고 하면 믿을까? 지금은 아니지만.” 그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테네리페는 악랄한 여자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가차 없이 희생하고 버릴 여자지.” 그녀가 손에 쥔 잔을 들어 올린 뒤 단숨에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알코올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털갈이 같은 건 사람들의 희생으로 테네리페의 악의적인 즉위 기간만 늘려줄 뿐이야. 그녀를 축출해야 해.” “테네리페 님이 악의적인 사람이란 증거가 있나요?” 큭큭. 그녀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증거는 없지만 나라는 증인은 있는데…… 괜한 소리려나? 그리고.” 콧김을 길게 뿜은 그녀가 제 목덜미로 손끝을 가져가더니 이내 세르네의 깃털을 뽑아서 테이블에 술값과 함께 내려놓았다. “굳이 이런 걸 안 써도 본심을 말했으니 걱정 마시고.” “…….” 세르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저 여자, 세르네의 정신지배에 저항할 만큼 강력한 네크로맨서였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봐.” 저벅저벅. 그녀가 금발 머리를 흔들며 술집을 나섰다. 세르네가 턱을 괴었다. “음- 누군지 궁금해지는걸요? 적당히 추적해 봐야겠네요.” “무리는 하지 마.” “그럼요. 방금 추적을 붙였어요. 우리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오죠.” 그녀가 시몬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의 말도 그렇고, 내가 얻은 정보도 그렇고. 근거 없는 의심은 없는 법이죠. 시몬도 의문이 생기지 않아요? 나를 유령궁에 들여보내 준다면 제대로 된 증거를 모을 수 있을지 몰라요” “…….” 시몬은 잠시 눈을 감고 카쟌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정보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유무형의 정보든 간에 사람의 인식과 편견, 사고가 들어가서 가공되고 왜곡된 것들이지. -시몬. 네 직감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네가 직접 현장인 유령궁으로 가서 네 판단으로 움직여라. 그게 최선이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세르네.” “네?” “널 유령궁에 들여보내는 데 협력할게. 그 대신,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테네리페 님께 손을 댈 것. 알겠지?” 세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나, 세르네 아인다르크의 이름을 걸고.” “메이린의 이름도 걸어줄래?” 아차. 그녀가 혀를 차며 쓰게 웃었다. “못 본 사이 더 짓궂어졌다니까요. 알았어요. 메이린의 이름도 걸고, 유령궁에서 확실한 증거가 마련된 뒤에 테네리페를 치도록 할게요.” “좋아.”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자.” * * * 다음 날 출근 아침. 시몬과 메리다는 작전을 개시했다. 유령궁의 출입 과정이 상당히 복잡했기 때문에 계획을 디테일하게 짜야 했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네, 이쪽이요.” 제일 먼저 유령궁에 들어온 시몬은 출입장부를 확보해 세르네에게 건넸고, 세르네는 한 사람에게 오늘 출근했다는 착각을 걸어둔 뒤 그 사람의 칠흑과 스피릿을 아티팩트에 담았다. 이후 세르네의 정신 장악으로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착각을 부여했다. 동시에 여러 사람들의 목덜미에 깃털을 꽂은 뒤에야, 세르네가 움직였다. 그렇게 출입장부에 한 사람이 서명을 잊게 만들었고, 세르네는 시몬의 손을 잡고 유령궁 안으로 들어온 뒤 필체를 외워둔 시몬이 출입장부에 기록을 마쳤다. -네가 몰래 들어온 거 들키면 우리도 끝장이야. -그럼요, 제대로 해볼게요. 대체 어떻게 1군단과 4군단이 협력관계라는 점을 알아낸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세르네는 나침반도 없이 곧장 위험지대인 방으로 넘어갔다. 당분간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폴렌티아 후배! 휴 이켈 학생!” 테네리페가 날듯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2층 이상에서 수업을 진행할 거야! 준비됐니?” 아무리 봐도 배신을 하거나 사람들을 가지고 놀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으니까. 시몬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당분간은 유령궁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물론 겸사겸사. ‘7군단에도 유령부대, 하나쯤 있을 법하지?’ 사적인 일도 하나 만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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