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91화 제4군단장 테네리페. 유령궁과 그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있는 군단장으로, 통칭 유령왕녀로 불린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배신의 군단장.” 정말로 테네리페가 있다. 시몬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제인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보다는 이르지만 이렇게 됐군요. 왕녀 테네리페 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테네리페 님? 이쪽은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입니다.” 그녀가 스피릿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드레스 자락을 잡아 인사했다. 시몬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다른 군단장을 찾아가서, 군단에 대한 심화 과정을 배우게 될 거란 이야기를 로레인에게 듣긴 했는데.’ “이번에 테네리페 님이 온 건 교육 때문이 아닙니다.” 시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제인이 손에 깍지를 끼고 말했다. “의뢰자로 온 거죠. 키젠 본부에서 허가한 공식 임무입니다.” “맞아 맞아! 내가 의뢰하는 거야.” 그녀가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히힛 웃었다. 마치 확성 수정구가 주변에 달린 것처럼, 그녀의 음성은 유난히 윙윙 울렸다. 시몬이 고개를 들어 테네리페를 바라보았다. “어떤 임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막 어려운 건 아냐.” 테네리페가 머리에 쓴 모자를 매만졌다. “유령궁에 털갈이 시즌이 와. 그동안 내 일을 대체할 사람을 찾아줬으면 해.” “……?” 틀림없는 대륙어인데 왜 알아들을 수 없는 건지 모르겠다. 시몬이 빤히 테네리페를 바라보자 이번엔 그녀가 오히려 ‘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폴렌티아 후배.” “죄송합니다. 사전에 언질을 주셨으면 공부해 왔을 텐데요.” 그녀가 꺄하하하핫! 웃었다. 분명히 목소리는 좋은데 웃음소리는 상당히 섬뜩했다. 생물의 본능이 자극되는 것처럼 바짝 긴장하게 된다. 몸의 솜털이 오소소 올라왔다. “그래, 그럼 가볍게 설명해 볼까?” 그녀가 다스리는 유령궁은 대륙 10대 미스테리 중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변방의 왕국 왕궁에 정체불명의 사건이 벌어졌고, 왕궁 내에 있던 사람 전원이 몰살당했다. 왕국은 몰락했고, 이제 그 궁 안에는 사악한 망령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기사들이 다스리는 제국과 네크로맨서들이 통치하는 암흑연합이 한 번씩 이 영지를 통치했지만 누구도 이 현상을 규명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다. 현재도 이상현상을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해’ 취급을 받고 있는 곳이다. 없애는 게 불가능하기에 누구든 유령궁에 들어가서 쏟아지는 사악한 유령들을 막아내야 했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게 바로 유령왕녀 테네리페와 4군단의 언데드들이었다. “궁에는 왕녀가 필요해.” 그녀가 단언하듯 말했다. “사악한 망령들이 궁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거든. 왕녀가 이상현상을 통제하고 쏟아지는 망령을 막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할지도 몰라. 단 몇 분이라도 왕녀가 궁에서 자리를 비우면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지.” “?” 시몬은 말없이 손을 세워서 테네리페를 가리켰다. 테네리페가 오호홋 웃었다. “난 궁에서 나온 게 아니야. 사실 이거 내 몸 아니다?” “네?” “내 진짜 몸은 유령궁 안에 있어. 단 1분도 쉬어선 안 되거든. 지금 이 몸은 특별한 호문쿨루스구, 내 영혼만 여기에 옮겨 온 거야! 우리 에체베리아 가문은 영혼을 담는 가문의 비기가 있거든! 신기하지? 무섭지? 다리 떨리지?”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놀랍긴 하지만, 그렇게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네요. 네크로맨서 세계에선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와, 진짜루? 이 이야기 꺼내고 이렇게 덤덤한 반응 처음 봐! 역시 그 유명한 배신의 군단장!” 시몬은 쓰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몬에겐 그리 신기한 현상은 아니었다. ‘우리 쪽 프린스랑 비슷하네 뭐.’ “테네리페 님.” 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제인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임무 브리핑은 본론만 짧게 부탁드립니다.” “제인 너무 차가워!” 테네리페가 툴툴거렸다.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로체스트의 신상 카페 데려가 달라는 내 제안두 거절하구!” “진 아르스칼트 교수님께 먼저 찾아가 보셨습니까?” “진도 나 무시해! 로크섬 온다고 몇 주 전부터 그렇게 편지를 보냈는데 바쁘다구 얼굴도 안 비치구!” “유감입니다. 제 퇴근은 늘 새벽에 끝나는데 그때까지 계셔준다면 함께 가드리죠.” “너무하네!” 테네리페가 깔깔깔 웃다가 시몬을 바라보았다. “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테네리페 님의 진짜 몸은 유령궁에 있고, 지금 와 있는 건 영혼을 담은 호문쿨루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력 좋네! 암튼 그래서 털갈이 시즌이 와. 그게 뭐냐면, 내 몸을 유령궁에서 빼내서 잠시 치료하구 밥도 먹구 휴식이랑 운동도 하구 그러는 거야. 그때 잠시나마 내 영혼도 본체에 박아두구. 그런 시간이 필요하거든. 결국 육체와 영혼은 한 쌍이니까.” 그녀가 어깨가 결리는 사람처럼 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하인들이 내 몸에 먹이는 밥이 잘못된 건지, 아무래도 몸에 병이 걸린 것 같아. 짧으면 1주, 길면 2주까지 유령궁에서 빠져나가 요양해야 해.” “납득했습니다. 그러면 그 시간 동안 유령궁에 왕녀가 없게 되고, 그 시간 동안 버텨줄 ‘왕녀 대타’가 필요한 거네요.” “꺄악! 너무 똑똑해! 후배 공부 잘하지? 분명 잘할 거야! 아! 학생회장이니까 당연히 공부 잘하겠구나! 제인! 학생 잘 키웠네!” “상황은 알겠습니다만.” 시몬이 자신을 가리켰다. “저 사령학만큼은 자신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스피릿도 잘 일으키지 못하고 사령학은 1학년 2학기부터 포기했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그런 중대한 임무를…….” “아니, 아니. 폴렌티아 후배에게 왕녀 일을 맡길 생각은 없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나와 동등한 현역 군단장이기도 하구, 왕녀라고 하기엔 좀……? 여러 조건에서 아웃.”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새로운 왕녀 대타를 찾는 거네요.” “맞아! 여기 키젠은 대륙 최고의 엘리트만 모인다며? 사실 나 자식이 없거든? 후계자도 없구. 만약 이번 대타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제4군단장의 후계자로 삼을지두? 사실 나 은퇴할 시기도 다 돼가구.” 시몬의 심장이 철렁했다. 다음 군단장이 달린 건. 이건 거대한 이슈였다. * * * “그래서.” 딕이 학생회실 소파에 드러누워 텅 빈 깃펜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우리 손으로 다음 유령왕녀 후보를 뽑으란 거네?” “그런 셈이야.” 오오오! 학생회실이 떠들썩해졌다. 메이린과 딕, 카미바레즈는 물론 용병왕 아서와 1학년의 치엘라까지 이곳에 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차세대 군단장이 키젠에서 셋이나 나온다니! 너무 놀라워요!” 카미바레즈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런데 아직 왕녀님이 반드시 후계자로 삼는다고 한 건 아니잖아?” 메이린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까지나 왕녀 일의 대타일 뿐이야. 우리가 명단을 올려서 진짜 후보로 뽑혀도 유령궁에서 실력을 증명해야겠지.” “그래도 혹하는 건 사실입니다.” 치엘라가 손을 턱에 얹으며 말을 받았다. “유령군단이라고 불리는 제4군단을 물려받는 일입니다. 당연히 유령궁과 근방의 도시도 가지게 될 거구요. 망령들로부터 대륙을 수호하는 명예로운 의무까지. 대륙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가 될 거예요.” 그때 아서가 손을 번쩍 들었다. “혹시 조건 같은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선배님!” “아, 조건이 몇 가지 있긴 했어.” 시몬의 그 말에 모두가 엉덩이를 반쯤 들며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시몬이 입을 열었다. “일단 남자는 안 돼.” 아- 후보에서 떨어져 나간 딕과 아서가 맥이 탁 빠지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딕이 입술을 우악스럽게 내민 채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런 조건은 불공평해! 차별이야!” “정말 한심합니다. 딕 선배님.” 치엘라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여성만 가능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유가 없다고 해도 이건 전적으로 왕녀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제인 교수님이 거신 건데-” 시몬이 빙긋 웃었다. “1학년은 안 돼.” “차별입니다!” 치엘라가 꽥 소리 지르자 주위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들었는지 그녀가 ‘큽’ 하고 무릎을 오므리며 고개를 숙였다. 시몬이 이유를 설명했다. “1학년은 대륙의 운명이 걸린 임무를 수행하기엔 너무 어려. 2주나 자리를 비우면 교내 생존에 치명적이기도 하고.” “당연한 소릴.” 딕이 유쾌하게 웃어댔다. “1학년은 애초에 전공도 없잖아? 기껏해야 무슨 무슨 학과 지망생인 애들이 어떻게 유령군단 일을 하겠냐고.” 치엘라가 발끈했다. “불쾌합니다! 올챙이 시절 기억 못 하는 개구리 같은 언사! 딕 선배님도 1학년이던 시절이 있지 않습니까!” “어어! 그랬등가? 나눙 기억 안 나눙데.” “후배 좀 그만 놀려.” 메이린이 딕의 등짝을 찰싹 후려갈기는 사이, 아서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그러면 그나마 학생회에서 가능한 건 메이린 선배님과 카미바레즈 선배님이시겠군요.” “나는 패스.” 메이린이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난 엄연히 상아탑주라는 목표가 있어. 유령궁엔 가지 않을 거야.” “저, 저도…….” 카미바레즈의 박쥐 날개가 축 늘어졌다. “……유령궁에 가겠다고 하면 아빠가 반대하실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시몬은 그녀의 아버지 디트리히 혼 우르슬라를 떠올렸다. 극단적인 중증의 팔불출인 디트리히는 언젠가 카미바레즈가 뱀파이어 일족을 이끌기를 원한다. 만약 카미바레즈가 몰래 유령궁에 간다고 해도, 뱀파이어를 이끌고 테네리페의 4군단과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카미바레즈를 빼 올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남자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은 스피릿을 느낄 수 있을 것. 1년 이상 사령학 수업을 들었을 것. 이 정도네. 우대 사항은 사령학과 전공생이고.” “진짜 대박이다.” “누가 될까?” 학생회 멤버들 모두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지금 말한 내용으로 전단지랑 소책자 같은 인쇄물을 만들어볼게.” 메이린이 수첩에 적은 내용들을 보며 말했다. “학과 게시판이랑 건물 곳곳에 붙여두면 될 거야.” “응, 잘 부탁해.” “그런데 시몬.” 메이린이 시몬을 바라보았다. “자격 조건 말고, 유령왕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뭐 없어? 유령왕녀가 되면 해야 하는 일, 못 하는 일, 업무 환경이나 제약 같은 거 말야.” “그 부분은…….” 시몬은 뭐라 말하려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후보생들을 죄다 불러 모으면 본인이 직접 설명하겠다고 하셨어.” “진짜? 왕녀님 지금 어디 계시는데?” * * * 학생도시 로체스트. “꺄아아아악! 너무 맛있어!” 아직 학생들이 학교에 있을 때, 대낮부터 유령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오늘 만들어진 디저트를 모조리 싹쓸이하고 있다는 여자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로체스트의 카페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은 혼이 나간 얼굴로 가게의 모든 디저트를 싹쓸이하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하는 또 하나의 군단장이 이마를 붙잡고 짜증을 냈다. “적당히 먹도록.” 바로 2군단장 진 아르스칼트였다. “대공도 먹을래?” “……사양하겠느니라.” 후우. 그녀가 긴 숨을 토해낸 뒤 손에 깍지를 꼈다. “그보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으면 한다만, 이제 와서 왕녀 후보를 뽑겠다는 이유가 뭐지?” “…….” 테네리페는 슬쩍 웃음으로 무마한 뒤, 디저트를 정신없이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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