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45화 중립지대 밖으로 도망치려다 체포된 유리테스의 잔당들이 뼈로 이루어진 감옥에 갇힌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모인 방향, 헥토르 무어가 차가운 표정으로 통신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이야, 배신의 군단장. 이제 우리는 아예 들러리 취급하는데?” 헥토르의 파벌 학생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놈은 내 거다. 시몬의 선언. 자신이 구원자로 추정되는 가장 큰 거물을 잡겠다는 의미였다. 피에르 버클러가 슬쩍 헥토르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할래? 헥토르. 우리도 갈까?” 시몬에 대해서라면 승부욕과 질투심을 불태우는 그였으니, 당장에라도 노발대발하며 자신이 먼저 결사의 구원자를 잡겠다고 나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헥토르는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한쪽 동공이 일렁이더니 파충류 같은 세로 동공으로 바뀌었다. 눈 주위의 살갗이 떨어져 나오며 검은 비늘이 드러났다. “……헥토르?” “우리는.”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오르자바 수비에 전력을 다한다.” 오. 피에르가 의외라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옆에서 건들거리던 파벌 남학생이 ‘응?’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지, 진짜로?” “결사의 머리를 잡는 것보다 도시의 방어가 더 중요하다.” 그렇게 말한 헥토르가 파벌 학생을 노려보았다. “더 중요한 일을 내가 맡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그, 그러엄! 역시 헥토르야!” 파벌 학생이 애써 고개를 휙휙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헥토르는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고오오오오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너머로 새까맣게 몰려드는 베히모스의 무리가.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더 이상 베히모스 실습이니 뭐니 할 문제가 아니다. 역사에 기록될 참극이 눈앞에 있고, 바로 그 현장에 자신을 포함한 키젠 3학년 40명이 있다. 현장에 있었는데도 막지 못한다면 키젠과 무어 가문의 이름은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결사에 키젠이 패했다는 기사가 대륙 전체에 퍼질 것이다. 그런 꼴은 자신이 눈을 훤히 뜨고 있는 이상 못 본다. 이제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위치다. “헥토르 무어다. 학과 전체에 지시를 내리겠다.” 헥토르가 새로운 통신 수정구를 들고 선언했다. “시몬 폴렌티아를 제외한 전 인원은 오르자바의 해안요새에 집결. 키젠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여기서 베히모스를 막는다.” [오케이!] [바로 갈게. 우리는 20분 걸려!] 곳곳에서 긍정의 대답이 들려온다. 헥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르자바에 영주를 찾아간 3조는 우리가 문제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지원해라. 아직 멀었나?” [아, 그게…….] 통신 수정구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3조 쪽의 학생인 듯한데,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문제가 생긴 듯했다. [상황이 좀 복잡해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한 시간 안에 끝내라.” 뚝. 그렇게 말한 헥토르가 통신 수정구 전원을 꺼버렸다. 피에르가 유쾌하게 웃었다. “가자.” 헥토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각자의 개성대로 퍼질러 앉아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고 키젠 교복과 마크를 당당히 드러냈다. * * * [한 시간 안에 끝내라.] 뚝. 통신 수정구를 붙잡고 쩔쩔매고 있던 학생이 그 말을 듣고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왈칵하고 화를 냈다. “아니, 지가 끝내라고 한다고 끝날 상황이 아니라고 지금.” 하아. 한숨을 푹푹 쉰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중립지대 오르자바의 영주성. 행정 처리를 위해 온 3조는 아직 오르자바 영주의 얼굴조차 못 보고 있었다. 굳게 닫힌 문 앞으로 경비병들이 창을 교차한 채 가로막고 있었고, 그 앞에는 영지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사무관이 서 있었다. 3조 학생들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왜 전투 허가를 못 내준다는 건데요? 키젠이 오르자바의 영지민들을 위해 싸워주겠다니까요!” 사무관이 고개를 저었다. “오르자바는 연합도 연방도 아닌 엄연한 자치 중립지역으로, 세 세력의 협의안에 따른 중립지대 법률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가 문서를 펼쳐 들었다. “하지만 키젠의 중립지대 내 불법적인 군사행동, 그로 인한 기물 및 시설 파손과 주민들이 느낀 위협까지. 심지어 유리테스의 신병을 건네달라는 저희 요청도 거절하셨죠. 중립지대는 더 이상 당신들의 전쟁터가 아닙니다.” “결사가 숨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것도 댁들 영지를 망치는 암적인 존재들인데! 포상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지금 어쩌라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사무관이 딱딱하게 말했다. “여러분의 행동은 허가받지 않은 중대한 폭력 행위이자 범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무뢰배들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고, 영주님을 뵙게 할 수도 없습니다.” 착. 사무관이 서류 한 장을 펼쳐 들었다. “중립지대 법안에 의거하여 오르자바는 여러분께 즉시 도시에서 나가주시길 요청드립니다. 거절하신다면 오르자바는 여러분의 중립지대 체류 자격을 말소하고 범죄자로서 병사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리려 합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이 서류에 서명하고 중립지대에서 나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슨!” “내가 볼게.” 안경을 쓴 3조의 여학생이 서류를 붙잡고 빠르게 훑어보았다. 옆에 있던 학생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당신 귓구멍이 막혔어? 베히모스가 오고 있다고! 베히모스가! 도시가 위험하다니까! 댁들 영주민들이 다 죽게 생겼다고!” “그 정보를 신뢰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그렇다고 해도 저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진정해.” 씩씩거리는 동기를 말린 여학생이 서류의 한쪽을 가리켰다. “합의안에 의거하면 8조 조항은 적절하지 않아요. 범죄자 이탈에 대한 조항을 고려했을 때…….” “우리 영지는 유리테스를 수배한 적이 없습니다. 그를 범죄자로 본 건 암흑연합 측의 해석입니다.” “7항, 우리는 중립지대 내 암흑연합 주민을 안전히 보호할 의무가 있어요! 따라서 우리의 전투 행위는 합법적이에요!” “14조 5항에 의거하여 여러분의 결사 섬멸 활동은 암흑연합의 주민 보호 의무와는 상이합니다. 유리테스를 체포하겠다고 통보하실 때 보호 활동이라는 명목은 없었습니다.” 이제 막 행정법을 배운 10대 학생이, 중립지대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행정으로 밥 먹고 살아온 사무관을 이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여학생은 이 조항이 잘못된 걸 알았지만, 대입되는 법률을 모르니 지적할 수 없었다. ‘우릴 속이고 있는 거야! 분명 여기는 제인 교수님이 가르쳐 주신 부분인데!’ 막상 실전에 맞닥뜨리니 원하는 내용이 착착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3학년 커리큘럼 시작부터 행정을 가르치는 제인에게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 없는 가르침은 없었고, 제인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학생들에게 행정을 가르친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서 더 열심히 하는 건데.’ 첫 임무부터 이런 난관을 겪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행정 절차가 꼬이면 밖에서 목숨을 걸고 베히모스와 싸우는 동료들의 모든 숭고한 희생과 노력이 비합법 무력 활동 취급당한다. 3학년 커리어에 마이너스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가 고민을 거듭하는 가운데, 다른 동기들은 서슬 퍼런 얼굴로 사무관에게 따지고 있었다. “자꾸 이렇게 나오신다면-” 그때 사무관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지금까지는 친암흑연합이었던 오르자바의 정책 기조 자체를 변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요?” “나와주시죠.” 키젠 학생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갑자기 굳게 닫힌 문이 열리더니, 하얀 로브를 입은 두 남녀가 걸어 나왔다.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소름 끼치는 백색의 힘에, 키젠 학생들의 눈에 적대감이 일렁였다. ‘프리스트!’ ‘프리스트가 있었어?’ 두 로브를 입은 남녀가 두 손을 모으며 신성을 일으켰다. 키젠 학생들도 지지 않고 칠흑을 일으켰다. “중립지대가 괜히 중립지대겠습니까.” 남자 프리스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중립지대 협약에 의거하여 괜한 분란을 야기하지 말아주시길.” “망할 광신도 새끼들이 또!” “시체 냄새 나는 네크로맨서답게 말이 험합니다.” 두 세력이 서로 이를 갈고 있는 가운데, 사무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럼 서류에 서명을 받아야겠습니다.” 사무관이 옆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아 깃펜을 들어 올렸다. “서명하신다면 돌아갈 시간을 드릴 테고, 최대한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무시하신다면 오르자바 영지는 여러분을 범접자로 단정 짓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여러분을 체포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눈을 돌려 프리스트들을 보았다. “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프리스트들이 싱긋 웃었다. 키젠 학생들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샤라라라라라락-! “?” 그때 주위에 꽃잎이 휘몰아치는 듯한 환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좋아요.”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상앗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학생, 세르네 아인다르크였다. 그녀의 뒤로는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세르네의 다른 조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세르네!” 감격한 다른 동기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걸어온 세르네는 사무관이 준비한 테이블에 앉았다. “귀찮으니 빨리 끝내죠. 여기에 서명하면 될까요?” “그, 그렇소.” 세르네는 서류를 보지도 않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서명을 써 내려갔다. 뒤쪽에 있던 3조 동기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갑자기 와서 무슨 짓이야!” 사무관은 세르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자신도 서명을 마쳤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 응?” 싸아아아아아아! 갑자기. 사무관의 눈앞으로 깃털이 쏟아져 지나가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네, 이 서류에 나온 그대로 진행하는 거예요.” 세르네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그가 서류를 다시 확인했고. “!” 그의 입이 벌어졌다. <중립지대의 오르자바 영지는 키젠의 군사 활동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이에 따른 어떠한 문제에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밝힙니다.> <중립지대의 오르자바 영지는 군사 활동 도중에 키젠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시설 문제에 대해 책임질 것이며…….> “이게 무슨!” 시뻘게진 얼굴의 사무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 이건 속임수요! 서류를 바꿔치기한 게 틀림없소!” “? 그럴 리가요. 사무관님의 필체 아닌가요?” 그가 다시 서류를 눈앞에 대고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이 필체는 틀림없이 본인의 손으로 쓴 조항과 서명이었다. 세르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제라도 있어요?” “이, 이건……!” 그의 눈이 핑핑 돌아갔다. 머리가 극도로 아프며 사고를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그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들의 기만에 당했소!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털썩! 쿵! 그러나 프리스트들은 갑자기 자리에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커헉! 컥!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입에서 녹색 찻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네놈!” “우리한테 뭘 먹인……! 크윽!” 그 모습을 본 세르네가 오호호 웃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네크로맨서를 위해 프리스트분들께 독을 먹인 건가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제 오르자바는 완전히 신성연방과는 틀어졌네요.” “……당신!” 사무관이 분노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그녀가 싱긋 눈웃음을 쳤다. “지금부터는 할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싸한 기분에 사무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서류가 바뀌고, 프리스트들이 자신이 준 차를 마시고 쓰러져 있다. 이게 어떤 종류의 속임수이든 상관없다. 이 여자는 적으로 만드는 것 그 자체가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모든 걸 꾸밀 수 있다. “……이번 일을 오르자바는 잊지 않을 것이오!” 결국 그 정도로 이야기한 사무관이 허둥지둥 문안으로 들어갔다. 세르네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기들에게 행정적으로 완벽해진 서류를 건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은 ‘환옥’으로 인해 일어난 일, 전대 상아탑주들이 처리하지 못한 일이니 사실상의 현 상아탑주인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죠?” 그러곤 쓰러진 프리스트들에게 다가갔다. “크윽!” 목을 붙잡은 프리스트가 눈물을 글썽이며 손에 마법진을 펼쳤다. “빨리 정화를!” “늦었어요.” 등 뒤에서 날아온 깃털이 프리스트들의 목덜미에 꽂혔다. “계시의 수녀 문제나, 내 진짜 부모를 죽인 사람들이나, 알고 싶은 건 많지만 그 전에 여러 실험을 해보고 싶네요.” 그녀가 살랑거리며 입을 모았다. “나는 데바 여신의 현현(顯現)이다.” 처억. 척.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프리스트가 바짝 엎드렸다. 두 사람의 몸에서 신성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나의 어머니, 위대한 여신을 뵙습니다!” 그들의 말에 세르네가 후훗 웃었다. “대충 신성연방에 남았다면 내가 어떻게 하늘섬에 장악했는지 알겠네.” * * * 같은 시각. 으적! 퍼어어어어억! 시몬은 한 무리의 조직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파멸의 대검을 바닥에 꽂은 그의 주위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시몬이 올 걸 대비하고 숨어 있었으나, 일반 조직원으로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비브론은 어디 있나.]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조직원의 팔을 짓밟았다. 점점 힘을 가하자 조직원이 크아악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모른다! 정말 모른다고! 우린 그냥 여기 대기하고 있었을 뿐이야!” 퍽! 시몬이 발을 들어 그의 안면을 걷어차는 것으로 기절시켰다. 당연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비브론.’ 시몬이 밖으로 나왔다. ‘이 근방 어딘가에 있는 건 확실해. 어떻게 위치를 알아내야 할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시몬의 눈에도 명확히 보였다. “…….” 수평선을 가득 메운 베히모스들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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