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60화 모항제(毛港祭). 다소 특이한 이름의 이 축제는, 매년 이맘때마다 하늘섬에서 열리는 신성한 의식이다. 늘 그렇듯 경전에 근거한 축제이며, 경전의 등장인물들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던 일대기를 행사 의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항제의 주인공은, 막 하늘성에 입성한 에프넬의 선발생 10명이다. ‘무슨 연극장 배우가 된 것 같네.’ 시몬은 길다란 천 한 장으로 된 옷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어깨와 목에는 붉은 휘장을 둘렀고, 머리엔 화관을 썼다. 고전적인 옛날 복식이다. 과거 선교사 사무엘의 복장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들었는데, 선발생 전원이 이러고 있으니 수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한 것 같다. “아, 유클리드 님!” 탈의실에서 9번 리사라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레몬색 머리카락과 머리에 쓴 화관이 무척 잘 어울렸다. 요정 같은 느낌이다.시몬의 앞에 다가온 그녀가 화관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뭐, 뭔가 어색하죠?” “아냐, 잘 어울려.” 시몬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 말에 리사라가 귀 끝까지 빨개져 있는데, 지나가던 여학생 둘이 그 대화를 듣고는 깜짝 놀라며 수군거렸다. “어머, 유클리드 님이래!” “몇 단계나 건너뛴 거야.” “?” 시몬이 고개를 갸우뚱했고, 얼굴이 더더욱 붉어진 리사라가 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그럼 오늘 축제, 다 같이 힘내보죠옷!” 그러고는 후다닥 도망쳤다. 시몬이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새끼.” 갑자기 옆에서 어깨를 확 감싸는 손길이 느껴진다. “겉으론 말쑥한 척하면서 뒤로는 다 후리고 다녔잖아? 그럴 줄 알았다니까.” 시몬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스웨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넌 역시 나랑 같은 부류야. 처음 본 순간부터 직감했지.” 요즘 왜 이렇게 자신을 ‘동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는 걸까. 시몬은 어깨로 그를 툭 밀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여긴 드높은 하늘섬이야. 위대한 어머니께서 굽어보시는 식견으로 말미암아, 상스러운 표현은 삼가줬으면 하는데.” “에이 씨.” 스웨이가 징그러운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질색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가 그러니까 X나 안 어울린다.” 그 말이 맞기는 했다. 네크로맨서니까 말이다. “아무튼, 넌 외부 출신이라 이쪽 문화를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조언 하나 해줄까?” 스웨이가 다시 시몬의 목에 팔을 둘렀다. “중등부에서 올라온 여사제들은 친근함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달라. 널 예시로 들면 유클리드 사제님, 유클리드 형제님, 유클리드 님, 마지막으로 유클리드. 뒤로 갈수록 친한 사이지.” “아.” “즉 남들 보는데 대놓고 9번이 널 ‘유클리드 님’이라고 불렀다는 건.” 스웨이의 눈썹이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넌 내 거다. 라는 공표지.” “……대단한 정보 알려줘서 고맙네.” “이런 작은 디테일이 중요해. 나는 초면이든 구면이든 여자라면 무조건 이름으로 부르거든. 그럼 하나같이 뿅 가더라고.” 그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낄낄댔다. “날 특별하게 대해준다는 것 같다던가? 이런 착각은 활용하기에 아주 유용하지.” ‘죽었으면 좋겠다.’ 체질적으로 죽어도 안 맞는 사람이 있다. 시몬에게는 스웨이가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이 좋아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친한 척하는 걸까. “스웨이 님!” 그때 선발 여학생 한 명이 스웨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웨이가 그녀에게 눈짓을 보낸 뒤, 시몬을 돌아보았다. “그럼 먼저 가본다. 참, 오늘 축제 끝나고 여자들이랑 에프넬에서 찐하게 한잔할 건데, 생각 있으면 와.” 시몬이 두 손을 경건히 모으며 말했다. “제안은 감사하오나, 여신께서 가라사대 욕망을 멸시하고 신실의 탑을 쌓으라 하시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스웨이 사제님.” “X나 안 어울린다니까.” 스웨이가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며 떠나갔다. 이내 선발 여학생과 스웨이의 대화 소리가 작게나마 들렸다. -아, 스웨이 님! 유클리드 사제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그분 좀 꺼림직한 느낌이던데. -뭘 모르네! 유클리드 저 새끼 X나 재밌어. 나중에 같이 이야기해 봐. 사실상 선발생들의 실세인 스웨이가 자신을 좋게 봐주고 영향력을 끼쳐주는 건 좋은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시몬의 입장에선 그와 퍽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결코 레테에게 작업을 걸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니다. “라우스! 형제 자매 여러분!” 문이 벌컥 열리며 에프넬 학생회의 3학년 리리넷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이번 ‘모항제’! 즐길 준비 됐죠?” “네!” 선발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스웨이 형제님?” 선발생들을 쭉 훑어보던 리리넷이 스웨이를 지목했다. 그러고는 옷을 추스르라는 동작을 취했다. “몸 좋은 거 알겠으니까 옷 좀 잠가요.” 스웨이가 혀를 차며 옷을 추스리면서도 한마디 했다. “하늘섬 주민들의 복지를 이렇게 훼손하는 건 일종의 죄악 아니겠습니까.” 진짜 미친놈인가.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하며 스웨이를 바라보았고, 리리넷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그 복지는 제 미모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다들 출발!” *** 탈의실 밖으로 나와 시몬과 선발생들이 향한 곳은, 하늘섬 수로의 첫 시작점이었다. 수로의 앞에는 모피가 깔린 높은 연단이 준비되어 있었고, 거리에는 하늘섬의 무수한 환영 인파가 몰려와서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성연방의 신실한 성도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연단 위에 서 있는 사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축제 당일, 여신께서 축복하시어 맑고 화창한 날씨를 내려주셨습니다! 자, 소개드리지요. 미래의 에프넬을 이끌어 나갈 10명의 선발생들입니다!” 와아아아아! 커다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시몬을 비롯한 선발생 10명이 연단으로 걸어 올라왔다. 주위를 둘러본 시몬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엄청 큰 축제였구나.’ 에프넬의 신인 예배회는 하늘섬의 여러 행사나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모항제가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다. 모항제는 지난 몇백 년간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고 한다. 리리넷이 다급히 말했다. “자, 다들 미소! 미소! 준비한 대로만 해요!” 이렇게 많은 관중의 시선을 받으면 주눅 들 법도 했지만, 선발생들 모두 환하게 웃음 지으며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하하하하!” 신이 나서 옷 앞섶을 다시 풀어헤친 스웨이가 두 팔을 번쩍 들며 앞으로 나왔다. 관중들이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 멀리 리리넷의 한숨이 또 깊어지고 있었다. “위대한 여신께서 선교사들에게 가로되, 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가르침을 전파하고 우민들을 일깨울 것을 이야기하시니, 이는 빛의 명령이라. 선교사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나이 지긋한 사제가 경전 구절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 중에,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메릴!’ 선발생들의 대표, 1번 메릴이 커다란 깃발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메릴은 다른 선발생들과는 달리 어깨에 망토를 둘렀고, 더 호화로운 화관을 썼다. 깃발에는 눈부신 신성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하얀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잠깐만.’ 시몬이 메릴의 깃발을 눈으로 훑었다. ‘저 깃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 시몬의 데스나이트가 생전에 쓰던 아티팩트인 ‘필야의 깃발’이었다. 현재는 전설이 된 민중의 성녀가 워낙 유명하니 그것을 재현한 모양. 이내 메릴이 다가와서 연단의 제단에 깃발을 꽂은 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쥐어 기도를 올리자 제단에 하얀 불꽃이 솟구쳤다. “민중의 상징과 하늘의 상징이 만나 기적을 일으킵니다! 위대한 어머님이 오늘도 성스러운 포교를 허가하셨습니다!” 연단의 프리스트가 두 팔을 벌렸다. “선지자들이여! 빛의 뜻을 받들어 출항하라!” 시몬을 비롯한 선발생들이 하나둘 연단에서 내려와 수로에 떠 있는 나룻배 위에 한 명씩 올라탔다. 이내 모두가 비켜서고, 선단의 선장으로 추대된 1번 메릴도 배 위에 올라타 제일 앞으로 왔다. “출항하라!” 시몬은 내심 안도했다. 메릴은 신수학 시간에서 패배한 뒤 계속 의기소침한 모습이라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 축제로 자신감을 제대로 회복한 모습이다. 두 팔을 흔들고 있는 메릴의 모습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감이 느껴졌다. -나 너무 행복해! 선발 1번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동시에 그런 결연한 마음가짐도 느껴진다. 그렇게 축제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 커다란 탑 위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저 친구로군요.” 그 정체는 이번 유클리드 사태의 총책임자인 신성연방의 총무주교였다. 그녀는 탑 위에서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성녀님께서 사적인 루트로 고용한 수사관을 죽은 유클리드로 변장시키다니,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저벅 저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테가 성의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총무주교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불만이라도 있슴까?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면서요.” “불만이 있을 리가요.” 총무주교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또한 이 사건이 해결되길 누구보다 바라는 입장입니다. 살인자를 찾아서 잡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기행도 얼마든지 눈감아 드리지요. 다만.” 그녀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혹여나 사건 해결 외의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닌지, 작은 우려가 듭니다.” 레테가 픽 웃었다. “아, 우려? 계시를 받은 성녀를 이쪽에서 먼저 찾아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임까?” “레테 성녀님께서는 나긋하게 돌려 말하는 화술을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좋게 좋게 돌려 말해도 처알아듣질 못하니까, 니들 귓구멍에 때려 박으려고 이러는 거 아님까.” 웃는 얼굴로 악설을 내뱉은 레테의 눈에 별빛이 번쩍였다. “이 정신이 나간 상황을 이렇게 기를 쓰고 은폐하는 당신네들의 행적이 더 우려스러워요. 혹시나 그 살인자가 당신네들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님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총무주교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팔을 크게 뻗어 창밖을 가리켰다. “보시지요.”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제 ‘항해’가 시작된다. 나룻배에 올라탄 선발생들이 노를 저으며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수로를 나아가고 있다. 만인이 감격하고 기도하고 웃으며 손뼉을 치고 있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 행복이 계속되리라는 믿음. 주민들도, 선발생들도, 다들 전부 즐겁고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게 아닐까요?” “댁들의 개똥철학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 레테가 등을 돌려 걸어갔다. “거짓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그냥 거짓일 뿐임다.” *** 시몬에게는 완전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그 위에 꽃잎이 떠다니는 아름다운 하늘섬의 수로. 그곳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노를 젓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조각구름이 뜬 하늘 아래로 꽃잎과 종이폭죽이 떨어지고 있다. 수로의 좌우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환호하는 중이다. “어서 와요 학생! 공부가 힘들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와요!” “열심히 수련해서 연방을 이끄는 진정한 선교사가 되길 바라겠소!” 하늘섬의 주민들은 수로의 물가에 꽃잎을 띄우고, 정성껏 준비한 꽃다발을 배에 올리며 선발생들을 극진히 환영했다. 선발생들은 감격에 찬 표정이었다. 몇몇은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시몬도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다른 동기들을 관찰했다. 선발생들은 각자 축제를 즐기는 방법도 달랐다. “언니! 나도 언니 같은 프리스트가 될 거야!” “응!” 9번 리사라는 배를 타고 가다가 아이들과 소통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밤 저녁종이 세 번 치는 시간에 자빌의 주점. 무슨 말인지 알지?” 스웨이는 축제를 치르는 중에도 여자가 보이면 작업을 걸어댔다. 그리고. “내가! 내가 1등으로 도착할 거야!” 메릴은 미친 듯이 노를 저으며 제일 먼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건 경쟁이 아니라 수로에서 진행하는 일종의 퍼레이드였는데 경주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메릴은 에프넬이 아니라 키젠에 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적응 엄청 잘할 것 같은데.’ 그런 시시한 잡생각을 하며 시몬이 웃고 있는 그때. “………….” 그의 뒤에서 노를 저으며 예리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선발생이 한 명 있었다. 사건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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