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99화 망령들과 싸우며, 커다란 옷들이 가득한 분장실을 빠져나온 시몬과 메리다, 테네리페는 바로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방이 있었다. 와인 저장고였는데, 들어오자마자 난데없이 발밑부터 와인이 홍수처럼 차오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주방에서는 도마 위의 시몬 일행을 식재료로 생각하는지 식칼을 마구 내려치는 형상체도 만나야 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암벽처럼 떨어지는 ‘서재’는 위험천만했고, 훈련용 허수아비들이 덤벼드는 ‘연무장’은 너무 넓어서 길을 잃을 정도였다. 옛 궁전의 틀을 뒤집어쓴 신비하고 특수한 던전.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에 시몬은 모험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특히 유령왕녀의 전투에서 배워가는 것들이 많았다. <이그니스 파투스> 허공에 떠다니는 위습을 끌어모은 시몬이 명령했다. [깃들어.] 방금 주운 커다란 젓가락에 위습들을 뭉치게 한 다음, 이 젓가락을 장창처럼 쓰면서 망령들을 꿰뚫으며 달렸다. “귀찮아.” 메리다는 눈을 반쯤 감고, 선반 위로 손바닥을 펼쳤다. <무아몽중 - 범위 제어> 메리다도 이 와중에 성장하고 있었다. 완전히 잠들지 않고도 국소 부위만 ‘무아몽중’을 거는 신기술. 식당의 선반 위로 깜짝 인형들이 쏟아져 나와 망령들을 붙잡은 뒤 데려갔다. 두 사람을 인솔하던 테네리페가 꺄르륵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렇게 유령궁에 빨리 적응하는 네크로맨서들은 처음 봐! 역시 키젠은 다르구나악!” 이제 테네리페가 비명을 지르는 타이밍도 파악했다. 시몬과 메리다는 익숙한 듯 두 손을 귀 옆에 올리고 있다가,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타이밍에 귀를 막았다. ‘힘들다.’ 물론 지치긴 했다. 시몬은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퀭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고, 메리다는 무아몽중과 슬립을 남발한 대가로 잠이 싹 달아나 버린 모습이었다. “정신이 말똥말똥. 최악이야.” 그녀는 잠이 달아나서 생기 있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가장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였다. 자신의 몸 상태가 적응되지 않는지 제 어깨를 붙잡은 채 파르르 떨기도 했다. “왕녀님, 언제쯤 견학이 끝날까요?” 시몬이 나침판의 바늘을 보며 말했다. 테네리페는 후후 웃으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2층에 올라가야 끝난다니까!” “……그거 신경 쓰였는데요.” 메리다가 쓰윽 고개를 들었다. “유령궁의 방마다 완전히 별개의 차원이라고 느꼈는데, 왜 층으로 구분되어 있는 거죠?” ‘잠이 깬 메리다, 말 잘해.’ 이 와중에 살짝 감탄하는 시몬이었다. “휴 이켈 학생, 아주 좋은 질문!” 테네리페가 휙 손짓했다. “방들은 전부 제각각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같은 층계의 방은 공통된 성질이 공유되는 경우가 많아. 그리구 실제 존재하는 층처럼 1층에서는 2층으로 갈 수 있지만, 2층을 건너뛰어 3층으로 바로 갈 순 없어.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4층에서 바로 1층으로 갈 수 없지. 2층의 방과 3층의 방을 반드시 거쳐야 해.” 설명을 들은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네리페의 본체는 3층에 있다. 정확히 털갈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급 상황에는 그녀를 지키러 빠르게 3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유령궁의 돌파 속도를 높여야 했다. “그럼 다음 방으로 갈까?” 테네리페가 전면에 녹색빛이 일렁거리는 후추통을 가리켰다. 저 후추통이 이 방의 ‘오픈키’인 듯 보였다. 시몬과 메리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내 세 사람이 동시에 후추통을 손바닥으로 짚자, 육체가 빨려드는 감각과 함께 다음 장소로 넘어갔다. “……!” 시몬의 눈이 부릅떠졌다. 다음에 나타난 방은 심상치 않았다. 세 사람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온통 시뻘건 공간이었다. 어딘가의 욕실로 보이고 아래에는 욕조가 있었다. 욕조에는 피가 고인 듯 붉은 물이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 욕조에는 형성체가 기절한 듯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9번 욕실이네.” 테네리페가 침음을 흘렸다. “다들 기억나지? 이렇고 온통 붉은색을 띠는 방을 ‘빨간방’라고 불러. 유령궁의 망령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면 그 수가 한계치까지 불어나고 이렇게 위험지역으로 변질돼.” ‘여기가 그 빨간방이구나.’ 곳곳에 균열의 틈이 사방에 뒤덮여 있었다. 이내 그 균열이나 벽면에서 망령들이 하나둘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저게 다 망령이라니.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한 눈동자가 눈을 번뜩이고 있는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오싹한 기분을 느낀 시몬이 주먹을 꾹 쥐었다. “테네리페 님, 수업은 여기까지 하시죠. 여기선 제가 군단을 꺼내겠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가 빙긋 웃었다. “군단이라면 나도 있는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촤아아아아아아아! 벽면 한쪽에 눈부신 섬광과 함께 새로운 통로가 열리고, 그 안에서 램프가 휘리릭 튀어나왔다. 이내 수십, 수백 개의 램프가 쏟아져 나오더니 그것이 흔들리며 주둥이로부터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싸아아아아아아! 연기가 휘몰아치더니 시커먼 기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코끼리 괴물이 팔짱을 낀 채 망령들을 노려보았다. “소개할게.” 테네리페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 ‘마리드’라고 해.” 마리드가 두 팔을 벌리자 몸 안에서 무수한 4군단의 유령 언데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망령들과 장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화카카칵! 마리드가 팔을 휘두르자 ‘잿더미’가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뿜어져 나오며 망령들을 스피릿과 칠흑으로 되돌렸다. 압도적인 수와 위용. 순식간에 방이 정리되어 가며 붉은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몬은 입을 벌린 채 감탄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유령군단으로 이름 높은 4군단. 근래에 본 1군단도 그렇고, 역시 현역 군단들의 힘은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시몬에게도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크흐흐흐! 4군단은 여전하군!] 피어도 시몬의 옷에 달린 배지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랄 것까진 없다! 리처드가 다뤘던 전성기의 7군단은 더 대단했지!] ‘다른 군단을 볼 때마다 경쟁심을 불태우시네요. 피어.’ [당연하다!] 마리드와 4군단의 유령병사들이 ‘빨간방’ 하나를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유령궁은 궁에 소속된 여러 네크로맨서들이 돌아가며 관리하지만, 가장 위험한 곳은 테네리페나 4군단 에이션트 언데드들이 그쪽으로 가서 상대한다고 한다. 덕분에 유령궁의 방비는 빈틈이 없고, 대륙의 사람들은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되는 일 아닐까? 그 목소리를 떠올린 시몬은 다시금 감탄한 얼굴로 테네리페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메리다. 그녀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이 싹 달아난 상태라 그럴까, 늘 권태로워하던 그녀가 눈까지 빛내며 4군단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 오늘 탐험은 여기까지!” 점점 붉은색이 사라져 가는 욕실에서, 테네리페가 바닷속에서 헤엄치듯 발장구를 치며 위를 가리켰다. “뒤처리는 마리드에게 맡기고 우리는 올라갈까?” “네!” 이 방은 중력이 특이한지 허공에서 발장구를 치니까 정말로 몸이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은 허공을 헤엄쳐서 천장에 반대로 달려 있는 녹색빛의 수도관을 발견했다. 이게 이 방의 오픈키였다. 세 사람이 동시에 그것을 붙잡는 것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 * 욕실을 벗어나니, 오늘의 목적지였던 2층에 도착했다. 2층은 미로 형식의 복도가 펼쳐진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시몬과 메리다를 1층 메인홀로 돌려보내 줄 고스룩 복장의 네크로맨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세요!” 그가 로비로 돌아가는 나침반을 시몬에게 전해주었고, 시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침반을 건넸다. 테네리페의 힘이 담긴 나침반은 그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번갈아 사용해야 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건 어려웠지만, 2층에서 1층 로비로 향하는 건 방 두 개만 통과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내 시몬과 메리다, 테네리페가 다시 유령궁의 안전지대인 메인홀로 돌아왔다. 퍼엉! 펑! 세 사람이 메인홀에 도착하자마자, 곳곳에서 형형색색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주위로 몰려든 네크로맨서들이 시몬과 메리다를 향해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첫 유령궁 복귀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와아아아아아! 처음 유령궁에 와서 만난 뮬리아는 케이크를 가지고 걸어왔다. 시몬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테네리페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뭐예요?” “후훗! 유령궁에서는 처음으로 궁에 들어갔다가 무사귀환한 동료들을 이렇게 축하하는 게 관례야!”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두 사람은 케이크 앞에 섰다. “케이크 초 불어야지! 하나 둘!” 후욱! 두 사람이 동시에 초를 불고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케이크는 무조건 귀환한 사람이 다 먹어야 돌아갈 수 있다며 테네리페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배를 디저트로 꽉 채워야 했다. ‘입에서 설탕 냄새 나는 것 같아.’ 이 유령궁에는 제대로 된 음식이 없었다. 전부 테네리페가 좋아하는 디저트들뿐이다. 시몬이 꾸역꾸역 케이크를 한 조각씩 떠먹는 사이, 메리다는 엄청난 속도로 케이크를 먹어치웠다. 입에 크림을 묻히고 먹는 그녀를 보며 유령궁의 네크로맨서들이 웃으며 귀여워해 주었다. “왕녀님!” “왕녀님! 3층 초입에 문제가!” “왕녀님! 이쪽은 에이션트 언데드를 보내셔야…….” 이 와중에 테네리페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이 에워싸며 궁의 상황을 보고했고, 그녀는 척척 명령을 내려 인원을 배치했다. 역시 궁의 우두머리이자 군단장다운 모습이었다. “참!” 테네리페가 시몬과 메리다를 돌아보았다. “가장 중요한 걸 깜빡했다. 임시라도 우리 유령궁 식구가 되는 건데 복장을 갖춰야지?” “네?” 그녀가 짝짝 소리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이 이동형 옷걸이를 끌고 나타났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건 전부 고스룩의 새까만 복장이었다. ‘아, 우리도 이거 입어야 하는 거구나.’ 시몬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메리다는 관심이 있는지 고개를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휴 이켈 학생은 내가 직접 골라줄게! 여자애들 옷은 잘 알거든!” 테네리페는 신이 난 얼굴로 여러 옷들을 메리다의 몸에 대보더니 하나를 골라서 탈의실로 가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꺄아아아악!” 테네리페가 얼굴이 벌게진 채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뮬리아나 다른 직원들도 입을 크게 벌렸다. “…….” 반짝이는 조명 아래로, 리본과 프릴이 풍부하게 장식된 귀여운 고스룩 드레스를 입은 메리다가 앞으로 총총 걸어 나왔다. 본인의 나이에 비하면 살짝 연령대가 낮은 옷이었지만, 본래 자기 옷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이 복장이면 될까요?” 마침 시몬도 남자 탈의실에서 나왔다. 블랙 코트에 블랙 셔츠, 블랙 부츠까지. 새까만 고스룩으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시몬이 검은 넥타이를 붙잡고 가볍게 흔든 뒤, 검은 신사 모자를 썼다. 뮬리아가 ‘흡’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입을 가렸고, 테네리페는 좋아하다 못해 헛웃음을 흘렸다. “요즘 키젠 애들은 얼굴로 뽑나?” 그래도 이렇게 유니폼을 맞춰 입고 있으니 이제야 좀 이곳의 식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해!” 테네리페가 손을 뻗었다. 시몬이 그 손을 받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령궁의 임무 첫날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이 멀었다. ‘아직까지는 1군단과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시몬은 그런 생각을 한 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테네리페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 세르네에게 들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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