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52화 이상한 양상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한 무리의 군대가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휘날리는 깃발과 신성을 일으키는 백색 갑주를 입은 병사들. 그들의 정체는 다시 볼 것도 없이 명확했다. ‘신성연방의 팔라딘!’ 지칠 대로 지쳐 있는 키젠 학생들의 눈에 절망감이 아른거렸다. ‘베히모스에 이어서 팔라딘까지 상대하라고?’ ‘망했네.’ 반면 앞에 서 있는 사무관 베스티올라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렇게 중립지대의 인물이 암흑연합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그의 모략임이 틀림없었다.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중립지대니까 이런 상황도 예상했어야 했는데, 내 실책이다.” 팔라딘들 모두 느껴지는 기운이나 입고 있는 화려한 갑주를 보면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지방에 근무하는 수준의 팔라딘은 아니다. 펄럭! 그때 팔라딘들이 검례를 취하며 좌우로 물러났다. 그 어떤 팔라딘보다 화려하고 두꺼운 갑주를 걸친 남자가 다가왔다. 긴 금발을 뒤로 묶은 미형의 남자. 눈 밑에 크고 검은 점이 나 있고, 입가에 서글서글한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으스스했다. 거기에 등 뒤에 있는 창과 파란색 망토. 뒤에 거느리고 있는 기수들이 교차한 팔라딘의 깃발까지. 이 모든 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아크 팔라딘.’ 현역 까마귀 요원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는 신성연방의 아크 팔라딘 중 한 명이 직접 이리로 왔다. 학생들의 낮빛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들으시오, 키젠의 네크로맨서들.” 아크 팔라딘이 입을 열었다. “나 잘콘 스라팔카와 에프넬 직속 성당기사 제10부대는 ‘현’ 오르자바 영주의 요청을 받아, 중립지대의 협약을 무시하고 군사 활동을 벌이는 그대들의 행동을 제지하러 왔소.” 처억! 그가 창을 세워 들었다. “지금 당장 이 영지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연방과 연합이 맺은 중립지대 협약에 의거하여 무력 행동에 들어가겠소.” “!!” 학생들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저 광신도 새끼들이 미쳤나.” “베히모스가 왔을 때는 숨어 있다가, 이제 와서 뒤통수나 치는 주제에 뭐?” 신성연방. 그것도 에프넬 소속이라고 밝힌 이상 이건 국제적 문제다. 키젠은 에프넬에게 어떤 경우에서도 꼬리를 말고 물러나서는 안 된다. 늘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실제로도 이 자리의 모두가 도망칠 바에는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 중에서 가장 냉정한 피츠제럴드만이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등 뒤로 손을 보내 몇 번 마법진을 펼쳐보던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위험하군.’ 완벽한 포위망이다. 통신이나 텔레포트 마법진을 차단하기 위한 교란 결계도 진작에 펼친 것 같다. 애초에 저들은 이쪽이 도망치지 않을 것을 알고 지지 않을 싸움을 걸어왔으리라. 사실 도망친다는 선택지 자체도, 부상자들 때문에 여의치않다. 이대로는 죄다 포로로 잡힐 판이다. “선택하시오. 물러날 것인지, 싸울 것인지.” 그렇게 선언한 아크 팔라딘 잘콘이 주위를 한번 쓱 훑어보았다. 베히모스와의 치열한 전투로 패잔병 같은 몰골의 학생들 중, 요주의 인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성녀와 비견된다는 현역 군단장들. 그들이 자리에 없다. “…….” 잘콘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들을 부른 사무관 베스티올라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이었다. 당황한 베스티올라는 입 모양으로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누굴 찾고 있지?]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일순 살벌한 목소리가 좌중을 찍어 눌렀다. 순백의 대검을 바닥에 대고 불똥을 튀기며 끌고 오는 남자는 틀림없는 제7군단장. 본 아머 차림에 무형의 망토를 휘날리며, 저벅 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시몬!’ ‘회장이다!’ 키젠 학생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일렁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토록 힘이 되는 존재는 없었다. ‘암흑연합의 군단장인가.’ ‘악의 결정체.’ 반면 프리스트들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처음 뵙겠소, 암흑연합의 군단장.” 아크 팔라딘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시몬은 파멸의 대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그들을 돌아보았다. [성녀는 없나.] 시몬은 부대를 한번 쓱 보더니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팔라딘들이 발끈한 반응을 보이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더러운 입으로 그분들을 입에 담지 마라!” “위대한 분들이 나설 필요도 없이 우리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여신이시여! 저들을 심판할 힘을!” 잘콘은 팔을 들어 부하들의 입을 다물게 한 뒤 미소 지었다. “이런 전투에 성녀분들이 올 이유는 없소. 정 보고 싶다면 하늘섬으로 후송된 뒤에 요청해 보는 건 어떻소.” ‘헛소릴.’ 다른 학생들을 모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현역 군단장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제거하고 싶을 것이다. 시몬이 어떻게 할지 천천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크르르르르르릉! 살벌한 음성과 함께 돌풍이 몰아쳤다. 팔라딘들이 급히 팔을 들어 머리를 가렸다. “드, 드래곤?” 펄럭! 검게 물든 하늘에서 한 쌍의 날개를 펼치며 검은 드래곤이 내려와 시몬의 옆으로 착지했다. 흘러나오는 드래곤 피어를 퍼뜨려 팔라딘들을 위협한 검은 용의 형체가 서서히 줄어들며 헥토르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대로 끝내기엔 몸이 덜 풀렸는데 잘됐군.” 씹어 먹을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헥토르의 목과 안면에 온통 혈관이 불거져 있었다. “불태워 주마, 프리스트.” 시몬은 슬쩍 눈을 굴려 헥토르의 상태를 알아보고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다리가 다 떨리고 있는데 무리하긴.’ 그래도 지쳐 있는 가운데 망설임 없이 같이 싸워주러 나온 건 고마웠다. “그 모습, 제6군단장인가.” 흥분한 듯한 잘콘이 손에 든 창을 들어 올렸다. “두 명의 군단장이 상대라니! 여신께서 나를 지켜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장이로구나!” 우우우우우우웅! 창 끝에서 방대한 질량의 신성이 피어올랐다. 정말로 아크 팔라딘이라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다른 팔라딘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곤 기도를 하며 자신의 몸에 축복을 걸기 시작했다. 키젠 학생들도 저주 마법진을 겹겹이 준비하며 맞대응했다. 시몬이 살짝 피어의 투구를 올리며 헥토르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레인은 피신시켰지?” “……내가 머저리로 보이나. 어떻게든 배에 태워 보냈다.” 승패를 떠나서 로레인의 피난은 최우선 과제. 저들은 현역 군단장이 있다는 것만 듣고 여기에 왔으리라. 네프티스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전투가 아니라 진짜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군단장 둘이면 충분하다. “자!” 잘콘이 자세를 낮추며 창을 세워 들었다. “부디 즐겁게 해주길 바라겠소!” 그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투화아아아아아악! 하늘에서 거대한 포격이 떨어졌다. 잘콘이 급히 자세를 바꾸고 물러나 포격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뭐지?” “위다!” 키젠 학생들과 프리스트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언데드 전함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붉은 스켈레톤들이 호위하듯 둥둥 떠 있었다. 팔라딘들이 동요했다. “암흑연합의 지원군인가!” “텔레포트를 차단했는데 이렇게 빨리!” 저 웅장한 모습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저걸 다루고 있는 건 사실 한 명이다. ‘아론 교수님!’ 이내 전함에서 붉은 스켈레톤 하나가 이리로 내려왔다. 스켈레톤의 본 아머가 철컥 철컥 열리며 아론이 그 안에서 떨어져 내렸다. 잘콘이 인상을 굳혔다. 사무관 베스티올라의 보고에는 없었던 인물. ‘이자까지 나타난 건 예상외군.’ “키젠의 아론 데이아라고 한다.” 아론이 시몬과 헥토르에게 고개를 한 차례 끄덕여 보인 뒤 앞으로 나왔다. “아크 팔라딘 잘콘, 그대의 호승심은 이쪽 세계에도 익히 알려져 있지. 하지만 그대의 공세는 중립지대 협약에 어긋나는 바다.” “협약을 어긴 건 그쪽이지 않소. 우리는 오르자바 영주의 요청을 받고 이곳을 지키기 위해 온 거요.” 촤륵. 아론이 서류 한 장을 펼쳐 들었다. 세르네와 전 영주의 서명을 받아낸 바로 그 서류였다. “중립지대의 오르자바는 키젠의 군사 활동을 적극 지원할 것이다. 또한 오르자바는 이번 베히모스와의 전투 동안 키젠의 통제에 전적으로 따르며 군 통제권을 위임한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베히모스 와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소.” “아니.” 스윽. 아론이 뒤를 가리켰다. “아직 베히모스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퍼어어어어어엉!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안가에서 모래가 솟구치고 폭음이 들썩거렸다. 멀리서 고래의 꼬리가 보이고 울음소리가 들린다. 세르네의 환상이거나 적당히 다른 학생들이 그럴듯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잘콘의 표정도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건 기만이오!” “정말 그렇게 보이는가?” 아론이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히모스 전투가 끝나지 않은 이상 우리는 이곳에 남아 주민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대들이 싸움을 걸어온다면 기꺼이 상대해 주겠지만, 협약을 어기는 건 그쪽이라는 점은 명확히 하고 싶군.”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의 새 협약. 네프티스와 이스라필이 맺은 이 협약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 골자는 결사라는 강력한 적이 대두했으니 잠시라도 분쟁을 멈추기 위해 기존의 중립지대 협약을 더더욱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새 협약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신성연방 측의 문제로 파기하는 건, 이스라필을 비롯한 신성연방의 온건파 전체를 무시하고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잘콘은 전형적으로 공에 눈이 멀어 덤벼드는 호승심이 강한 아크 팔라딘. 신성연방의 정규군을 통솔하는 게 아니라 그저 싸움을 좇아 본인의 직속 수하들을 데리고 몰려왔을 뿐이다. 군단장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리로 넘어와 싸우기를 염원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에나 가능했고, 현재는 협약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 일. 잘콘의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갔다. 새로운 영주 베스티올라 또한 세르네에게 눈 훤히 뜨고 당한 셈이었으나, 자신이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고 뭔가에 조종당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잘콘 님.” 동시에 한 팔라딘이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중립지대 주민들의 여론이 최악입니다.” 이미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키젠 학생들이 베히모스와 목숨을 걸고 싸운 건 오르자바의 모든 주민들이 직접 목격했다. 그런 주민들이 신성연방의 팔라딘들이 자신들을 구해준 네크로맨서들을 공격하려는 사실을 듣고는 구름처럼 몰려온 것이다. -키젠분들은 우리의 은인이요! 물러가시오! -사무관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중립지대는 더 이상 신성연방의 전쟁터가 아니다! 주민들 모두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거기에. “7군단의 병력들이 뒤를 잡았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후방에서 돌아올 겁니다.” “…….” 이미 군단은 움직이고 있었다. 괜히 시몬 홀로 여기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쯧.’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여신의 적을 두고 물러나는 것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은 아크 팔라딘이 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10시간.” “…….” “그 정도면 베히모스와의 전투도 끝났다고 믿겠소. 수작질을 받아주는 건 딱 그 정도뿐이오. 그 시간 이후에는.” 꾸욱. 잘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신의 창이 그대들을 심판할 거요.” * * * 시간을 벌었다. 아론은 즉시 움직일 수 있는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저들이 정말로 싸움을 걸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한다. 너희들은 배를 타고 중립지대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내가 남아서 상대하겠다.” 당연히 학생들은 거절했다. “차라리 잘됐어요! 이 기회에 프리스트 광신도 자식들을 박살 내죠!” “2년 전에 성녀가 우리 학교를 건들기도 했잖아요!” “교수님만 두고 갈 순 없어요!” 모든 학생들이 전투욕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시몬은 태연한 반응이었다. “다들 마음 놓고 쉬고 계세요. 잘콘과 팔라딘들은 알아서 물러날 테니까요.” “?” 모두의 시선이 시몬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조장?” “아, 그야.” 너무 의미심장하게 말했나? 시몬이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신성연방 내부의 상황이 복잡하니까?” “그건 확신할 수 없어! 잘콘은 진짜 막무가내야. 하늘섬의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 * * 학생들이 전투를 대비하는 사이, 시몬은 토토에게 잠시 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들을 보러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슬쩍 빠져나갔다. ‘알라제, 그럴듯한 프리스트의 얼굴 가죽을 준비해 줘.’ [바로 준비.] 시몬은 텅 빈 집으로 들어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신성연방에서 구매한 백색 로브를 걸치고, 그곳에서 구매한 향수를 뿌렸다. 머리는 흰 머리카락의 가발을 쓰고 얼굴에는 알라제가 준비한 단백질 얼굴을 뒤집어썼다. ‘마지막으로.’ 시몬이 눈을 감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화아아아아악! 눈부신 신성을 뿜어내며 시몬의 몸에 칠흑 대신 신성이 차올랐다. 시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품속에 있는 작은 수첩을 꺼냈다. “자, 그럼 만나러 가볼까.” 세상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신성을 쓰는 네크로맨서. 상식이 강하게 뿌리내린 시대일수록, 시몬의 활동 반경은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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