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44화 비브론이 숨어 있던 주거지 1층. 그곳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을 알려주듯 온갖 그을린 자국과 부서진 소환수 잔해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세 명의 키젠 학생들이 모두 피를 흘리거나 벽에 부딪힌 채 쓰러져 있었다. “크윽!”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소환학과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첸드라가 비브론에게 목을 붙잡힌 채 컥컥거리고 있었다. “괴물 같은 새끼!” 첸드라가 짓씹듯 말했다. “칭찬 고맙군. 적당히 즐긴 덕분에 머릿속에 찼던 열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말한 비브론이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새하얀 검신. 그의 목에 부딪힌 커다란 장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검을 붙잡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듀라한. 그러나 듀라한의 괴력에도 비브론의 목은 잘리지 않았다. “싸우면서도 내 목을 소환수로 노리는 시도 자체는 좋았다만.” 비브론이 몸을 빙글 돌려, 듀라한이 반대쪽 손으로 쥐고 있는 두개골을 다리로 걷어찼다. “목이 베이지 않는 상대를 만날 상황도 염두에 뒀어야지.” 콰아아아아앙! 가히 폭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듀라한의 두개골이 벽을 뚫고 날아가 옆에 보이는 도시의 집들을 몇 채나 박살 내며 뻗어 나갔다. 듀라한의 두개골이 멀어지자, 홀로 남은 몸뚱이는 추욱 늘어졌다. “암흑연합을 이끄는 키젠도 고작 이 정도 수준인가.” “크, 크윽!” 꾸우욱! 목이 조여가는 중에도 첸드라가 힘겨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 “우리에겐, 배신의 군단장이 있다! 네놈들의, 천적이라지? 단 한 번도 못 이겼다고 들었는데.” 꾸우욱! 목에 힘이 더 들어갔지만 첸드라는 크크 웃으며 중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너도 곧 그 녀석의 손에 끝장날 거다.” “글쎄.” 비브론이 목을 쥔 첸드라를 번쩍 들어 강한 힘으로 벽면에 패대기쳤다. 머리를 부딪힌 첸드라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번 상대해 봤지만 해볼 만하더군.” 비브론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조직원들이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비브론 족장! 몸은 괜찮소?” “키젠 놈들은 어떻게 됐나!” “보다시피.” 비브론이 어깨를 으쓱하며 쓰러진 학생들을 가리켰다. “전멸이다.” “……여, 역시!” “독하게 질긴 놈들이다. 전부 숨은 붙어 있을 테니 데리고 가서 협박을 하든 인질극을 하든 시간을 끌어. 이제 다른 키젠 놈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올 거다.” 그렇게 지시한 비브론이 몸을 돌려 지하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물건’을 가지고 다음 포인트로 넘어간다.” * * * 시몬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초승섬의 원주민들을 아론 교수가 머무는 별장으로 이동시키도록 한 시몬은 이어서 에슈로부터 추가 보고를 들었다. -조장! 큰일 났어! 네가 없는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괜찮아. 하나하나 천천히 보고해 줘. 가장 중요한 건, 지난 긴 세월 동안 일정했던 베히모스들의 움직임에 변동이 생겼다는 점이다. 베히모스가 정상적인 진행 루트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대륙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앞당겨졌고, 더더욱 난폭해졌다고 한다. 벌써 초승섬 인근의 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오늘 안에 초승섬이나 인근 해안의 큰 도시들까지 공격할지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몇몇 동기들이 위험에 빠졌기에, 학과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 중 하나인 로레인이 근해 섬 조원들을 구하러 출발했다. 다음으로는 중립지대의 도시, 오르자바를 조사하러 간 도시 조사 팀의 보고다. 그들은 결사의 연결고리가 있는 중립지대 토착 세력인 유리테스파와 전투를 벌였다. 현재는 유리테스를 붙잡는 데 성공했고, 조직원 잔당이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키젠 학생들이 흩어져서 습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첸드라의 조가 ‘이곳에 결사의 구원자로 추정되는 강자가 있다’는 보고를 남긴 뒤 연락이 끊기며 실종됐다. 시몬은 그 보고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비브론인가.’ 이번 사태의 주도자는 틀림없이 결사의 비브론이라고 시몬은 확신하고 있었다. 비브론과 베히모스의 달라진 움직임에는 분명 강한 연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비브론이 초승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시몬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도 가보자. 그렇게 시몬의 10조와 기네비어의 9조가 함께 이동했다. 기네비어가 조종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가오리 언데드에 탄 뒤, 바다를 가로질러 첸드라의 연락이 마지막으로 끊겼던 장소로 향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어?” 첸드라 일행이 실종된 건물 내부는 찬바람만 쌩쌩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한쪽 무릎을 꿇고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곳곳의 부러지고 널브러진 가구와 핏자국들. 틀림없는 전투의 흔적이다. ‘그리고 이 전흔.’ 스켈레톤의 본 스피어나, 화살 등의 투사체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비슷한 위치에 둥글게 떨어져 있다. 이것은 모두 한 대상을 노리고 날아갔으나, 뚫지 못하고 부딪혀 튕겨 나간 흔적이다. 거기에 벽면에 뚫린 거대한 충격파의 궤적이나 바닥에 팬 커다란 발자국까지. ‘여기 비브론이 있었던 게 확실해.’ “얘들아! 여기 좀 봐줘!” 얼굴이 창백해진 토토가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휘갈겨진 글자로 쓰여진 종잇조각이 벽면에 단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에슈가 당혹스러운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너희 동료들은 우리가 데리고 있다. 한 시간 내로 중립지대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저잣거리에서 한 명씩 처형하겠다.> “어, 어쩌지?” “다들 침착해.” 처형이란 말에 패닉에 빠진 학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기네비어가 앞으로 나왔다. “그 녀석들도 키젠이야. 아무런 대책 없이 잡혀갔을 리가 없어.” 그녀는 바닥에 굴러떨어진 화살을 하나 뽑아 그 촉으로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낸 다음, 마법진에 떨어뜨렸다. 즉각 마법진이 붉게 물들며 효과를 발휘했다. <헤모시커(Hemoseeker)> 쏴아아아아아아아! 방 전체가 온통 불그스름하게 변한 가운데, 곳곳에 숨겨진 혈흔이 드러났다. “역시!” 기네비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닥에 손가락으로 휘갈긴 듯한 혈흔이 있었다. 혈류학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글자도 뭣도 아닌 그저 피의 흔적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혈류마법의 발동 조건이다. 스윽. 슥. 기네비어가 바닥에 묻은 완성되지 않은 피의 글자 위에 자신의 피를 덧대 이어 그렸다. 놀랍게도 룬어의 형태가 갖춰졌다. “발동.” 그녀가 두 손을 깍지 끼는 순간. 몸이 한 차례 격렬히 파르르 떨렸다. “기네비어!” “괜찮아?” 토토과 에슈가 놀라서 양옆에서 다가왔다. 기네비어가 스윽 팔을 들어 올렸다. “난 괜찮아.” 그녀가 후우 숨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첸드라의 혈류마법에 연결됐어. 이제 나는 그 녀석이 잡혀 있는 위치를 알 수 있어.” 다른 학생들이 안도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시몬도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잘했어. 그럼 바로 인질 구출을…….” 쿠쿵-! 갑자기 들리는 굉음에 시몬의 말이 끊겼다. 주위의 물건들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거칠게 떨렸다. 시몬은 바로 통신 수정구를 들고 말했다. “여기는 시몬 폴렌티아. 무슨 일 있어?” -여기는 초승섬 본부! 큰일이야 회장! 베히모스들이……! 베히모스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특히 이 근방 도시를 여러 마리의 베히모스들이 동시에 공격했다는 보고였다. 보고를 들은 시몬은 얼른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고. 쿠쿵! 이곳 위성도시 올케라에도 베히모스 한 마리가 해안가에서 나타난 모습이 보였다.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피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저 베히모스는 이 도시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해안가를 따라 이동할 뿐이다. 시몬이 다시 통신 수정구를 입에 대고 물었다. “초승섬은 어때?” -하늘에 몇 마리 떠 있긴 하지만, 들었던 것처럼 마구 공격하진 않네. 이렇다면 거의 확실하다. 결사는 모종의 방법으로 베히모스의 움직임을 유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이 중립지대를 쓸어버릴 생각이리라. 치직! -여기는 중립지대 고서관의 피츠제럴드. 그때 새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 조도 움직이고 있어. 그 전에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것들을 전부 알려주겠다. * * * 피츠제럴드의 정보에 따르면, 이 모든 사태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심해의 보물, 환옥(換玉). 오랜 과거, 바닷가 깊은 곳에 던전이 열렸고 이 던전의 이상현상으로 바다가 끓는 물처럼 뜨겁게 달궈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마탑주 브리솔루스가 던전에 들어갔고, 던전주를 죽인 뒤 그곳의 아티팩트인 환옥을 가지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격한 전투로 힘이 다 떨어진 브리솔루스는 무거운 환옥을 옮기지 못하고, 결국 바다 밑바닥에 버려둔 채 홀로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기사와 마법사의 시대가 저물고 네크로맨서와 프리스트의 시대로 넘어갈 무렵, 바다에 가라앉아 방치된 환옥이 오랫동안 심해의 마력에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변질되었고, 주위의 해양 생물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파장에 이끌렸지만 심해까지 올 수 없었던 대부분의 수상 생물이나 몬스터는 죽었고, 심해의 수압을 견딜 수 있는 베히모스만이 그곳에 도달하여 이 아티팩트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파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주위의 바다 생물들이 폐사하는 등 중립지대 근방 바다 전체가 죽음의 바다로 변했다. 당시 어업이 생계의 전부였던 중립지대 어민들은 눈뜨고 굶어 죽어야 할 상황에 봉착했다.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상아탑주가 직접 나섰다. 그는 자신의 선조 중 한 명의 실수로 벌어진 일임을 깨닫고, 책임감을 가지고 환옥을 심해에서 끄집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것을 중립지대의 주인 없는 땅에 봉인했지만, 환옥은 봉인된 상태에서도 파장을 퍼뜨려 근처 해역을 지나는 베히모스들을 끌어들였다. 베히모스들은 가는 길에 있는 여러 도시를 무참히 파괴했다. 환옥은 처치 불가능한 골칫덩이가 되었다. 너무 강력한 파장 때문에 아공간에 넣으려는 즉시 아티팩트 자체가 깨져 버리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다시 바다에 버리기에는 같은 참극의 반복일 뿐이었다. 결국 상아탑주는 인적 없는 먼바다의 무인도에 환옥을 봉인하기로 했다. 베히모스들은 환옥에 이끌려 잠시 그 섬에 몰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다시 돌아갔고, 무인도에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맞이했다. 그러나 당시 환옥을 봉인한 상아탑주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무인도로 알려졌던 그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통신 수정구를 통해 피츠제럴드의 보고를 듣고, 뒤이어 도시 팀의 정보로 교차 검증을 끝낸 시몬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심해의 아티팩트가 초승섬에 봉인되어 있었고, 베히모스는 알을 낳으러 온 게 아니라 그 물건에 이끌려 유도됐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는 결사에서 이 아티팩트를 이용해 중립지대를 멸망시키려 한다. 이거지?” -정확하다. 비브론이란 자가 굳이 초승섬의 족장직을 자처하며 남은 것도, 주민들을 이용해 그 오염된 아티팩트의 봉인을 해제하려고 했던 거겠지. 긴 시간과 작업 인원이 필요했을 테니까. 모든 게 명확해졌다. 비브론은 환옥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베히모스를 끌어들일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이 근방에 가장 큰 도시인 오르자바. 베히모스 떼가 들이닥친다면 오르자바는 흔적도 남지 않고 멸망할 것이다. 시몬이 팔을 펼쳤다. “기네비어 조는 인질 구출을 부탁해. 토토랑 에슈도 같이 가서 도와줘.” 시몬이 아공간에서 피어를 꺼내 본 아머를 입으며 말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오르자바를 지키는 데 집중해 줘. 우리는 당초 생각했던 초승섬이 아니라 오르자바에서 베히모스를 상대해야 할 거야. 사람들을 구하면서 싸워야 하는 일이니 쉽지는 않겠지만, 잘 부탁해.” -그럼 환옥을 들고 다니는 그 구원자로 추정되는 녀석은 어떻게 해? 차악. 시몬이 피어의 투구를 눌러쓰고는 말했다. [놈은 내 거다.] 통신을 지켜보던 기네비어를 비롯한 학생들이 흠칫했다. 에슈가 슬쩍 웃었다. “……가끔 안 믿겼는데, 그 유명한 배신의 군단장 맞네.” “그래, 알겠어. 회장 지시대로 움직이자.” 기네비어가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이길 수 있겠어? 첸드라를 상처 없이 이길 정도라면 그 비브론이라는 남자, 말도 안 되게 강할 거야.” [이미 한번 상대해 봤는데.] 시몬이 씩 웃었다. [할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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