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02화 상아탑 상층. “흐음.” 딸칵. 고아한 분위기가 흐르는 테라스 정원에, 백금발 머리카락의 소녀가 찻잔을 들고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졸업 후 상아탑의 지배자가 될 몸이자, 사실상 현재도 전권을 휘두르는 거물. 세르네 아인다르크. 그녀는 테이블에 펼쳐둔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 어떤 연방의 인간도 해내지 못한 기적! 끝까지 생존자들을 지키며 결사와 싸운 영웅적 면모!> <왕궁으로 돌아온 샤헤드 국왕, 첫 국정 명령으로 7군단 척살령 전면 철폐 발표.> ‘방학 동안 인상적인 행보네요, 시몬.’ 딸칵.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무수한 군단의 언데드를 등지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7군단장 얼굴 사진에 손끝을 올리더니 빙빙 돌렸다. ‘당신의 이 행보는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을 뿐인 해프닝일까요? 아니면 앞으로의 행적을 위한 밑그림일까요?’ “꺄아아아아악!” 평화로운 테라스 정원, 갑자기 울려 퍼지는 고성에 세르네가 고개를 돌렸다. 저 옆 테이블에서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신문을 들고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뛸 때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너울거렸다. “역시 피온 님! 대단해! 너무 멋져어!” 메이린이었다.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환호하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벨하이츠 해방! 대륙의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우리 피온 님이 해내신 거야! 이제는 나 혼자 조용히 응원하던 분이 정말로 대륙의 스타가 된 것 같아서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 몇 번을 봐도 감동이야!” 메이린은 평소엔 고위귀족 영애다운 도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본인이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 하는 ‘피온’의 일에 관여되면 저렇게 바보가 되어 광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급기야 가위를 가져오더니 신문에 나온 사진을 자르기 시작했다. 스크랩해서 방에 장식할 생각인 것 같았다. “메이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르네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야, 나 집중해야 해! 말 시키지 마!”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뭘?” 세르네가 풋 웃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뭐야, 싱겁게.” 메이린은 세르네 쪽을 한번 쏘아봐 준 뒤, 다시 가위로 조심스럽게 피온이 나온 신문 부분을 잘라냈다. 금방 헤벌쭉 웃는 표정이 되었다. “실례합니다, 메이린 아가씨.” 작은 발소리와 함께 상아탑 직원이 테라스 정원으로 걸어왔다. “아가씨께 편지가 왔습니다.” “네? 아, 나중에 확인해 볼게요. 제 집무실 책상에 올려두시면 검토해서…….” “키젠의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님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네? 시몬이?” 메이린은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후다닥 달려왔다. 이내 시몬이 보냈다는 편지를 받아서 다시 한번 겉면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더니, 상기된 얼굴로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아까는 선망과 팬심 가득한 팬의 모습이었다면, 이번엔 기념일에 러브레터를 받은 10대 소녀 같은 모습이다. 주위를 휙휙 경계하듯 둘러보던 그녀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르네를 발견하고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급히 편지를 제 가슴 쪽으로 숨기는 모습이다. “세리는 안 훔쳐볼 테니까 편하게 확인해~” 세르네가 특유의 여우 같은 눈웃음을 흘렸다. “이제 곧 같이 비즈니스 파트너들 만나야 하잖아. 새벽에나 회의가 끝날 텐데, 그때까지 궁금해서 참을 수 있겠어?” “…….” 메이린이 입술을 삐쭉 내민 채 세르네를 노려보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이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서 기둥에 몸을 딱 붙였다. 뒤이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대로 내용에 몰입했는지, 곧바로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미리 말해두지만, 훔쳐보는 건 내 잘못이 아니랍니다? 시몬.’ 그녀가 손바닥을 펼치고 깃털 한 장을 생성했다. ‘메이린에게만 편지를 보내면 질투 난다구요. 나쁜 건 시몬이에요.’ 자기합리화를 마친 세르네가 깃털을 날리려고 준비하는 그때. “!” 편지를 읽던 메이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편지를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얼굴은 벌게졌으며, 이마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녀의 동공에 초점이 사라졌다. 편지를 손에서 놓쳐 버리기까지 했다. 나뭇잎처럼 흔들리며 떨어진 편지가 바닥에 톡 내려앉았고, 메이린도 뒤따라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왜 그래? 메이린.” 세르네가 물었지만 메이린은 뭐라 답이 없었다. 세르네는 슬쩍 눈길로 바닥에 떨어진 편지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친애하는 메이린에게. 시몬의 필체가 맞았다. -안녕, 잘 있었어? 방학 동안 편지를 보내지 못해서 미안해. 멀리 여행을 가 있었거든. 편지의 앞줄은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내용들. 그러나 핵심은 중간 부분부터 나왔다. -우선 사과부터 할게. 지금까지 속여서 진심으로 미안해. 네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 -사실 너와 여러 번 마주쳤던 제7군단장, ‘피온’이 바로 나야. 많이 놀랐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정체를 밝히는 이유는……. 여기서부터 메이린의 멘탈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세르네는 바로 뒷줄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지금까지 자신이 왜 배신의 군단장이라는 정체를 숨겨야만 했는지, 그리고 이제 정체를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내용을 잘 정리해서 설명했다. -개학 전에 네프티스 님이 내가 7군단장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발표하기로 했어. 네가 신문이나 소문으로 이 사실을 듣기 전에, 내 입으로 알리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어. 세르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부 합당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메이린?” 메이린의 얼굴이 갈수록 더 뻘게지고 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손바닥을 얼굴로 가렸다. “아, 아으……!” 메이린은 지금 생각하고 있었다. -나쁜 남자에 끌리는 그런 거? 정확히는 그 난폭한 사람이 나한테만 상냥한 거? 그게 좀 로망인 것 같기도 하고. 아 뭐, 솔직히 말하면 얼굴이 잘생겨서 어지간하면 커버 되긴 해. -피온 님께 말씀드렸어. 나만큼은 늘 응원하니 꺾이지 말아달라고.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는 내가 그분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도 우습지만 말야. -좋은 정도가 아니었거든! 눈을 뜨니까 피온 님이 날 안고 계셨거든! 시몬 앞에서 했던 피온의 이야기들. 거기에. -나는 멀리서나마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할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도 곧, 당신의 노력과 헌신을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피온에게 직접 말했던 이야기들. “아, 아아아아…….” 뒷목과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이, 폭발을 앞둔 폭탄처럼 한계치까지 벌겋게 변했다. 이윽고. 꺄아아아아아악! 온갖 흑역사와 부끄러운 감정으로 뒤섞인 외침이 상아탑에 퍼져 나갔다. “무, 무슨 소란이오!” “메이린 아가씨의 목소리였는데?” 놀란 상아탑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내 테라스 정원에서 털썩 주저앉은 메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나 이제 학교 못 가아…….” * * * 시몬의 군단 공개일이 확정되었다. 기일은 신입생 입학식 이틀 전. 시몬이 병동에서 요양하고 있는 가운데 네프티스는 바쁘게 움직였다. 각 왕국과 세력에 협력을 구했고, 배신의 군단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고위계 네크로맨서들에게도 미리 정치적으로든 무력으로든 족쇄를 채워놓았다. 그리고 로크섬에서도 큰 회의를 하나 열었다. <군단장 집결 명령> 암흑연합의 총수이자, 모든 네크로맨서들에게 추앙받는 네프티스가 군단장들에게 집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는 대외비로 진행했으며, 장소는 로크섬 내 대형 지하홀. 회의를 담당하게 된 키젠 본부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로 올까요?” 정장 차림에 꽁지머리를 한 본부 직원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키젠 본부는 현재 석 달째 야근 중이었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고.” 그 옆의 중년 직원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에는 새치가 가득했고 등에는 검을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팔랑팔랑 빠르게 수첩을 넘기며 깃펜으로 점검 사항에 줄을 그은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너도 알다시피 군단장이란 족속들이 워낙 제멋대로잖아. 네프티스 님이 직접 내린 소집령이라고 해도, 그날 기분에 따라 오든 말든 하겠지.” “……뭐 통제 불능이긴 하죠. 이전 매그너스만 봐도.” 그때 하수인들의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제4군단장 ‘테네리페 에체베리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처억! 척! 홀의 입구에 예식용 검을 들고 기립하고 있던 하수인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검례 자세를 취했다. “지, 진짜 왔어?” 본부 직원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새치가 난 직원이 후배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4군단이면 유령군단이네. 이거 껴.” 후배가 건네받은 건 일종의 금속 귀마개 같은 물건이었다. 다른 하수인들은 모두 그것을 끼고 있었다. 후배 직원이 두 귀에 귀마개를 착용하기 무섭게, 계단에서 한 여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이는 생각보다는 젊어 보였다. 키는 1미터 90㎝ 정도로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컸으며, 피부는 창백하고 몸 곳곳에 꿰맨 듯한 특이한 흉터가 있었다. 고딕풍의 기괴한 고스 룩 검정 드레스를 착용했다. 실내에서도 무척 큰 양산을 썼는데, 유령들. 정확히는 ‘밴쉬’들이 하늘을 둥둥 떠다니며 양산을 들어주고 있었다. -끼기기기기기긱! -게게게게게게게게게겍! ‘큭!’ 귀마개를 꼈는데도 밴쉬의 울음소리가 조금 새어 들어왔다. 사방에 밴쉬들이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며 테네리페를 호위했다. 뒤에서 따르는 밴쉬들은 지나치게 큰 그녀의 투명한 드레스 끝을 붙잡고 있었는데, 드레스 뒷부분이 워낙 넓어서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발에 닿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하수인들은 굳은 얼굴로 검례를 취한 채 버텨냈고, 본부 직원 두 명도 고개 숙여 예를 취했다. ‘이 사람이.’ 유령궁의 지배자이자, 유령군단이라고 불리는 제4군단의 군단장. 통칭 ‘왕녀’ 테네리페. 사령학 전공자로서 군단장이 된 특이 케이스다. 그녀는 본부 직원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뒤,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밴쉬들도 모두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소리가 멎었다. -이제 뽑아도 된다.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한 선배 직원이 귀에 낀 귀마개를 뽑았다. 후배도 살았다는 표정으로 귀마개를 뽑고 말했다. “보아하니 저만 힘든 게 아니었네요.” 그녀가 지나간 뒤, 검례를 올리고 있던 하수인들 몇 명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강한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내 그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바로 쌩쌩한 새로운 하수인들이 들어와 같은 검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제3군단장, ‘라즌 맥밀런’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한 명 더 왔어?’ 후배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보고를 들은 선배 직원이 재빨리 말했다. “이봐, 바닥에 깔린 카펫 치워놓…….” 그렇게 말하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늦었네.” 콸콸콸콸! 저 멀리 계단으로부터 대뜸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타고 쏟아진 물은 순식간에 지하실을 발목 높이만큼 채운 채로 졸졸 흘렀다. 무척 깨끗하고 맑은 물이었다. 뒤이어. 첨벙. 첨벙. 물에 젖은 발소리가 들린다. 흑갈색 계통의 무법자와 같은 옷을 입은 사내가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옷은 낡았고 소금 냄새가 났다. 머리에 비스듬하게 쓴 세로로 긴 모자챙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마와 눈을 가리고 있었다. 처억! 척! 뒤를 이어 해군의 깃발을 든 스켈레톤들과 무수한 수중형 언데드들이 괴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후배 직원이 눈알을 굴렸다. ‘이럴 수가! 3군단까지 올 줄은 진짜 몰랐는데.’ 대륙 해양의 패권을 쥐고 있는 바다의 지배자. 군단장 이전에 바다의 언데드들을 통제하고 막대한 해상무역을 제어하는 거물. 해상군단이라고 불리는 제3군단장, 통칭 ‘제독’, 라즌 맥밀런. 바닥에 흐르는 물은 라즌과 해양 언데드들이 지나가는 곳을 따라서 움직였다. 그때 회의실로 들어가려던 제독이 새치가 난 선배 직원을 발견하고는 긴 모자를 들어 올렸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의안에서 시커먼 안광이 번뜩였다. “아직 여기서 일하고 있었나.” “그렇게 됐습니다, 제독.” 후배 직원이 살짝 감탄한 눈으로 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 제독과 자유롭게 말을 주고받다니! “은퇴하면 바다로 오지 않겠나?” “송구합니다만, 아마 네프티스 님이 놔주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가.” 제독은 옅은 미소만 흘린 뒤 챙이 긴 모자를 붙잡아 내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륙양용 언데드들이 깃발을 든 채 뒤따랐다. 이내 그들이 모두 들어간 뒤, 흐르던 물 또한 점점 줄어들다가 사라졌다. “와, 결사가 한바탕 쓸고 간 덕분인가, 이번 소집령 참여율이 이례적으로 높긴 하네요.” 후배 본부 직원이 말에, 선배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수첩을 끄덕거렸다. “이런 분위기면 최강의 1군단도 오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지. 1군단은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아. 그리고 애초에 1군단장은 요즘 연합이 돌아가는 꼴이 달갑지 않을걸.” “그, 그런가요?” “다음 군단장을 맞이할 준비나 해.” 본부 직원이 팔짱을 꼈다.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한 명일 테니까.” 두두두두두두! 이번에는 계단이 아니라 옆의 통로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지면의 진동. 바닥의 울림. 뒤이어 이쪽으로 들어온 건 거대한 유령마들이었다. -히히히히힝! 방 안의 온도가 훅 내려가며 곳곳에 냉기가 감돌았다. 한 무리의 언데드 군마와 언데드 기사들이 북부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유령마에 앉아 있는 건 하얀색 제복에 검은 코트를 두른 여성. 활을 어깨에 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관례라지만 다들 요란이구나.” 긴 세월 동안 북신의 남하를 막아낸 인류의 영웅이자, 칼로스 왕국의 공신. 칼로스 북부와 북부 군단을 통치하는 제2군단장, 통칭 ‘대공’ 진 아르스칼트. 그녀가 군마에서 내려와 말했다. “다른 군단은?” “3군단, 4군단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수님. 1군단과 6군단은 아직입니다. 곧 네프티스 님도 곧 오실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겠다.” 10년 만에 개최하는 군단 회의. 이제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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