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60화 키젠 학생들은 무사히 로크섬에 도착했다. 비공정을 타고 중립지대에서 암흑연합으로 들어온 뒤, 비공정 선착장에 설치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로크섬으로 넘어온 것이다. 다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듯 힘겨운 한숨을 토해냈다. 이후 기숙사에 돌아가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시몬도 마찬가지, 거의 하루는 통으로 내리 잠만 잔 것 같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고, 아론의 소집에 전공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먼 곳까지 가서 임무를 수행하느라 수고했지만, 갈 길이 바쁘다.” 소환학과 강의실. 아론이 분필을 잡으며 강의의 시작을 알렸다. “초승섬에서 베히모스 전함의 기본적인 형태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지금부터는 베히모스의 용도와 네크로맨서의 성향에 따라 소환 마법진의 구성과 내장하는 요소들이 달라진다. 너희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커스텀해서 베히모스를 만들어 나가야 할 거다.” 학생들이 열의 넘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의 베히모스 전함 만들기. 가장 기다렸던 단계였다.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최고의 전함을 만들어 오도록. 그리고 당연히 베히모스 전함이 완성된 뒤에 평가도 진행할 예정이다.” ‘시작이구나.’ 평가라는 말에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휘릭. 아론이 분필을 고쳐 쥔 뒤, 칠판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향해 찍었다. “물론 평가라고 해서 1, 2학년 시절처럼 교내 수행평가 정도로 생각하지 말도록. 우리는 펜타모니엄의 언데드 퍼레이드에 참여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언데드 퍼레이드는 학자들의 도시 ‘펜타모니엄’에서 4년에 한 번 주최하는 행사로서, 대륙의 수많은 네크로맨서들이 자신이 개발한 오리지널 언데드들을 소개하고 평가받는 자리다. 퍼레이드의 참가 자격 조건부터 엄격한데, 엄선되고 실적 있는 네크로맨서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펜타모니엄의 심사 위원들은 다양한 평가 방식으로 점수를 매겨서 가장 뛰어난 언데드에 상을 내린다. “우리는 키젠 3학년 자격으로 언데드 퍼레이드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미 본부에서 너희들 전원의 이름으로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빠르네.” “진짜 가나 봐!” 옆자리의 두 여학생이 숨죽인 목소리로 말하곤 손바닥을 마주 잡으며 좋아했다. “이번 평가의 최소 조건은 하나.” 잠시 조용해진 주위를 둘러본 아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원의 ‘입상’이다.”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 피츠제럴드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고, 기네비어가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이 보였다. 잘 모르는 학생들은 ‘뭐야?’, ‘어려운 거야?’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거리기도 했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다. 너희들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같은 학생이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현역 네크로맨서들이다. 거기에 펜타모니엄 심사 위원들의 눈높이야 악명 높으니 잘 알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쟁에서 이겨 성과를 내라. 심사 위원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자신이 없다면 퍼레이드에서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인기라도 모아라. 어떤 자리에서도 입상하지 못하는 학생은.” 아론이 가볍게 눈을 감았다. “베히모스 제작 과정 전체에 ‘과락’ 평가를 내리겠다.” 아- 곳곳에서 힘겨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키젠의 평가 기준은 높고 냉정했다. 아론이 교탁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펜타모니엄의 언데드 퍼레이드는 2주 뒤, 그 전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베히모스 전함을 개발해라. 교내의 시설을 사용하지 않고 외부 엔지니어와 협업하는 학생의 경우 언제든 내 연구실에 연결된 수정구를 지급할 테니 상담하도록. 거리가 가깝다면 내가 직접 가겠다. 이상.”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학생들을 가만히 보다가 불쑥 말했다. “이러고 있을 여유가 있나?” 드르륵! 드르르르륵!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학생들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걸상을 정리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곧바로 통신 수정구를 들고 어디론가 연락하는 사람,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 영감을 받았는지 바로 노트를 꺼내고 마법진을 스케치하는 사람까지. 시몬도 바로 손에 통신 수정구 하나를 들고 달리고 있었다. “딕! 바로 랭거스틴으로 넘어갈 건데 괜찮을까?” -어, 지금 바로? 학교에서 더 안 쉬고 바로 갈 거야? “그렇게 됐어! 급한 부분만 처리하고 돌아올게!” 그러자 딕이 벤야에게 연락해 두겠다고 했다. 시몬은 숨을 내쉬며 눈을 반짝였다. ‘좋아, 제대로 만들어보자.’ * * * 드레스덴 왕국의 수도. 랭거스틴. 굽이굽이 복잡한 도로 너머로 건물들이 골목마다 숨 쉴 틈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 사이로 지나다니고 있는 무수한 인파들이 보인다. 로크섬 옆에 있는 대도시라 키젠 학생이라면 교과서 구매 등 방문할 일이 많은 곳이지만, 올 때마다 감상이 새롭게 느껴졌다. 시몬은 랭거스틴의 거리에서 시계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음,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자고 연락했나?’ 살짝 걱정이 들기는 했다. 로크섬에 복귀하고 조금 여유를 가진 뒤에 천천히 일정을 조율하려고 했는데, 언데드 퍼레이드가 곧 시작되니 초조한 마음에 당장 만나자고 해버렸다. 벤야도 키젠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이제는 바닐라 그룹의 사실상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한창 바쁠 시기에 학생이 과제를 도와달라고 그룹 회장을 부른 격이었다. 시몬이 팔짱을 끼고, 초조한 듯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반복하고 있는 가운데. 달그락! 달그락! 마차 도로를 달리던 호화스러운 붉은색 마차가 시몬의 앞에 멈춰 섰다. 마차를 모는 커다란 말들이 투레질했다. 갑자기 눈앞의 시야를 가린 마차에 시몬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거기 잘생긴 청년.” 사락. 창문이 열리고 커튼이 젖혀지며 크림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눈웃음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같이 탈래?” 막상 얼굴을 보니 초조함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시몬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환하게 펴졌다. “벤야 선배님!” 이내 마부가 헐레벌떡 뛰어와 문을 열어주고, 시몬은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크고 호화로운 마차의 내부에 시몬은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참았다. 안에 찻잔과 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작은 저택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평소와는 달리 말끔한 정장에 코트를 두르고 있는 벤야의 모습. 그동안 여학생 교복을 입은 재기발랄한 모습만 봐왔는데, 이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사회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머리도 학생 시절보다 더 길렀고, 서류를 훑어보는 체리색 눈동자는 무게감마저 느껴졌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고, 그녀가 마침내 서류 하나에 서명을 마친 뒤 시몬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미안, 잠깐 일 마무리하느라. 정말 오랜만이야! 제군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아, 아니. 대표님……?” 푸핫! 벤야가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한쪽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냥 평소처럼 선배라고 불러줄래? 나는 그게 더 정감 가고 좋아.” 다행히 그녀가 웃을 때는 시몬이 평소 알던 그 벤야 바닐라의 모습이 나왔다. 시몬도 조금은 뻣뻣해진 허리를 편안히 하고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이내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3학년 커리큘럼에 대해, 배신의 군단장에 대해, 그리고 벤야의 사업에 대해. 근황을 들어보니 벤야는 이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언데드용품을 제작 납품하는 바닐라 그룹의 공동 대표이자 최고 언데드 엔지니어가 되었다고 한다. 사업을 적극적으로 확장해서 다소 외지라고 해도 언데드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게를 열고 전속 네크로맨서를 파견하고 있다고.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언데드로 세계정복’이라는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은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제군아.”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도심지를 지나 바다가 보이는 항구 근처로 향하는 가운데, 드디어 벤야가 본격적인 화제를 꺼냈다. “이번에 소환학과는 언데드 베히모스 전함을 만들고 있다고 했지?” “네.” “역시 아론 교수님이네! 늘 우리 상상을 뛰어넘으신다니까.” 시몬이 손에 깍지를 꼈다. “2주 뒤에 펜타모니엄에서 열리는 언데드 퍼레이드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베히모스 전함을 만들 수 있을까요?” “2주? 그야 물론이지! 우리 바닐라에 맡겨줘!” 벤야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펜타모니엄에 참여하는 거라면 자연히 우리 그룹 홍보도 되겠네? 한층 더 동기부여가 되는걸?” “아하하. 그러네요.” 그녀가 등을 소파에 기대며 살짝 긴장한 숨을 내뱉었다. “실은 현역 군단장인 네가 이제는 날 불러줄 일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먼저 연락해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저야말로 바쁜 그룹 대표님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걱정 많이 했어요.” “호호! 둘 다 비슷한 고민을 한 셈이네?” 두 사람이 마차 내에서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장소는 바닐라 그룹에서 사용하는 항구 앞 대형 작업장. 여러 엔지니어들의 인사를 받으며 걷던 시몬과 벤야는 가장 끝에 위치한 작업장에 들어왔다. “우리 바닐라 가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업장이야.” 그녀가 벽에 붙어 있던 스위치에 손을 놀리며 말했다. “조명 켤게!” 절컹! 절컹! 절컹! 천장에 붙어 있는 마력 조명이 모두 작동하며 주위가 환하게 밝혀졌다. 그 넓은 규모와 크기에 시몬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바로 여기서 네 베히모스 전함을 작업할 거야.” 그녀가 손뼉을 짝 쳤다. “전에 통화로 간략하게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성능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건 맞지?” “물론입니다.” 시몬이 씩 웃으며 품에서 서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우선 이걸 봐주세요. 아론 교수님의 새 논문이에요.” “새 논문? 아론 교수님이 최근에 논문을 내셨던가?” “펜타모니엄엔 아직 등록하지 않은 거예요.” 그녀가 팔랑팔랑 논문을 훑어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환형 언데드와 군단형 언데드의 결합, 소환 마법진과 언데드 코어를 동시에 유지? 이게 가능해?” “네, 진 아르스칼트 교수님이 도와주셨는데 제대로 되는 걸 제 눈으로 확인했어요.” “역시 대단하시네. 그럼 이 기술을 적용해서 뭘 하려고?” “평소에는 군단형 언데드 코어로 전함을 자체적으로 유지, 전함을 부르는 데 모든 번거로운 소환 과정을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함에 신호를 보내는 순간 소환형으로 전환.” 시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 강화된 ‘친위대’ 효과를 전함 내에 발생시킨 채, 소형 개체에 친위대를 입혀 방출하는 시스템으로 갈 거예요.” “와…….” 그녀가 탄성을 흘렸다. “가능할까?” “해봐야죠!” 시몬이 손뼉을 쳤다. “그래서 일단 첫 시작과 기획이 중요하니까 여러 도움을 요청했어요.” 우웅! 이내 시몬의 아공간이 열리고 망토를 두른 살덩이가 휙 뛰어나왔다. [에이션트 언데드 알라제. 군단 전함의 구조 구축을 담당.] 그리고 저벅 저벅 발소리와 함께 옆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날 바로 나를 부르는 학생이 있을 줄은 몰랐다만.” 3학년 소환학 담당교수, 아론 본인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깜짝 놀란 벤야가 얼른 공손히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아론 교수님!” “오랜만이군, 벤야 바닐라.” “네, 이렇게 넷이서.” 시몬이 손뼉을 쳤다. “지금 바로, 최고의 언데드 전함을 설계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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