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94화 [우후훗! 소녀가 제일 먼저 왔답니다, 군단장님!] 에르제베트가 거미줄로 결사의 일원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으며 말했다. [신나! 오랜만에 날뛰니 재밌어!] 프린스가 낄낄 웃으며 주먹을 내렸다. 그의 주먹이 향했던 방향에는 결사의 일원이 벽에 꽂힌 채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들이 말을 안 들어먹어서 피곤했어, 꼬맹아.] 이목구비가 달린 지팡이, 헤르세바가 결사의 일원을 모래로 단단히 구속해 두었다. [알라제. 합류 성공.] 그 옆에는 로브를 걸친 살덩이, 알라제가 촉수로 정신을 잃은 결사 한 명을 붙들고 있었고. [삐융!] 어린 라미아도 시몬의 머리 위로 올라와 울음소리를 냈다. 이들 전원이 에이션트 언데드이거나, 그와 같은 수준의 역량을 가진 최상위 언데드들. 국왕은 놀랐는지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집사는 안 왔네.’ 시몬은 아쉬운 듯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뒤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국왕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국왕 폐하.] 시몬이 팔을 가슴에 붙인 뒤, 샤헤드 왕국의 예를 취했다. [7군단의 군단장입니다. 네프티스 님의 명에 따라 벨하이츠를 해방하러 왔습니다.] “!!” 국왕의 낯빛이 새까맣게 변했다. “배, 배신의 군단장……!” [네.] 시몬이 팔을 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와 함께 밖으로 나가시죠.] “…….” 국왕의 입술이 한 차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상당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인상을 쓰며 침음을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라리 나는 여기서 죽음을 택하겠소.” [?] “암흑연합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규칙, 배신의 죄는 결코 사라지 않소. 배신의 군단 사태로 나는 내 형제를 잃었고, 국민들은 가족을 잃었소.” 다 죽어가던 국왕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배신의 군단에 은혜를 입는 수치를 당하진 않겠소.” […….] 시몬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고, 뒤에 있는 다른 에이션트 언데드의 안광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국왕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고집 가득한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밖에서 흙 가져올까?] [조용히 하세요, 프린스.] 시몬이 다시금 입을 떼려는 그때. 타닷. 옆에 있던 왕비가 무서운 기세로 걸어오더니. 짜아악! 냅다 제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손바닥 소리가 꽤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기에 시몬도 놀랐다. 국왕이 벌게진 제 뺨을 붙잡았다. “부, 부인?” “어리석은 남편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군단장.” 왕비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시몬은 그녀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사실상 지금의 샤헤드 왕국을 이끄는 인물, 실력과 현명함을 갖춘 여걸.’ 일반적으로 국왕이 피랍당한 사태에서는 국왕을 구하라고 하지, 굳이 명령서에서까지 ‘국왕 부부’를 구하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실상 본인의 남편을 국왕으로 세운 장본인. 본인이 직접 군림하지 않은 건 샤헤드의 지방 세력들이 여왕을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아서일 뿐, 샤헤드의 모든 정책은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 부인! 어찌 이러시오!” “조용히 하세요.” 왕비가 싸늘한 눈으로 제 남편을 노려보았다. “일국의 왕이 어찌 이리 그릇이 좁으십니까? 밖을 보세요. 군단이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들은 물론, 왕국의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어요!” 그녀가 시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제 국민과 남편을 구해주세요.” “그것만큼은 아니 될 말이오!” 이번만큼은 아내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 국왕은 왕비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모든 이들은 몰라도 배신의 군단은 아니 되오! 죽은 내 형님과 국민들을 볼 면목이 없소!” “그럼 지금 죽게 생긴 국민들과 그의 가족은 볼 면목이 있구요?” 이 와중에 난데없이 부부 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죽음을 원하십니까.]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국왕이 굳은 얼굴로 시몬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것이 명예로운 죽음이라면 기꺼이.” [잘됐군요. 밖에 있는 두 아드님도 그리되기를 원하고 있을 겁니다.] 국왕 부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에르제베트가 얼른 다가왔다. [구, 군단장님?] ‘괜찮아. 에르제.’ 시몬은 사념으로 자신이 아직 냉정하다는 사실을 알린 뒤 말을 이었다. [벌써 왕자들끼리 누가 왕이 될지 논하고 있더군요. 제가 두 분을 구하려 벨하이츠로 향하겠다고 하니, 형제들은 각각 돈으로 매수하거나, 힘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국왕 부부의 말수가 급격히 사라졌다. [두 분이 결사에게 살해당하면 샤헤드는 지독한 내전에 휘말릴 겁니다. 나라는 황폐해질 테고 백성들은 혼란에 빠지겠죠. 그게 바로 결사가 원하는 바일 겁니다.] 한때, 수업 시간에 바힐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결사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혼란’을 원한다는 사실이죠. 시몬은 그 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결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고, 어떻게든 당신들을 구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 폐하께서 여기서 죽음을 택하시겠다는 건.] 시몬이 싸늘하게 말했다. [결사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일이며, 명예롭지도 않을 겁니다.] 그 짧은 몇 마디가 오가는 동안, 국왕은 수십 년은 늙은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분위기와 맥락상,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으리라. [다만.] 시몬이 목에 걸고 있던 왕가의 문장을 내밀었다. [결사의 의도대로 놀아나지 않으려는 자제분도 한 명 있더군요.] “!!” 국왕이 떨리는 손으로 문장을 받아 들었다. 왕비가 옆으로 다가와 살폈다. “하녀에게 맡긴 물건이 아니에요! 이건 틀림없이 우리 셋째의…….” [말을 줄이겠습니다. 이제 어떻게 처신하는 게 나라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지-] 시몬이 눈을 감았다. [신중히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국왕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국의 왕이 은인에게 저지른 추태를 용서해 주시오. 내 삶이 고되고 힘들어서 자칫 쉬운 길을 걸으려 할 뻔했소.” 그가 묵묵히 고개 숙였다. 물론 고개를 숙이되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게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 기회를 준다면, 샤헤드는 왕국의 모든 내력을 쏟아부어 결사를 뿌리 뽑는 데 전념할 것이오. 또한 7군단은 왕국의 영원한 동맹으로 삼겠소.” [군단에 대해서는 왕국 사람들과 논하십시오. 다만 결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판단은 동의합니다.] 국왕 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여기서-] 말을 이으려던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창밖이 온통 녹색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이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주위를 뒤덮으며 별궁이 통째로 폭발하며 무너져 내렸다. 새들이 푸드덕 날아다니며 주위가 온통 일그러졌다. “음.” 그리고 폭발과 조금 떨어진 곳. 옆 저택의 지붕에 걸터앉아 오른팔을 들어 올린 코트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그가 손을 내려서 제 턱을 슥슥 긁었다. “이 아저씨를 빼고 이야기를 속행하려는 건 곤란해. 군단장. 우리끼리 할 말도 남았잖아.” 쿠구구구구구구— 완전히 폐허가 된 별궁에는 여전히 연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옆 건물로 피신한 시몬과 에이션트 언데드들. 그리고 에르제베트의 거미줄에 휘감긴 국왕 부부가 보였다. 스릉!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앞세웠다. [에르제, 책임지고 두 분을 보호해 줘.] [알겠사와요!] 프린스와 헤르세바, 라미아가 시몬의 앞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아락무라드가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불며 두 손을 들었다. [딱 봐도 엄청 강해 보이는데? 군단장은 좋겠어, 저런 괴물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말야.]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때 시몬의 고개가 위로 갔다. 지붕에 태연히 앉아 있는 아락무라드의 뒤로, 똑같이 생긴 아락무라드 세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셋은 각각 다른 종류의 사물들을 하늘 위로 끊임없이 창조해 내고 있었다. 중간에 아락무라드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러니 머릿수를 맞춰야겠지?] 지켜보던 시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분신 따위가 아니야. 저들 하나하나가 아까 상대했던 아락무라드와 동등한 화력을 갖고 있어. 이게 말이 돼?’ “결사 대 군단. 어느 쪽이 이길지-” 뒤쪽의 세 아락무라드가 팔을 휘두르는 것으로, 거대한 녹색 폭격이 시작됐다. “승부해 보자고.” *** 같은 시각. 시몬의 본 아머를 차려입은 톨이 어두운 지하 시설을 슬금슬금 기어다니고 있었다. ‘여, 여기까지 들어올 생각은 없었는데.’ 그는 다른 은거지의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시몬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잡화점 주인 베르틴 아저씨 알지? 그 아저씨가 옆 저택에 숨었던 사람들이랑 같이 붙잡혀서 끌려갔어! 생존자들에게 또 다른 실험 기지로 의심되는 시설을 제보받았고, 톨은 에르제베트의 송장거미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키릭! 키릭! 앞서가던 송장거미가 슬쩍 톨을 바라보더니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흔들었다. 톨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는 겁먹지 않았습니다 거미님! 계속 가시죠!” 키릭! 새로운 지점을 찾았다면 군단에게 알리고 병력을 요청해서 쓸어버리면 된다. 그 뒤에 사람들을 구출해야 한다. 톨이 사명감을 불태우며 좁은 길목을 기어가고 있는 그때. -살려줘! 제발 살려주십쇼!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톨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눈치챘다. ‘자, 잡화점 베르틴 아저씨!’ 톨이 소리가 들린 곳을 가리켰고, 송장거미도 몸을 들썩이며 긍정을 표했다. 둘은 잽싸게 기어서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보았다. 쿵! 굳은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옆은 결사의 일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베르틴도 저 안에 갇힌 것 같았다. 안에서 철문을 쿵쿵! 내려치며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결사의 일원 한 명은 그런 소리를 무시하며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시작해.” 그리고. 철문 너머에서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온갖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톨은 너무 겁먹은 나머지 입을 틀어막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분명 감염체를 만드는 곳이야! 이런 곳에 들어오다니!’ 빠져나가야 했지만, 그는 공포로 몸이 굳어지는 바람에 구석에 박힌 채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방에서 고통에 겨운 소리가 사라졌다. “열어라.” 덜컹! 문이 열린다. 이내 결사의 일원들이 방금 자신이 처넣은 사람들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기 시작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뚜벅 뚜벅. 지켜보던 톨의 눈이 부릅떠졌다. 문밖으로 나온 건 감염체가 아니었다. 같은 얼굴의 남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 몸으로 변하는 게 더럽게 아프네. 어우, 이놈의 세상이 문제야. 세상이.” “으으, 속 매스껍다.” “서두르자고. 배신의 군단이 움직이고 있어.”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여러 아락무라드가 걸어 나가는 모습을. 어둠 속에서 톨의 눈동자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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