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01화 결사의 구원자, 아락무라드와의 격전 이후. 시몬이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익숙한 광경. 평소에 자주 신세 지던 키젠 병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어났니?” 뒤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루비 같은 눈동자와 단아하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로레인이 미소 짓는 얼굴이 보인다. 마지막에 그녀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황한 시몬이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어.” 로레인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댄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내가 정신을 잃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어?” “이틀.” “이틀? 아! 내 언데드들은……!” “피어가 통솔해서 무사히 로크섬으로 들어오고 있으니까 걱정 마.” 그제야 시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엄마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어.” 문득 로레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길이 헝클어진 시몬의 앞머리를 골라서 옆으로 넘겼다. “반드시 따를 필요도 없고.” 상대는 결사의 구원자, 죽지 않는 강자 아락무라드. 수일간의 격전. 로레인의 말대로 무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네프티스 님의 지시 이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 해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 “……굳이 그렇게 무리하겠다면.” 그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내가 옆에서 떠받쳐 줄게.” “……로레인?” “엄마가 네게 무모한 일을 시키신다면, 내가 나설 거야. 딸인 내가 널 돕겠다며 옆에서 억지를 부려도 말리지 못하시겠지.” 햇빛이 그녀의 뒤로 반짝이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안 그래?” 뺨이 살짝 붉어진 시몬이 민망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고, 고마워. 로레인.” “내가 더 고맙지. 엄마의 무리한 지시를 들어줘서.” 확실히 이번 일은 로레인의 도움을 받은 덕이 컸다. 그녀가 벨하이츠에 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회색벽이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아락무라드를 쓰러뜨린 뒤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몸 상태는 최악의 상태로 악화됐을 것이다. 거기에 5일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 파괴 병기가 벨하이츠에 떨어졌다면 시몬은 무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 잠시 평화로운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키젠 캠퍼스의 광경이 펼쳐져 있다. “참, 엄마가 왔다 가셨어.” 로레인의 말에 시몬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네프티스 님이? 뭐라고 하셨어?” “합격. 이라고 하시던데.” “??” “앞으로 2주 뒤, 개학 바로 전에 시몬 네가 군단장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공표하실 생각이라고 하셨어.” 그랬다. 마지막 조건. -네 정체를 세상에 공개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 있어. 샤헤드 왕국. 이제 그 조건을 충족했으니 네프티스도 거칠 게 없을 것이다. -3학년부터는 군단장으로서 학교에 다니게 되는 거야, 시몬! 갑자기 네프티스의 그 말을 떠올리니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예전같이 즐거운 학교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두렵고 걱정되기도 했다. “뭐, 뭔가 긴장되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일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것 같았다. “잘될 거야.” 톡. 톡. 로레인이 시몬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정말로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어떤 순간에도 단호한 눈빛, 상냥한 미소. 역시 그녀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웠다. 마음을 한결 가라앉힌 시몬이 옆을 가리켰다. “저거, 읽어봐도 될까?”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신문 기사들. 로레인은 안정을 위해 조금 쉬었다 보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시몬은 이제 괜찮아졌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로레인이 가져다준 신문을 받아보았다. “아!” <배신의 군단, 단독으로 벨하이츠 해방. 결사에게 억류됐던 국왕 부부와 수천 명의 생존자 구출.> 신문의 첫 면, 회색 사진에 보이는 시몬 본인이 주먹 쥔 손을 치켜든 모습이 보인다. 그 뒤에는 깃발을 든 군단의 언데드들이 있고, 아래에는 쓰러진 아락무라드가, 그리고 사진 끄트머리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팔이 보인다. ‘부, 부끄러워!’ 막상 사진으로 보니 상당히 부끄러웠다. 시몬의 얼굴이 빨개졌고, 신문을 든 손도 파들파들 떨렸다. 그러자 갑자기 신문이 팍! 하고 손에서 벗어났다. 그 뒤로 로레인의 새침한 얼굴이 보인다.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했지?” “미, 미안해! 돌려줘!”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급히 팔만 바둥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쿡쿡 웃은 로레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 신문을 건네주었다. <그 어떤 연방의 인물도 해내지 못한 기적! 배신의 군단은 낡은 시대의 죄인일지 몰라도 신시대의 영웅이다.> <생존자들은 왜 그에게 열광하는가? 불리한 상황에도 끝까지 인명을 최우선으로 삼은 영웅적 면모!> 그 아래의 기사에는 ‘엔비스토’라는 이름의 유명 기자가 7군단에 대해 찬양 일색으로 써 내려간 글들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이어지는 기사들도 전부 7군단에 대한 내용으로 도배되었다. <왕궁으로 돌아온 샤헤드 국왕, 7군단 척살령 전면 철폐 발표.> <제7군단장, 최악의 범죄자에서 최고 국빈 등극. ‘샤헤드는 나라와 국민을 구한 7군단에 무한한 지지를 보낸다.’> <1왕자, 2왕자, 왕실 문장 회수. 평민으로 격하.> 붕대를 칭칭 감은 국왕이 팔을 치켜들며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마력 촬영기 사진으로 찍혀 있었다. 샤헤드 국왕 부부는 약속을 지켰다. <배신의 군단장, 그 정체는 누구인가!>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 이제는 어엿한 암흑연합의 일원으로 인정해야.> 그 뒤에는 배신의 군단을 인정하고 더 큰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기사. 또다시 배신의 군단장의 정체에 갑론을박을 펼치며 여러 후보들을 제시한 기사. 결사의 의도를 파악하는 글과, 이번에 붙잡은 아락무라드를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생각난 김에 시몬이 물었다. “참, 아락무라드는 어떻게 됐어? 뭔가 성과가 있었어?” 로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로크섬으로 데려가려 할 즈음에 머리에서 펑 소리가 나면서 백치가 되어버렸어. 구원자급 정도의 거물도 똑같이 처리하는 모양이더라.” “……골치 아프네.” “그래도 뇌사로 모든 부분이 마비되는 것까진 막아냈다고 하니까. 본부 직원분들이 어떻게든 추가 정보를 끄집어내고 있어. 예를 들자면…….” 그녀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구원자의 숫자는 스무 명이 넘고, 그 강함은 모두가 제각각이라는 점.” “중요한 정보네.” 로레인이 다시 신문을 뺏을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시몬은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렇게 강한 자들이 스무 명이 넘는다고? 시몬 혼자서 다 잡을 건 아니지만, 그 스케일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아락무라드가 그들 중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서너 명만 내려와도 이 세상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허언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였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내 일에 집중해야지.’ 다시 고개를 내려 기사들을 꼼꼼히 살펴보던 시몬이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로레인. 개학 전에 네프티스 님이 내 정체를 발표한다고 했지?” “응.” “미안하지만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구해줄 수 있을까?”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렵지 않지만. 편지는 왜?” “이제 모든 게 확정됐잖아. 내가 군단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지인들에게 알리고 싶어.” 시몬이 눈을 감았다. “신문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듣는 것보다, 내가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좋은 생각이네! 바로 가져올게.” 로레인이 밖으로 나간 사이, 시몬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들 잘 있으려나.’ * * * 하얀소 상단. 창고 부지. “네, 차가운 재료들은 전부 냉동 창고로 옮기세요! 아, 좋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어느 날. 딕은 오늘도 집안의 가업을 돕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꾼들을 지휘해서 돌려보낸 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딕 도련님! 여기 편지입니다!” “편지요?” 그가 직원으로 받은 편지를 착 훑어보았다. 시몬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짜식! 요즘 바쁘다더니 그래도 마지막엔 절친을 챙기는…… 응?” 싱글벙글 웃던 그가 갑자기 눈에 힘을 주더니 입을 닫고 편지를 빠르게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잠깐의 정적. 그러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기울였다. “히야.” 그의 입에서 여러 감정이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제 입으로 사실을 들으니 기분이 들썩들썩하네. 진짜 제대로 저지를 생각인가?” 딕이 여운에 젖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형! 딕 형!” “받아라! 칠흑 화살!” 그의 얼굴 옆으로 슈웅 하고 검은색 칠흑 덩어리가 날아왔다. 딕은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꺾어 피했다. “백날 도전해 봐라. 못 맞힌다니까.” 칠흑을 마구 뿌려대며 뛰어온 건 다름 아닌 딕의 쌍둥이 동생, 빌 헤이워드와 알 헤이워드였다. 그들은 사방으로 칠흑을 일으키며 뛰어놀고 있었다. “아쉽다! 맞힐 수 있었는데!” “딕 형! 이거 봐! 칠흑 형태 변화야!” 그들은 칠흑으로 여러 동물들을 조합하며 낄낄거렸다. 딕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 그거 한창 재밌을 시기지.” 빌과 알은 아버지나 첫째 형 같은 상인의 꿈보다는, 딕의 영향을 받아 네크로맨서가 되기로 했다. 딕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칠흑 코어 개방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키젠 입학시험까지 치르려 준비하던 단계였다. 그런데 키젠 입학시험을 치르기 전에 키젠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건 입학시험을 치를 이유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즉. “우리는 특례인데! 우리는 특례인데!” “부럽지? 부러워서 그렇게 시큰둥한 표정이지?” 와하하하하하! 빌과 알은 놀랍게도 흑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두 아들은 창고지기를 시키겠다며 반대했지만, 키젠 본부 직원이 직접 상단에 찾아온 뒤로는 고집을 꺾고 두 사람의 입학을 허락했다. 본부 직원의 말에 따르면, 이능을 가지거나 모든 흑마법에 뛰어난 건 아니지만 어느 특정 분야에 강력한 재능이 있다고. ‘잘 풀려서 다행이다.’ 딕은 그렇게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두 쌍둥이 동생의 칠흑 형태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빌이 딕의 옆에 놓여 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형! 그거 무슨 편지야?” “시몬 형한테 온 편지지? 우리도 보여줘!” 빌과 알이 다가오자 딕이 얼른 편지를 집어서 등 뒤로 숨겼다. “어허! 이건 키젠 학! 생! 회! 멤버만이 열어볼 수 있는 중요한 안건이야! 일반인은 접근 불가능한 1급 비밀이지!” “에이, 거짓말! 그냥 안부 편지 아냐?” 일단 딕의 말이라면 의심부터 하는 두 동생이었다. 딕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럴 리가? 이건 세상을 들썩거리게 할 내용이라고! 현역 키젠 학생회인 나만 먼저 알고 있는 세상의 비밀이라고나 할까.” “치사해. 우리도 보여줘!” “키젠의 특례 입학생인 우리도 볼 자격이 있어!” 쯧쯧쯧! 딕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특례가 뭐 대단한 줄 알지? 특례 걔들 1학년 때만 어깨 펴고 다니지, 나중에 나락 가는 거 한두 번 본 거 아니다. 특례 10번 말콤 랜돌프도 지금은 내 지시를 듣는 신세라고! 키젠에서 살아남으려면 재능보다 중요한 게 뭐다?” 그가 제 이마를 가리켰다. “냉철한 두뇌와 정확한 판단력이다.” “그리고 인맥이지!” “시몬 형에게 빌붙는 인맥!” “아! 이것들이 하늘 같은 3학년 선배를 물로 봐?” 딕이 상자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빌과 알이 깔깔깔 웃으며 도망쳤다.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으려던 그가 쩝 하고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틀린 말은 아니니 봐주마.” 그가 다시금 편지를 훑어보았다. 정갈한 시몬의 필체를 보며 그의 눈이 복잡하게 변했다. “3학년 초에는 이 문제 때문에 시끄럽겠는걸.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시몬.” * * * 뱀파이어의 영지. 우르슬라성. “네, 아빠! 내일 말씀드릴게요!” 큰 소리로 외친 카미바레즈가 편지를 꼬옥 소중히 품에 안더니 와다다 계단을 올라갔다. 이내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가 얼른 문을 닫고 걸어 잠근 다음, 자리에 앉았다. 톡. 그러고는 조심스레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등 뒤에 있는 한 쌍의 날개가 파닥파닥 흔들렸다. ‘시몬의 편지!’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흡!’ 하고 콧김을 뿜으며 용기를 낸 그녀가 사부작사부작 편지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카미바레즈에게. 이제 곧 개학이고, 새로운 3학년 커리큘럼이 시작된다. 만나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오다니 궁금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걸까? 카미바레즈는 긴장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고. “아.” 연보라색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그 정도였을 뿐, 나중에는 복잡한 미소를 흘리며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결국 이번에 정체를 밝히기로 했네요. 시몬.” 그녀가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끌벅적한 뱀파이어들의 웃음소리 너머로, 하얀 달이 보인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늘 시몬을 응원할 거예요.” * * * 상아탑. 청소용 카트를 끌고 지나가고 있던 상아탑 직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같은 유니폼의 한 직원이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근무 중에 어디가? 서쪽 청소는?” “아. 잠깐 테라스 정원으로 갑니다.” 직원이 한 편지를 꺼내 보였다. “메이린 아가씨께 급히 건네드릴 편지가 있어서요.” 편지 겉면에는 ‘시몬 폴렌티아’라는 글자가 날렵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본 직원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위에서 또 한바탕 난리 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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