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94화 요즈음 2학년 마투학과생들 사이에서는 기숙사 옥상에 늑대인간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그 소문의 정체는 카쟌 에드발트였다. 그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조용히 건물 꼭대기에 올라와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리고 오늘 그 옆에는 시몬이 걸터앉아 있었다. 시몬이 와인잔을 들어 올리자, 카쟌 또한 호응하듯 기꺼이 와인잔을 맞부딪혔다. 시몬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옆을 보았다. 특유의 불량스럽게 쪼그려 앉은 자세로 달을 바라보는 빛바랜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 자체가 분위기를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시몬이 와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전에 중립지대 일로 힘써주셔서 감사해요, 카쟌.” “감사 인사는 됐다고 했을 텐데.” 카쟌이 쓱쓱 눈 밑에 난 흉터를 손끝으로 긁으며 말을 이었다. “너를 돕는 게 내 임무다.” 시몬은 그저 웃었다. 단순한 임무치고는 성의껏 해주는 것 같아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카쟌은 와인 옆에 치즈 한 조각을 포크로 떠서 입에 넣었다. 그는 입맛이 은근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안주도 최고급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는다. ‘저 무서운 얼굴로 와인에 최고급 치즈라니.’ “불만 있나.” 불쑥 던지는 카쟌의 말에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부, 불만은요! 하하!” “이번에 유령궁에 가게 됐다고 들었다.” “역시 카쟌은 뭐든 알고 있네요.” “우연히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답한 카쟌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와인잔을 빙빙 굴렸다. 눈 밑에 난 무서운 흉터와 날카로운 눈매, 그러나 고위 귀족처럼 와인잔을 흔드는 섬세한 동작은 묘한 밸런스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날 찾아온 이유는 유령궁에 대해 알고 싶어서겠지.” “카쟌 얼굴 보러 온 건데요?” “2년 동안 뻔뻔한 것만 늘었군.” 시몬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카쟌을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만, 시몬은 어쩐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워낙 함께 많은 임무를 수행하고 같이 사선을 넘었기에 동료로서의 편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유령궁이라.” 카쟌이 와인으로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암흑연합에서 그 중요성으로는 두말할 것 없는 핵심 장소다.” 최북부에서 쏟아지는 북신의 언데드들을 막아내며 영토를 유지하는 북부대공 진 아르스칼트가 인류의 영웅이라면, 유령궁에서 쏟아져 나오는 망령들을 막아내고 있는 유령왕녀 또한 진 아르스칼트 못지않은 전설적인 존재다. 암흑연합이 세워지기 전부터 유령왕녀들은 존재했다. 기사의 시대에서는 무당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유령궁에서 쏟아지는 타락한 망령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 네크로맨서들을 혐오하는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활동 허가를 받아낸 네크로맨서였다. 한때는 작은 왕국령 영토에 유령궁이 포함된 적이 있었는데, 이 왕국은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유령궁에 대한 모든 지원과 비용을 끊은 적도 있었다. <왕녀는 이상현상을 막는다는 핑계로 던전을 일부러 유지한 채 왕국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왕국의 무인들이 가면 그 던전은 소멸할 것이고 쓸데없는 재정적 부담에서 벗어날 것이다.> 자금 지원이 끊기자 당대의 유령왕녀는 화가 났는지 파업을 선언하듯 유령궁에서 휙 나가 버렸다. 그때 광범위한 왕국의 영토가 유령궁에서 쏟아지는 망령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대륙의 역사서에도 반드시 언급되는 ‘고스트 스트림’. 유령왕녀가 대륙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영토가 유린당하고 국민들은 망령들의 공세에 무참히 죽어갔다. 이 현상은 대륙 전체로 뻗어나갔고, 심지어 왕국의 수도까지 망령들이 들이닥쳤다. 당대 수많은 강자들이 유령궁으로 들어갔으나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거나 미쳐 버렸다고 한다. 결국 국왕이 자기 발로 유령왕녀를 찾아가 다시 궁으로 돌아가 달라며 애원했다고. 그렇게 왕녀가 궁으로 돌아가고, 초토화된 근방 영지는 비로소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놀라운 이야기네요.” “그래.” 카쟌이 흉터를 벅벅 긁었다. “털갈이 시즌은 바로 그 왕녀의 공백이 생기는 유일한 틈이다. 암흑연합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운 채 주시하고 있지. 키젠에서 믿을 만한 강자인 널 그곳에 파견 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카쟌이 칭찬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칭찬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실제로 네 내부 평가는 뛰어나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시몬은 빤히 카쟌을 바라보았다. 침묵을 지킨 채 와인을 마시던 카쟌은, 시몬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뭐지?” “이야기해 주실 건 그게 다예요?” “그렇게 의구심을 가지는 이유가 뭐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시몬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령왕녀 테네리페 님. 이번에 만나봤는데 조금 위화감이 들어서요. 아니, 괴리감이라고 해야 하나?” “…….” 이번엔 카쟌이 고개를 돌려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감더니 고개를 돌려 밤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역시 더 정보를 줘서는 안 되겠다.” “네?” “정보길드의 정보를 뭐라고 생각하나.” 카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람들의 소문, 이야기, 목격담, 여러 요소들이 뒤섞인 것들이다. 정보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유무형의 정보든 간에 사람의 인식과 편견, 사고가 들어가서 가공되고 왜곡된 것들이지.” “…….” “내가 여기서 어떤 소문을 나불댄다면, 너는 내 영향을 받아 본래의 안목을 발휘할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카쟌이 시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몬. 네 직감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네가 직접 현장인 유령궁으로 가서 네 판단으로 움직여라. 그게 최선이다.” 시몬은 살짝 감탄성을 흘렸다. “2년 넘게 봐왔지만 역시 카쟌은 생각이 깊네요.” “하하! 그러엄! 카쟌은 원래 그랬지!” 갑자기 불쑥 들린 제3자의 목소리에 시몬과 카쟌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옥상 바닥에 드러누운 채 ‘꺼억’ 하고 트름을 하는 동안의 남자가 보인다. 작년 학생회장 후보이지만 지금은 유급생으로 돌아온 전체 3위, ‘에이젤 브링어’였다. “에이젤 선배님, 괜찮으세요?” 시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에이젤과 카쟌은 요즘 유독 자주 붙어 다녔는데, 카쟌의 와인을 몇 모금 얻어 마시더니 저 꼴이 났다. 얼굴은 술기운으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았다. “그럼그럼! 난 멀쩡해 시몬. 헤헤!” 시몬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조심해 주세요. 학생회장이 음주 만취자를 방치했다는 소문이 돌면 큰일 나요.” “걱정 마 걱정 마! 그런 것부터 고민하다니 학생회장 다 됐는데!” 웃샤아! 에이젤이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체내에 칠흑을 활성화시킨 뒤,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취기를 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몬이 그를 보며 말했다. “329기 학생들 임무 수습하는 일, 힘드시죠?” “아핫! 아직까지는 할 만해!” 에이젤은 주로 대륙을 돌아다니며 키젠 3학년을 통제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키젠 3학년이 대륙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워낙 강력하기에, 네프티스는 일종의 통제책으로서 에이젤을 데리고 왔다. 그의 임무도 대부분 날뛰는 3학년들을 막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학생회장인 시몬이 해야 할 일인데, 에이젤이 거의 전담해서 다 해주는 바람에 시몬은 꽤 여유를 누리면서 자신의 사적인 일이나 임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번 유령궁 임무도 잘 다녀와! 혹시나 일이 꼬이면 유령궁에서 만날 수도 있겠네!” “그러네요.” “누구랑 같이 가? 워낙 중요한 일이니까 학교에서 한 명 정도는 더 붙여줄 것 같은데.” 시몬이 담백하게 답했다. “테네리페 경이 전체 2위의 메리다를 지목했어요. 판타서스 선배님 여동생 아시죠? 아마 같이 갈 것 같네요.” 움찔! 움찔! 그러자 에이젤과 카쟌이 동시에 어깨를 떨었다. “아, 아. 메리다 말이지…….” “하필이면 메리다인가.” 뭔가 심상치 않은 반응에 시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말야.” 에이젤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완전히 각성한 메리다는 힘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해졌다고 한다. 그 힘은 전성기 학생회장 시절 판타서스를 방불케 하지만,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주위에 피해를 주고 있다고. 에이젤도 말리러 갔다가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것 같았다. “내가 알기론 메리다 휴 이켈의 임무 기일이 지났다.” 카쟌이 말했다. “다음 유령궁 임무 이전까지 복귀하지 않는다면, 아마 시몬. 네가 직접 잡아와야 할 거다.” 카쟌의 그 예언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 * * -시몬 학생회장. 메리다를 데려오십시오. 뭔가 사건에 휘말린 것 같습니다. 시몬은 유령궁에 가기 전에, 파트너로 함께할 메리다를 데려오기로 했다. 현재 메리다가 임무로 파견된 곳은 결사의 은거지 중 하나로 예상되는 ‘프롤루와’라는 이름의 영지였다. 읽어본 임무 프로필에 따르면 상거래가 발달한 중소 규모의 평범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 마을 입구부터 난리가 나 있었다. 마을이 아니라 장난감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주위는 나무블록을 쌓은 장난감집이 솟아 있었고, 인형이 걸어다니고 풍선이 떠다녔다. 시몬은 저 흑마법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무아몽중.” 해당 범위를 그녀의 꿈의 세계로 바꾸는 판타서스 오리지널의 흑마법이었다. 꿈을 꾸는 이미지에 따라 그 영향이 다른데, 판타서스는 호수나 바다가 생기고 메리다는 장난감 세상이 열린다. 시몬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헤헤헤헤! -꺄르륵! 꺄르르륵!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모두가 잠들어 있었는데 행복한 꿈을 꾸는 듯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좋은 꿈을 꾸게 하는 판타서스류 슬립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꺼헉! 꺼허허헉!” 장난감 기차에 탑승한 채 끊임없이 레일을 빙빙 도는 험상궂은 남자들이 보인다. 반쯤 졸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내려줘’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시몬은 들고 온 서류를 보았다. 서류에 나와 있는 얼굴이었다. ‘아, 결사 협력자다.’ 결사 협력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꿈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끝없이 움직이는 장난감 바닥 위에서 헉헉대면서 뛰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 모양의 인형에게 붙잡혀 하늘에서 빙빙 도는 사람도 있었다. 시몬은 그들을 지나쳐 빠르게 갔고, 곧 마을의 중심인 광장에 도착했다. -흠냐 흠냐. 찾았다. 메리다 휴 이켈이 세상모르고 하늘에 둥둥 뜬 채 잠들어 있었다. 두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 입에 침을 머금고 자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꼬마였다. 시몬이 한숨을 푹 쉬었다. ‘판타서스 선배님이 말씀해 주신 잠 깨우기.’ 시몬은 메리다에게 직접 슬립을 여러 번 건 다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짜악! 힘차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둥실둥실 떠다니는 메리다가 휙 내려왔고, 주위의 장난감 형상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으, 응?” “깜빡 잠들었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멀쩡했지만 괴롭힘당하고 있던 결사의 협력자들은 너무 혹사당했는지 숨을 헐떡이며 뻗어 있었다. 기절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 메리다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졸음 가득한 동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깨웠지? 내 잠을 깨울 수 있는 건 같은 슬립 사용자…….” “메리다.” 메리다가 비로소 등 뒤를 돌아보았다. 시몬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다음 임무가 정해졌어. 나랑 일 하나 같이 할래?” 그녀가 몽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임무? 어디?” “유령궁이야.” 그 말에 졸음 가득하던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거기,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어.” 아무래도 저 메리다에게도, 유령왕녀의 전설은 로망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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