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53화 신성연방 측 임시 천막. “…….” 아크 팔라딘 잘콘은 심기가 불편했다. 중립지대 측에서 ‘와서 싸우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부탁하기에 와봤건만, 막상 오니 이야기가 달랐다. 온갖 상황이나 정치적 이슈들이 자신의 성전을 방해하고 있었다. “최근에 갱신됐다는 연방과 연합 간의 중립지대 조약.” 잘콘이 얼음이 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잘콘.”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잘콘의 참모가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는 잘콘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하며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한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했잖아. 하늘섬에서의 일로 이스라필 님과 온건파의 입김이 강해졌어.” “여신의 검이 행하는 일은 하늘의 정치와는 무관합니다.” “봉록으로 먹고살면서 정치와 무관한 사람은 없어, 잘콘.” 참모가 냉정히 대꾸하며 옆으로 걸어갔다. “복잡한 이야기는 싫어할 테니까 본론만 말할게. 결국 이번 일의 핵심이 뭔지 알아? 누가 ‘먼저’ 이 협약을 깼느냐야. 우리뿐만 아니라 네크로맨서들도 부담을 느끼고 있지.” 그가 몸을 빙글 돌려 잘콘을 응시했다. “싸우고 싶다면 저쪽에서 먼저 덤비게 만들어야 해. 우리가 싸움을 걸어서 협약을 깨뜨리는 순간 모든 게 엉망이 될 거야. 하늘에 있는 대주교와 성녀들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 있어?” 잘콘이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괴었고, 참모가 계속 말했다. “그나마 10시간 조건을 걸어둔 건, 네 나쁜 머리치고는 상당히 잘 판단했다고 본다. 이 도시의 여론도 우리 편이 아니야. 우리도 적당히 체면을 세우는 선에서 물러나는 게…….” “그 10시간 말입니다, 형님.” 잘콘이 손끝으로 앞머리를 매만지며 삐딱하게 웃었다. “놈들을 방심시켰다가 조금 뒤에 치려고 말한 겁니다.” “잘콘!” 참모가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잘콘은 이미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우리 성당기사 제10부대는 두 시간 뒤 놈들을 기습하겠습니다. 협정을 깨뜨린 죄 같은 거야 뭐, 암흑연합의 군단장 둘을 죽이는 공적을 세우면 상쇄되겠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언제까지 애처럼 굴 셈이냐!” “아직 새 군단장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심지어 베히모스를 상대하느라 힘이 빠져 있습니다. 여신께서 내리신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보내자고요? 특히 7군단장은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아요.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다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우리가 다 덮어쓸 수 있으니 하는 말 아니냐!” 잔소리를 퍼붓던 참모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밖의 병사나 팔라딘들이 뭐라 뭐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실례합니다.” 사락- 그리고 난데없이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온 흰머리의 한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라우스,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명망 높은 아크 팔라딘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사제님! 멋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밖에 있던 팔라딘들이 뒤따라 들어와 낯선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개등(開燈)> 화아아아아아아아악! 남자의 몸에서 방대한 양의 신성이 흘러나오더니, 웅장한 고리의 형상을 그려냈다. 그것은 천막을 둘러싼 싸구려 천을 찢어버리며 커다랗게 퍼져 나갔다. 천막이 찢어진 틈으로 쏟아진 햇빛이 남자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마치 신이 그의 행적을 축복하는 것처럼. 팔라딘들은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어떤 자들은 넋을 놓고 지켜보기도 했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이질이 느껴지지 않는, 극도로 순수하면서도 맑은 신성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신성연방에서 신성이란 믿음의 척도. 그의 개등을 직접 본 이상, 아크팔라딘인 잘콘이라도 이 남자를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콘도 흥미가 생겼다. “앉으시오.”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갑자기 천막에 난입한 낯선 프리스트의 정체는 당연히 시몬이었다. 주위에는 참모와 팔라딘들이 서 있었고, 그 중간에는 잘콘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다. 시몬은 눈을 굴려 아크 팔라딘, 잘콘을 관찰했다. ‘……피부가 저릿저릿하네.’ 옷 너머로 보이는 인간을 초월한 듯한 다리 근육,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따라오는 시선, 내뱉는 숨결에 가득한 정제된 신성까지. 가히 전투의 화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역 아크 팔라딘, 과연 얼마나 강할까?’ 시몬은 살짝 피가 끓는 걸 느꼈지만 지금은 전투가 아니라 외교를 해야 할 때다. 시몬이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한 프리스트가 돌컵에 든 냉차를 가지고 왔다. 잘콘이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드시지요.” 시몬은 감사의 의미로 빙긋 웃고는 찻잔을 들었다. 이내 찻잔을 입술에 채 붙이기도 전에, 잘콘이 씩 웃으며 운을 뗐다. “성전(聖戰)은 어떻게, 좀 경험이 있으신가?” 정체도 소속도 묻지 않고 불쑥 던져진 잘콘의 질문. 시몬이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렸고, 잘콘이 자세를 바꿔서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후후 웃었다. “우리는 곧 여신을 위한 위대한 전쟁을 치르게 될 거요. 형제가 보여준 신성을 보아하니 필시 여신의 총애를 받는 듯하더군. 우리 함께 손을 잡고 네크로맨서 놈들을 처단하는 게 어떻겠소?” ‘다짜고짜?’ 뒤쪽에서 잘콘의 참모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착 하고 제 이마를 덮는 모습이 보였다. 제 주군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양. 딱 봐도 잘콘은 말을 들어먹을 인물은 아니다. 비틀어진 호승심은 물론, 자신의 흥미 외에 다른 것들은 고려 대상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대에게는 이런저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가 의미가 없다. 꽈득! 시몬은 천천히 손에 쥔 돌잔에 힘을 주었다. 주먹의 혈관이 순식간에 불거지더니. 쩡! 돌잔이 산산조각 나 내용물이 쏟아졌다. 주위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이런, 실례.” 아까 보인 신실한 미소가 사라지고, 본색을 드러내듯 입꼬리를 올린 시몬이 잘콘처럼 편히 앉으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시니 살짝 짜증이 나서요.” 잘콘이 ‘이놈 뭐야’ 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참모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몬은 계속 말했다. “이단과 네크로맨서들의 처단은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한 건 결사에 대한 공세입니다. 여력과 신앙을 하나로 모아야 할 지금, 성당기사 제10부대의 단독 행동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몬이 천천히 손에 깍지를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신해를 다스리는 이스라필 성녀님께서, 중립지대에 아무런 대비를 해두지 않으실 리 없지 않습니까.” 천막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잘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스라필 성녀님께서 형제를 보냈단 소리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요.” 잠시 멍해 있던 잘콘의 참모가 얼른 말했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시오! 그쪽이 이스라필 성녀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증거 말입니다!” 시몬은 애써 태연히 품속으로 손을 가져간 뒤, 이스라필의 친필 서명이 써 있는 수첩을 내밀었다. 두근- 서명에 일렁이는 신성을 본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단 이 수첩과 서명은 진짜다. 레테를 도우러 하늘섬에 방문했을 때, 이스라필이 신성열차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제시하라고 준 친필 서명. 하지만 이건 결코 시몬이 그녀의 요원이라는 사실 자체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두근- 하지만 아까 보여준 개등과, 이번 이스라필의 서명까지. 신성연방에서 이 정도면 어딜 가든 대접받기에는 차고 넘친다. 시몬의 시선이 잘콘에게로 향했다. ‘제발 속아라.’ 잘콘은 자리에 앉아 가만히 수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테이블에 놓인 주사위 더미를 집더니. 휘익. 난데없이 주사위를 공중으로 던졌다. 공중에서 몇 차례 회전하던 주사위를 이내 주먹으로 움켜쥐고는 눈으로 확인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시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 이내 그가 김빠진 웃음을 흘리며 주사위를 테이블에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못 믿겠는데.” “……!” 시몬의 뒷목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이곳의 새 영주, 베스티올라의 연락을 받고 온 건 두 시간 전이야. 이 정보를 캐치하고 이스라필 성녀님이 보낸 인물이 지금 이곳에 도착하는 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해.” 시몬이 빙긋 웃었다. “신해의 성녀님이 가진 정보력을 무시하시는군요. 저는 사태 발생 이전부터 중립지대에 주둔하고 있있고,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 이제는 ‘형제’라고 부르지도 않는 잘콘이 고개를 쭉 빼 밀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프리스트라고 하기에는 뭔가 묘해. 행동이 신앙이 아니라 이윤과 합리에 기초되어 있잖아. 우리 같은 현장직은 그렇다 치고, 성녀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런 경우는 흔치 않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예리해졌다. 뭐지 대체? 아까 주사위를 굴리는 것에 뭐라도 있는 건가? 단순한 돌발 행동이 아닌가? “이봐, 바리토.” 잘콘이 고개를 돌려 한 팔라딘을 바라보았다. “너 몇 년간 이스라필 성녀님의 팔라딘 부대 소속이었다고 했지?” “예. 6년 정도 일했습니다.” “이 자식 얼굴,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 잘콘의 말에 팔라딘이 앞으로 걸어 나와 시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몬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애써 은은하게 미소 짓는 표정을 유지했다. “없습니다.” 시몬은 심장이 철렁했고, 잘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주위를 둘러싼 팔라딘들이 하나둘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다. 시몬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말했다. “저는 이스라필 님 아래에서 일하는 비밀 수사관입니다. 얼굴을 드러낼 이유가 없지요.” “비밀 수사관? 갈수록 혓바닥이 길어져, 너. 애초에 네가 제시한 물건도 명령서가 아니라 이스라필 성녀님의 서명이잖아? 그냥 서명 하나 믿고 덤벼드는 날파리로 보이는데.” 잘콘이 손짓하자, 스릉! 하고 시몬의 목덜미로 팔라딘들의 두 검이 교차했다. “일단 좀 수상하니 감옥에 갇혀 있어봐. 나중에 일이 끝나고 그 신분이 사실이라고 밝혀지면 사과하지.” 망했다. 팔라딘들이 양옆으로 다가와 시몬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시몬은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딱 잘콘의 옆에 있는 참모와 눈을 마주쳤다. 참모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 잠깐만 잘콘! 이 사람의 ‘개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봤잖아! 진짜 이스라필 님의 비밀 요원이라면 어쩔 생각이냐!” 시몬은 마음속으로 열심히 빌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힘내시라고. “성녀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명령까지 어겨? 우리는 끝장이야! 아무리 아크 팔라딘이라도 용서가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 잘콘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어차피 암흑연합의 군단장 둘을 잡으면 사소한 잘못 정도는 해소되지 않겠습니까. 정 안 되면 다나 성녀님 쪽에 가서 살려달라고 해보지 뭐.” “잘콘! 너 사실 싸우고 싶으니까 일단 감옥에 처넣으려고 했지?” 역시 이쪽의 상식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예리할 정도로 감이 좋아진 잘콘의 판단에 당황했지만, 다행히 이곳에도 한 명쯤 상식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시몬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 시몬의 얼굴을 확인했던 팔라딘이 손을 들고 발언했다. “두 분의 생각이 다르시다면, 이스라필 님 측에 연락해서 이 사람이 정말 그쪽 식구인지 확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쪽과 통신이 가능한 수정구가 있습니다.” 그 말에 참모가 얼른 동의했다. 잘콘은 반대했지만, 아직 출전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참모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며 그를 설득했다. 결국 잘콘이 시몬을 보며 말했다. “5분 준다.” 다행히 갇히는 건 면했지만, 시몬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팔라딘은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시몬이 슬쩍 그 팔라딘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위대한 여신님의 이름 아래에 제 신분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업무의 특성상 이스라필 님이 아닌 다른 분이라면 저를 몰라볼 수도…….” “예, 안 그래도 이스라필 님께 직접 여쭤볼 겁니다.” 잠시 후 수정구에 성공적으로 통신이 연결되었다. -누구시라구요? 시몬이 통신 수정구를 붙잡고 말했다. “아, 저는 이스라필 님의 수사관입니다. 긴급한 사항이 있어 이스라필 님께 직접 보고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실지…….” -아, 죄송하지만 이스라필 님은 지금 안 계셔서 다음에…… 아, 네? 네넵! 알겠습니다! 갑자기 통신을 받던 목소리에 기합이 팍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목소리가 바뀌었다. -네, 무슨 일임까.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청아한 목소리와, 그와 대비되는 시큰둥한 톤. 그리고 익숙한 말투까지. 시몬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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