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96화 “집사!” 시몬이 환하게 웃었다. “와줬구나! 우릴 도우러 온 거지?” [……도우러 온 건 맞지만, 제가 7군단의 일원이 된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전 5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 좀비집사가 외눈 안경을 붙잡고 차갑게 대꾸했다. [결국 제가 자유의 몸이 되려면 회색벽을 뚫고 이곳을 나가야겠죠. 공동의 적이 남아 있는 이상, 여기서 당신이 죽으면 곤란하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럼 그럼.” 시몬은 살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동료가 한 명 더 늘어나서 기뻐하는 반응. 좀비집사가 인상을 썼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로 날 풀어놨겠지.’역시 인간들은 교활하다. 좀비집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신경을 끄려고 했지만, 자꾸만 싱글싱글 웃는 시몬의 얼굴이 거슬렸다. [당신이 군단의 행적을 지켜보라고 했지요. 명분을 세우고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한 수가 인상적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기세가 좋을 뿐, 힘과 병력에 심취해 머리를 쓰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의해! 그럼 동맹을 맺자. 네가 우리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 돼.” 시몬이 손뼉을 짝 쳤다. 좀비집사는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한숨을 쉬었다. [펜타모니엄 사태나 그늘성 전쟁에서 본 바로는 철두철미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인 줄은 몰랐습니다.] ‘오,’ 그 말을 들은 순간, 시몬은 머리에 파밧 하고 이채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손이 많이 간다. 손이 많이 간다고?’ 좀비집사는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그 뉘앙스에서 묘한 감정을 캐치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뿜어냈던 적대감이나 거부감과는 조금 다른 감정. ‘아, 뭔가 알 것 같은데. 간질간질하게 알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이름도 마땅히 없다. 그저 ‘집사’다. 아마도 늘 곁에서 매그너스를 보필했을 것이다. 매그너스는 몸이 안 좋았으니까. 잔병치레도 잦았으니 유황온천에만 있다고 했다. 그를 챙기는 건 늘 좀비집사의 몫이었으리라. 그리고 여기서 드는 생각. 에이션트 언데드는 어떤 결여된 감정을 채우기 위해 인간인 네크로맨서와 계약을 맺는다. ‘시험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어.’ 시몬의 생각은 빨랐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대뜸 휘청거리다가 좀비집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좀비집사는 익숙한 동작으로 시몬의 몸을 받았다. [? 왜 그러는 겁니까.] “윽, 미안해. 아까 무리하게 방향을 틀다 다리가 살짝 삔 것 같아.” [하,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좀비집사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서 식탁보 하나를 집어서 화분 물에 살짝 적시는 등 조치를 한 뒤, 시몬의 발목을 정성껏 묶기 시작했다. [군단장이나 되는 자가 자신의 부상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부끄럽게 생각하십시오!] 라고 말하며 시몬의 발목 붕대에 리본까지 만들어 묶는 것에서 약간의 광기마저 느껴졌다. 바로 그때. “어이, 어이이, 거기 있냐?” 불현듯 울려 퍼지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시몬과 좀비집사가 동시에 움찔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아락무라드의 목소리였다. “어디 있어! 군단자앙! 우욱, 욱, 아. 속 매스꺼워. 아저씨랑 계속 소통해야지.” [실례합니다.] 좀비집사는 조용히 시몬을 등에 업은 뒤, 아락무라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이동했다. ‘와, 이거였구나.’ 시몬은 이제야 좀비집사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봉사. 섬김. 서비스. 좀비집사의 몸에 꽉 박혀 있는 천성이자 본능에 가까운 행동들. 그런 것도 모르고 집사를 결박해 둔 뒤 나와 함께 가자느니, 더 위대한 군단을 건설하자느니, 그런 식으로 제안하니 먹힐 리가 없었다. 시몬은 과거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십시오.] 아락무라드를 피해 이동하며 좀비집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조사한 아락무라드에 대한 진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실?” 좀비집사는 천천히 팔을 뻗어 창밖의 흑색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게 바로 아락무라드의 힘의 근원입니다. 사실상 아락무라드 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벨하이츠에 인간을 오염시키는 독가스가 퍼지고, 그 직후에 우후죽순으로 솟아났다고 알려져 있는 의문의 나무. 건축물의 지붕이나 옥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저 나무가 아락무라드의 근원이라고?’ 당연히 이질적인 식물이었지만, 워낙 결사가 벌인 일들 중에서 기이한 것들이 많아서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감염체와 아락무라드 공략에 집중하는 것도 벅찼으니까. 하지만 아락무라드가 내뿜는 무한한 힘의 근원이 저 나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저 흑색 나무는 대기 중의 마나를 빨아들인 뒤, 마나를 이상한 녹색 에너지 같은 것으로 조합해 밖으로 배출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좀비집사가 손바닥을 펼치고 칠흑을 일으키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영지 벨하이츠에 저 나무들이 뿌리내린 지는 보름, 이제 저런 에너지가 도시 전역에 가득하죠. 아락무라드의 몸은 일종의 발사대일 뿐입니다. 대기 중에 떠도는 에너지를 모아 물리력을 부여하고 가공해서 싸우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 이해가 된다. 저 흑색 나무들은 마나를 가공해 아락무라드만이 쓸 수 있는 특수한 마나로 배출한다. 아락무라드가 사용한다면 발동 효율은 가히 100%. 그냥 손짓 한 번으로 마나가 즉시 물체로 바뀌는 셈이다. 과거 대마도사 수준의 마력 효율로도 불가능한, 가히 잊혀진 기적과도 같은 수준의 힘. 아락무라드 한 명 한 명이 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 모두가 방대한 녹색 마나를 공유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그때 등 뒤에서 폭음이 들렸다. 시몬이 뒤를 돌아보니 벽을 부수고 아락무라드가 설렁설렁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 여기 있었네. 이 아저씨, 한참을 찾았다고.”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가 파리 잡듯 손을 휘둘렀다. 허공에 생성된 기둥들이 살벌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집사가 한 행동은 ‘도주’. 절대로 교전을 벌이지 않는 모습이다. [아락무라드와 결사는 시간을 들여 ‘절대 패배할 수 없는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터어엉! 순식간에 빠른 발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 집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회색벽도 그 일환입니다. 회색벽은 외부의 대기는 통과시키지만, 내부의 마나나 녹색 에너지가 외부로 나가는 건 차단하더군요. 거기에 아락무라드는 모종의 방법으로 본인의 육체까지 여러 개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럼 아라무라드의 공략법은-” 시몬도 고개를 들어 무수한 흑색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저 나무들을 싹 다 제거하면 된다는 거지?” [불가능할 겁니다.] 집사가 외눈 안경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대륙의 흔한 나무와는 달랐습니다. 이미 제가 가서 불이 붙는지 확인했지만, 불에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지고 있는 재질이었습니다. 일일이 절단하거나 뿌리 뽑아야 한다는 건데, 아락무라드의 공세를 피하면서 이 지역의 흑색 나무들을 전부 제거하는 그림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네.” 이곳은 이미 아락무라드의 영역. 특정 조건만 갖춰지면 그는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은 병력의 수나, 군단장의 강함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파고들 만한 약점도 사전에 잘 차단했다. ‘하지만.’ “콜록 콜록! 우욱! 웨엑!” 시몬을 업고 있던 좀비집사가 급히 걸음을 멈췄다. 방금 뒤에서 아락무라드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앞에서 또 다른 아락무라드가 나타났다. “문제야, 문제.” 한 차례 속을 게워낸 아락무라드가 입가를 쓱 닦았다. “소통이 단절된 이 시대 말야. 옛날에는 사람들이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세상이 너무 바뀌었어.” 그가 오른손을 주먹 쥐고 아래로 내리긋자, 대뜸 하늘에서 집채만 한 오크통 수십 개가 쿵! 쿵! 쿵! 떨어지더니 시몬과 좀비집사를 향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비탈길도 아닌 평지에서 점점 더 속도가 가속되고 있었다. “깔리면 끝장이야!” [천천히 우회하면서 도주하겠습니다.] 좀비집사는 시몬을 업은 채 자유자재로 이동했다. 거대한 오크통들이 서로 부딪히며 굉음을 토해냈지만 그는 침착하게 굴러떨어지는 오크통들의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피하고 있었다. “집사! 앞!” 까득. 이번엔 오크통 두 개가 서로 달라붙은 채로 내려와 틈새로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좀비집사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깨물더니 바닥에 대고 주우욱 훑었다. 바닥에 하얀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특수 좀비 언데드인 ‘백귀’가 튀어나와 오크통을 받아냈다. 콰콰콱! 백귀가 버티는 사이, 좀비집사가 백귀의 등을 올라타고 뛰어내렸다. [아까 말했듯,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경쾌한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오크통 사이를 빠져나가며 말했다. [일단 물러나서…….] 쾅! 바로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옆에 굴러가던 오크통이 스스로 깨지더니 그 안에서 아락무라드가 튀어나왔다. 시몬의 눈이 부릅떠졌다. ‘오크통 속에 숨어 있었어?’ “이 아저씨를 따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초록색 혈관으로 휘감긴 그의 주먹이, 집사에게 업힌 시몬의 머리를 향해 내질러졌다. “오산이야.” 스릉-! 그의 주먹이 시몬의 머리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하얀 검광이 번뜩이고, 아락무라드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굴러다녔다.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피어!” [크하하하하! 방심했구나!] 쿠우우웅! 피어가 고공에서 단숨에 내려와 바닥에 착지했다. 머리를 잃은 아락무라드의 몸뚱이가 쓰러지자 주위의 오크통들이 모두 사탕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방금은 위험했지 않나! 군단장을 똑바로 지켜라. 집사!] [그건 이쪽이 할 말입니다! 그를 보호하는 건 7군단인 당신이 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시몬이 집사의 등에서 내려와 두 팔을 벌렸다. 피어의 몸이 허공에 분해되더니 시몬의 몸에 착착 달라붙으며 다시 ‘피온’으로 돌아왔다. 저벅저벅 걸어가 바닥에 꽂혀 있는 파멸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말해두지만.” 시몬이 입꼬리를 올렸다. “쓰러뜨리지 못할 적은 없어, 집사.” [계속 싸울 겁니까?] “물론이야. 여기서 녀석을 놓치면 앞으로 번거롭고 귀찮은 적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 군단의 여력을 총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몬의 눈이 번뜩였다. “아락무라드는 지금 여기서 잡는다.” *** 같은 시각. 로레인이 지휘하는 무리들도 결계 밖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 집요하게 방해하던 1왕자와 2왕자도 이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촬영을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들까지 몰려왔기 때문이다. 왕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대신들의 안색이 새까맣게 변했다. “로레인 사령관님!” 그때 펜타모니엄의 학자가 다가왔다. “회색벽에 일시적으로 구멍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레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사람도 통과할 수 있을까요?” “당장 사람 한 명을 통과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 크기의 작은 물체 정도는…….” 작은 쟁반 하나 정도 되는 크기.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찰용 옵저버 아티팩트를 결계 내부로 보내겠어요. 사람들이 무사한지, 벽 내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예!” 작업은 바로 시작되었고, 간신히 만든 좁은 틈 사이로 비행이 가능한 옵저버 아티팩트를 밀어 넣었다. 약 세 차례 옵저버가 파괴되는 시행착오 끝에. “네 번째 옵저버 진입 성공했습니다!” 로레인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을 보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원군을 부를지 고민하는 본부 직원들, 특종을 기다리는 기자들, 가족이 벨하이츠에 있는 주민들, 국왕 부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바라는 왕자들까지. ‘……시몬.’ 그리고 시몬을 걱정하는 로레인이 화면을 응시했다. 이내 옵저버가 벽 내부의 광경을 화면으로 출력하는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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