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06화 “……허억!”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시몬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하아, 후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시몬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르륵- 소란을 들은 건지, 병실 문이 열리며 로레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래, 시몬? 악몽이라도 꿨니?” 시몬이 ‘안녕, 로레인’ 하고 인사하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잘…… 모르겠어. 무슨 꿈인지 기억이 안 나.” “으음.” 침대 앞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은 그녀가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이 네가 군단장이라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날이잖아. 너무 긴장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로레인의 눈에 더더욱 걱정이 묻어났다. “엄마께 말씀드려서 일정을 미뤄달라고 요청드릴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군단장 사실을 밝히는 걸…….” “아니, 괜찮아.” 시몬이 애써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결심한 일이야. 더 미룰 수는 없어.” “……응. 결심했다면 알겠어.” 로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곧 암흑연합의 정상회담이 시작될 거야.” * * * 암흑연합 대영주 정상회담. 통칭 ‘연합 정상회담’은 암흑연합에서 열리는 여러 외교적 회담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이는 암흑연합이 주관하며, 4왕국의 왕들과 키젠 측 원로들은 물론, 상아탑이나 펜타모니엄, 그랜드포지 같은 특수 자치구, 각 유력 지역의 영주들까지 참여하는 최대 규모의 회담이다. 참석하는 인원만 1,000명이 넘으며, 올해는 키젠의 로크섬에서 회담이 진행된다. 시설은 키젠의 대강당을 활용했다. 본래는 입학식 전에 신입생들이 바글거려야 할 공간이지만, 오늘만큼은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 긴장되네.’ 슬쩍 대강당에 들어와 본 시몬은 목이 타들어 갔다. 이건 네프티스가 판을 깔아도 너무 크게 깔아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몇몇 언론 앞에서 공표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연합 정상회담이라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또각 또각. “괜찮은 거 맞지?” 로레인이 옆으로 걸어와 시몬의 앞에 섰다. 시몬은 짐짓 놀랐다. 그녀는 소화하기 어려워 보이는 블랙 드레스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세련되게 뒤로 묶었고 손목의 팔찌와 과하지 않은 장신구들까지. 평소에는 교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그녀가 이런 복장을 하고 있으니 상당히 어른스러워 보였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난 괜찮아.” 시몬이 애써 고개를 돌려 숨을 돌린 뒤,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각 지역의 수장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고 있었다. 나름대로 익숙한 얼굴들도 보인다. 블루하버, 펜타모니엄, 파로나 반도, 메크리아 초원, 칼로스 북부, 그랜드포지 등등. 시몬이 가본 적 있던 여러 지역의 영주나 대표들의 얼굴들이 보인다. 1학년 입학식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소년으로 시작했는데, 3학년을 앞둔 지금은 인사할 사람들이 그럭저럭 보이는 게 신기했다. “시몬 선배님! 로레인 선배님!” 2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다란 떡대에, 짧은 빨간 머리카락, 말끔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소년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서!” 작년 특례 2번의 용병왕 아서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허리 굽혀 선배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악수를 했다. 시몬이 그와 악수하며 물었다. “너도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거야?” “하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용병왕이라는 직책 때문에요. 용병들의 대표로 나와서 입장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답한 아서가 눈을 빛내며 시몬을 보았다. “참 그리고, 선배님 일. 사샤로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응, 미리 못 말해줘서 미안해.” 1학년 삼총사 중에서 안전한 우편 주소를 아는 건 사샤뿐이었다. 그래서 사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군단장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다른 둘에게도 이야기해 주라고 했다. 그래서 아서와 몰리 공주도 지금쯤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시몬 선배님에 대한 제 마음속 존경심이 더 커졌습니다!” 아서가 이를 드러냈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 세상이 뒤집히겠군요!”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꾸르르륵! 그때 아서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아서가 하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긴장했더니 배가 아파서!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응, 개학하고 보자.” 로레인도 손을 흔들었다. “고생해, 아서.” “고생하십시오! 로레인 선배님!” 아서가 후다닥 왔던 길로 돌아갔다. 시몬과 로레인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아서는 여전하네.” “그러게.” 그래도 뭔가. 저 무거운 정상회담에서 정체를 밝히기 전에, 아서 앞에서 예행연습을 한 느낌이라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그럼 가볼…….” “으아악! 실례합니다!” 아서가 다시 후다닥 돌아왔다. “화장실 가려고 2층에 왔다는 걸 깜빡했……! 먼저 가겠습니다!” 그가 빠르게 사라졌다. 역시 여전한 것 같다고, 시몬은 생각했다. * * * 한 시간 뒤, 본격적인 정상회담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또래 학생들끼리 하는 입학식, 졸업식 등의 행사는 익숙했지만, 이런 높으신 어른들의 행사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엄숙하고 진지했다. 절차도 상당히 길었다. 대회사, 축사, 개식사, 영접사 등등 생전 처음 보는 절차들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정상회담이 시작하고 다시 두 시간이 지난 뒤, 사회를 맡은 제인이 입을 열었다. “암흑연합의 대총수 네프티스 님, 암흑연합의 사무총장 아르마드 님, 그리고 4왕국의 국왕 폐하 여러분께서 입장하십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짧은 두 팔을 슉슉 흔들며 선두에서 걷고 있는 네프티스와, 가맹국인 국왕들, 그리고 연합 조직의 사무총장이 콧수염을 붙잡은 채 걸어왔다. 당연히 그중에서도 모두의 시선을 빼앗는 건 네프티스였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 -늠름해. 장골이야. -으스스해요.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일반 청중들에겐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청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네프티스 일행이 연단 위 상석에 자리를 잡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자리를 빛내줘서 고마워!” 제인으로부터 확성 수정구를 받아 든 네프티스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모두가 사전에 통보받았다시피 이번 정상회담의 안건은 이거야.” 그녀가 손끝을 세웠고, 무대 위로 ‘결사’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전 대륙이 결사의 무차별적인 공세를 받고 있어. 실제로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고.” 모두의 시선이 잠시 연단에 앉은 샤헤드 국왕에게 머물렀다. 그는 여전히 오른팔을 부목에 고정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암흑연합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해 볼 거야. 의견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줘.” 그러자 하나둘 손이 올라왔고, 여러 영지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제인이 길어지는 이야기를 적절하게 차단했고, 네프티스가 질문에 답했다. “우리는 매달 막대한 세금을 연합 측에 지불합니다.” 세 번째 질문자, 파드로 대영지의 영주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연합과 키젠은 이번 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들의 전쟁터가 된 대영지 리버론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샤헤드 사태도 보름이 지난 뒤에야 끝났고, 펌킨 사태는 말할 것도 없죠. 이런 지경인데 우리가 연합을 유지할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대영지들에 부과되는 세금은 지나치게 막중합니다! 차라리 연방에 내는 막대한 세금을 중단하고, 그 비용으로 영지의 사병과 네크로맨서를 고용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몇몇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물론 작은 영지에서도 불만은 있었다. 한 영주가 발언권을 얻어 손을 들었다. “연합의 지원은 인구가 많거나 큰 도시에 집중되고 있어요. 부디 작은 영지도 눈여겨봐 주세요. 우리도 연합의 일원이고 사정에 맞게 돈을 지불하고 있지만, 작은 시골 영지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고 싶습니다.” 작은 영지의 영주들도 ‘옳소!’ 하고 외치며 불만을 표했다. “그래, 그래. 그런 불만들도 이해는 해.” 네프티스가 콩콩 작은 주먹으로 제 어깨를 두들기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내 몸은 하나인걸? 내 힘도 고갈되고 있고, 본부에서도 몇 달 동안 전시 체계로 야근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 우리는 모든 역량을 쥐어짜고 있지만 피해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어. 이 근본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좌중이 침묵했고, 그녀가 팔짱을 꼈다. “결사의 본거지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야! 던전을 비롯한 다른 차원에 뿌리내리고 있거든.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공격할 수 없지! 그들은 해당 지역에 갑자기 등장해서 파괴 행위를 일삼고 사라져. 기존 영지의 군사력으로 결사를 막기는 힘들고, 연합이 병력을 준비해 보내면 결사는 이미 도망치고 해당 장소는 비극이 벌어진 뒤야.” 몇몇 영주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차원에 숨은 자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긴 하군.” “계속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때 네프티스의 청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길을 찾아냈어.” “!” 모두의 시선이 네프티스에 집중되었다. “앞으로의 화두는 ‘차원전쟁’이야. 우리는 결사가 숨은 차원까지 쫓아 들어가 그들을 뿌리 뽑을 생각이야. 이미 우리는 결사가 보유한 가장 큰 규모의 연구소를 파괴했고,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어. 조금씩이나마 진전이 있다는 거지.” 차원을 넘어 결사의 시설을 파괴했다는 소식에 대강당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차원전쟁이라니, 믿기 힘든 이야기로군.” “하지만 네프티스 님이 허튼 말을 하실 분도 아니고.” 각자의 땅에서 농사나 짓고 하루하루 힘겹게 생활해 나가는 대륙민들이다. 결사니 차원전쟁이니 하는 이야기가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건 사실이었지만, 최근에 대륙 곳곳에 일어나는 사태 또한 의문스럽긴 매한가지. 세상이 급변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각 영지의 통치자들과 주권자들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상회담에 특별한 손님을 모셨어.” 네프티스가 뒤로 물러났다. “지금까지 대륙에서 가장 결사에 많은 피해를 입힌 인물이자, 결사의 강력한 천적. 또한 차원을 다루는 전문가이기도 해.” 설마!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네프티스가 웃으며 말했다. “벨하이츠의 영웅, 제7군단장을 이 자리에 부를게.”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연단의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몬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피어의 투구를 눌러썼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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