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71화 부회장 메이린이 이끄는 회의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왜 같은 문제를 경고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메이린의 싱긋 웃는 물음에 2학년 학과대표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쩔쩔맸다. 그녀가 톡 하고 서류에 손끝을 올렸다. “로체스트에서 음주 사고가 2주 연속 발생했어. 자제력이 부족하면 마시지를 말든가. 파수꾼들에게 붙잡힌 학생의 출결을 확인하니까 술을 마신 당일 밤에 기숙사에 있었다고 되어 있네. 점호를 한 건 자기 모습을 빗댄 저주 인형이었고.” 그녀가 손에 깍지를 꼈다. “너희 과대들이 학생회의 경고를 다른 2학년들에게 충분히 전달했다고, 내가 믿어야 할까?” 싸아아아아아- 방 안의 온도가 한결 더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일으키는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로 온도가 내려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몰리 공주가 훌쩍하고 코를 삼키며 공주의 체통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고, 실눈의 루어스만은 입술을 달달 떨고 있었다. 메이린이 다음 서류를 넘겼다. “사령학과?” 그녀의 지시에 2학년 사령학과 대표인 몰리가 벌떡 일어났다. “넵! 2학년 사령학과 대표 몰리 드레스덴입니다!” “한 번만 더 학생이 혼령화로 벽을 넘어 이성의 방에 들어가는 일이 학생회에 보고되면-” 게슴츠레 떠진 메이린의 푸른 눈동자에서 섬뜩한 빛이 일렁였다. “사령학과는 1학년들처럼 기숙사를 남녀 따로 분리해서 운영하도록 할 거야. 물론 모든 비용은 사령학과에서 부담해야겠지.” “시정하겠습니다!” 상아탑 귀족이 공주를 갈구고 있는 상황. 오로지 이 세상에서 키젠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키젠이라도 신분의 벽은 지엄하니 상대가 왕족이라면 다들 눈치는 보지만, 메이린은 달랐다. 사실 두 사람은 실제로 친하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사령학과는 혼령화 대책 마련해서 보고하도록 해. 다음은-” 그녀가 서류를 넘기자, 안도하며 자리에 앉는 몰리를 제외한 모든 학과대표들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듯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푹 숙이기도 했다. ‘아니, 미친.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더 무섭네!’ 처음 학생회 회의에 참석한 버나 펠턴은 도저히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메이린의 언변에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었다. 더 무서운 건 전부 맞는 말이고 논리적인 지적인지라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다는 점. 죄송하다. 시정하겠다. 열심히 하겠다. 그 외에는 다른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만큼 학생회의 일 처리가 깔끔했다. “맹독학과 쪽 폐기장 건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저희 총학과대표님이 잠시 보류하라고…….” “클라라가? 내가 따로 말해둘 테니까 일단은 학생회의 지시대로 해둬.” 그렇게 일곱 학과 공평하게 영혼을 쏙 빼낸 메이린이 서류를 붙잡아 한데 모은 뒤 통통 테이블에 두들겼다. “지옥 같은 1학년 시기를 무사히 끝내서 들뜬 건 알겠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이제 시작일 뿐이야. 이럴 때일수록 사고 안 나도록 분위기 잘 잡도록 하고. 후배들이 아무리 예뻐 보여도 1학년 캠퍼스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네!!” 군기가 바짝 든 2학년 모두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새 처음 참여한 버나 펠턴도 이들과 똑같이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그래도 올해 2학년들은 외부 성과가 괜찮아.” 부회장이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성과를 낸 학생들은 제인 교수님께 장학 건의할게. 너희 기수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생활 쪽만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자. 알았지?” “네!!” 채찍 다음은 당근까지. 뒤끝이 사라지는 능숙한 마무리였다. 메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오늘 학과대표 회의는 이걸로 종료야.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깔끔했다. 탈탈 털렸던 기억밖에 없는데 여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존경을 담아 메이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남학생들은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다과 남은 거 가져갈 사람?” “저요!” 메이린이 분위기를 풀어주니 짐을 챙기는 학생들은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몰리는 메이린에게 친언니를 대하듯 살갑게 말을 걸었고, 루어스만은 1학년의 유일한 학생회 멤버인 치엘라에게 장난을 쳤다. “이봐, 1학년 꼬맹이! 하늘 같은 2학년 선배들이 혼나고 있는데 뒤에서 쿠키가 입에 들어가냐? 어?” “꿀맛이었습니다. 특히 루어스만 선배님이 털릴 때요.” “용병왕! 저녁에 한 게임 뛰러 올래?” “미안, 이 다음은 동아리 활동이야.” 버나 펠턴만이 어울리지 못한 채 주춤주춤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메이린과 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로체스트의 신상 찻집 이야기를 하며 꺄륵거리는 메이린의 모습은 확실히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학생의 면모도 있었다. ‘……공과 사는 구분한단 거구나. 사람이 참 근사하긴 하다.’ 학생회 멤버들도 이번 회의가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학과대표들과 함께 학생회실에서 나왔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버나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메이린의 빛나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버나 선배님.” 스윽. 그때 유일한 1학년 학생회 멤버, 치엘라가 옆으로 다가왔다. 버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을 받았다. “음? 어어, 그 유명한 특례 1번 꼬맹이 맞지?” “유명한 건 잘 모르겠지만 특례 1번은 맞습니다. 이거.” 그녀가 두 손으로 공손히 파일을 내밀었다. “부회장님께서 사샤 학과대표님께 전해주시랍니다. 소환학과 관련 인수인계 내용이요.” 버나가 그 서류를 붙잡고 몇 장 훑어보았다. 딱 봐도 정성이 들어간 훌륭한 정리였다. “그래, 내가 잘 전해줄게.” “감사합니다.” 서류를 챙긴 버나는 문득 사샤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앞으로 이곳에 정기적으로 들락거리면서 과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메이린 부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성적 부족으로 학과대표가 되지 못한 게 처음으로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건데요.” 치엘라가 마음을 꿰뚫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부회장 선배님을 눈독 들이면 마음만 다치실 겁니다.” “어, 엉?” 버나가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반문했지만, 치엘라는 휙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그냥 잊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도도도 앞서 걷던 치엘라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했는지 멈칫했다. 마치 못 볼 걸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아이 씨’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린 그녀가 옆으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쟤 어디 가냐?’ “메이린 선배님!” 계단을 내려오던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학생회관 건물 1층의 입구를 떡 하니 가로막은 한 남학생이 세상 결연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손에는 포장된 커다란 푸딩이 들려 있었다. 꺄아아아아! 몰리를 비롯한 여학생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빛의 속도로 메이린에게서 비켜주었다. 푸딩을 들고 오는 이 남학생은 아까 동아리 회의에 참가한 그 동아리 부장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덜덜덜 떨며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푸딩 데이는 조금 지났지만……! 그으! 원래 메이린 선배님께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아하.” 메이린이 땀을 삐질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손끝으로 기다란 하늘색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았다. 딱 봐도 관심 없어 하는 눈치. 그래도 예의는 차리려는 건지, 메이린이 다시 남학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음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내 직위상, 동아리 부장에게 물건을 받으면 뒷말이 나올 수 있거든.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명망 높은 키젠의 부회장다운 깔끔한 거절. 그러나 남학생은 당신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포장된 푸딩을 바닥에 내려놓고, 품에서 러브레터를 꺼냈다. 꺄아아아아악! 여학생들이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학교생활의 하이라이트 중 하이라이트. 가십의 정점. 한 달짜리 수다거리. 학교생활 내내 책만 보고 스켈레톤만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한창때 청춘인데 이런 사건이라도 있어야 학교 다닐 맛이 난다. 물론 당사자인 메이린은 난감한 상황에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메이린 선배님을 신입생 시절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부디 제 진심 어린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멘트 개 썩었네.’ 기둥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치엘라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메이린은 으흠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쉰 뒤 말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여지를 남기지 않고 이야기할게. 날 좋아해 주고 생각해 준 마음은 진심으로 고맙지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미안해.” 끝이다. 더없이 깔끔한 거절. 주위에 지켜보던 남학생들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온갖 환호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오늘 모임에서 어떤 타이밍에 모 동아리 부장이 부회장에게 까였다는 따끈따끈한 뉴스를 전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린이 그를 지나치며 걸어갔고, 아서와 치엘라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바로 그때. “왜……!” 남학생이 앞머리를 흔들며 버럭 소리 질렀다.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아……. 이제는 흥미롭게 지켜보던 여학생들도 오만상을 찌푸렸다. 고백할 권리가 있는가 하면 거절할 권리도 있다. 저기서 저렇게 나오는 건 구질구질하고 매너 없는 짓이다. “저 이렇게 마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뭐가 부족한 겁니까? 석차? 가문? 외모?” “자, 진정해.” 메이린은 어른스럽게 타이르려고 했지만, 인생 첫 고백에 실연당한 소년은 거의 정신적 기절 상태였다. “제가 연하라서 그런 겁니까? 든든하지 않아서? 아니면 달리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 혹시 제 소문이 신경 쓰였던 거라면……!” “이이이!” 그런데 여러 이유 중 하나에 운 좋게 하나 걸린 메이린의 얼굴이 일순 화아아악 달아올랐다. “멍충아!!” “?!” 남학생의 얼굴이 뻣뻣해졌다. 메이린이 성큼성큼 다가와 삿대질했다. “야 너 2학년! 아직 정신 못 차리지? 연애는 무슨 연애! 키젠 생활과 연애를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예, 예?” “그리고 아까 말하려다가 참았는데, 너희 동아리는 자금 사항 보고서도 제대로 안 썼지? 너희들 사실……!” 갑자기 메이린이 발동 걸린 듯 잔소리를 와다닥 쏟아내기 시작했다. 학생회인 아서와 치엘라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혼나네.’ ‘평범하게 혼나네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몰리는 다른 2학년 동기들을 수습해서 먼저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잔소리를 퍼부은 뒤에야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진 2학년 남학생이 푸딩을 들고 말없이 떠났다. 앞으로는 어딜 가서 고백의 고 자도 꺼내지 못하리라. 메이린은 성큼성큼 발에 힘주어 걸으며 칠흑역학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쪽팔려서 진짜! 으으!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평소 화낼 때의 부끄러운 모습을 후배들 앞에서 보이고 말았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부회장 선배님.” 쓰윽. 어느샌가 치엘라가 그녀를 따라잡아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런 쓰레기는 제가 먼저 눈치채고 쳐냈어야 했는데.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메이린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쉬었다. 잠시 두 사람이 말없이 걷던 중, 치엘라가 불쑥 말했다. “고백을 거절한 이유 말입니다.” “?”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메이린의 얼굴이 아까처럼 다시 화아악 달아올랐다. “무, 무무무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거든?” ‘오.’ 얼음여왕이 공략되고 있다. 아니, 자멸하고 있다. 치엘라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대상은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님이겠고.” “그런 거……!!” 메이린이 세상에 처음 나온 귀족 영애처럼 얼굴을 붉힌 채 엄지를 입으로 살짝 깨물었다. “아니라니까아…….” ‘오오.’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메이린의 표정이었다. 치엘라가 실실 웃고 있자 퍼뜩 정신을 차린 메이린이 발끈하며 말했다. “어이없어! 애초에 누가 그딴 소문을 퍼뜨리는 건데?” “1학년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뭐어?” “그야 그렇잖습니까.” 치엘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두 검지를 들어 올렸다. “모든 학생들의 정점, 명예로운 키젠의 학생회에는 남자 학생회장과 여자 부회장이 있습니다. 남자 학생회장과 여자 부회장이요.” “두 번 강조 안 해도 알아듣거든!” 메이린이 빽 소리를 질렀다. “회장과 부회장이 사귀는 건 학교생활의 로망이자 보편적 룰이죠. 1학년들은 아무래도 범접할 수 없는 분들이다 보니 그런 소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입니다.” “자기들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네! 그냥 망상이고 선입견이야!” 메이린이 팔짱을 낀 채 툴툴댔다. 치엘라가 슬쩍 한마디 했다. “선입견이라고 해도,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 뭐?” “솔직히 학생회장 선배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메이린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우움-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이, 일곱 번째 군단장이잖아? 학교도 몇 번 구해냈고 내 목숨도…… 암튼 대단하고 멋진 분…… 아, 아니. 대단한 내 친구지! 늘 고맙고 존경하지만 막 그렇다고 내 감정을 우선하는 건 아까 그 2학년 남자애랑 다를 바 없다고 할까……!” ‘평소 최애라고 밝힌 배신의 군단장과, 친구인 시몬 폴렌티아 선배 간에 아직도 혼동이 있네.’ 빠르게 증상을 파악한 치엘라가 흠흠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메이린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이게 뭔데?” “로체스트 내 카페 음료 이용권입니다. 한 잔을 시키면 한 잔 무료예요.” 메이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이런 걸로…….” “가벼운 거니까 오히려 더 가벼운 마음으로 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샥. 치엘라가 앞서 걸어갔다. “밑져야 본전이죠.” 그리고 같은 시각. 학생회실. “다들 갔네.” 늦은 보충수업을 끝마친 시몬이 학생회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이내 기지개를 쭈욱 켜고 있는데. “응?” 테이블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카페 음료 이용권이었다. “누가 준 거지?” 시몬이 그것을 들어 올리니, 뒤에 쪽지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치엘라가 남긴 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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