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49화 레테가 파자마 차림으로 방문했다. 그녀는 자기 집 안방인 것처럼 태연히 걸어가더니, 시몬의 침대에 걸터앉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있었어요?” 시몬이 쓰게 웃었다. “너무 당연하게 들어와서 당혹스러운데, 걸리면 큰일 나지 않아?” “안 걸리면 그만이죠.” 그녀가 엣헴 하고 팔짱을 꼈다. “오늘은 예배회 첫날이니까, 일은 잘하고 있는지 보고나 들으러 왔슴다.” “아, 우연이네! 나도 방금 오늘 알아본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었어.” 시몬이 수첩을 꺼내 들었다. “유클리드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해 봤는데,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줄래?” “좋아요.” 시몬이 수첩 내용을 제일 첫장으로 되돌린 뒤 입을 열었다. “일주일 전, 에프넬의 선발생 10명은 ‘신인 예배회’에 참가하기 위해 하늘섬에 올라와 숙소에 대기했다. 그들이 숙소 매원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 정도. 그리고 피해자 유클리드는 중등부에서 올라온 게 아니라 외부에서 선발된 학생이니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방에서 보냈다.” “그렇슴다.” “그리고 선발 학생들이 매원에 들어온 둘째 날에 이 안에 성녀가 있다는 계시가 내려졌고, 바로 그다음날에 살인 사건이 발생했어.” 수첩을 읽어가던 시몬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예배회가 재개된 오늘, 내가 유클리드로 분장해 모두에게 얼굴을 보인 순간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이 세 명 있었어.” <1번 메릴> <3번 마리첼로> <4번 베르시> “살인자만이 유클리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유클리드가 멀쩡히 돌아왔으니 얼굴에 확실히 감정이 드러났을 거라고 생각해. 이 세 명을 위주로 접근해 보려고.” “뭐, 그놈도 사람 죽여놓고 천연덕스럽게 수업을 듣고 있는 철면피니 표정 변화가 없었을 가능성도 고려는 해봐야 함다.” 레테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용의자를 좁히는 게 아니라, 그 셋을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선발생 전원을 용의자로 둔 채 움직여야겠죠.” “그렇겠네.” “오늘 그 세 명이랑 이야기해 보셨슴까?”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첫날이라 중요한 힌트는 얻지 못했어. 다들 데면데면하기도 하고. 초면인 나를 대하는 게 조심스럽더라고.” “네, 뭐. 당연하겠죠. 중등부 선생들에게 달달 볶여서 이성 손도 못 잡아본 프리스트들이 많을 검다.” 그렇게 말한 레테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리리넷에게 이야기해서 ‘1일 1우수성사’를 필수과제로 만들면 도움이 되겠슴까?” 시몬이 손뼉을 짝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럼 나도 훨씬 쉽게 사람들한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무조건 하루에 한 번 이상, 우수성사를 하거나 들어주기. 다음 날 아침에 검사하도록 시키겠슴다.” 시몬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에프넬에서 현역 성녀가 조력자니 이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사도 좋지만, 몸조심하세요.” 레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살인자가 당신을 ‘가짜’라고 생각할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해치려 들지도 모름다.” “그렇게 해주면 오히려 편하지.” 시몬이 기지개를 쭉 켰다. “내가 당할 리가 없잖아? 바로 역으로 살인자를 붙잡고 사건 해결이야.”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거든요? 여기선 칠흑도 못 쓰면서.” 레테가 툴툴거렸다. “무엇보다 당신의 정체가 들키게 되면 최악의 경우, 당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검다.” “물론이야. 주의할게.” “매사에 프리스트답게. 철저히 프리스트의 마인드로 지내야 함다. 특히 우수성사를 하면 살인자가 이런저런 걸로 떠볼지도 모르니까 더 철저해야겠죠.” 거기까지 말한 레테가 음-하고 입술에 손끝을 올린 채 뭔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좋은 생각이 났슴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뭘 하나 싶어서 시몬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맨바닥에 다소곳하게 꿇어앉고는 흘러내리는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야말로 그림처럼 우아한 모습이다. “시몬?” 이내 레테가 눈가를 둥글게 휘며 자신의 앞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겼다. “여기. 여기 와서 앉아봐요.” “……왠지 엄마가 설교할 것 같은 분위기라 무서운데.” “빨랑 와서 꿇어. 이 새끼야.” 시몬은 하는 수 없이 레테를 마주 보고 똑같은 자세로 꿇어앉았다. 레테가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말했다. “저도 에프넬 선발생 출신이니까 경험이 있거든요. 지금부터 우수성사 연습을 하겠슴다.” 일방적으로 선언한 그녀가 두 손을 시몬의 앞으로 향한 채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잡아요.” “……아, 응.” 시몬이 주춤주춤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포갰다. 하얗고 가느다란 레테의 손이 시몬의 손에 가볍게 덮였다. 갑자기 주위가 더워지는 것 같다.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눈 감아요.” “으, 응.” “감았죠? 자, 그럼 우수성사를 시작할게요.” 레테가 이상적인 성녀를 연기할 때 주로 쓰는 청아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유클리드 사제님?” “네, 성녀님.” “여신의 이름 앞에서 죄와 잘못을 낱낱이 거짓 없이 고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좋아요. 그럼 질문이에요.” 레테의 입이 열렸다. “이번 신인 예배회에서 상당히 들떠 보이시던데요. 잠시라도 사적이고 부정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으신가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시몬이 작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레테. 이건 우수성사가 아니라 심문…….” 꽈아악. 레테가 어느새 한 손을 내려 시몬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시몬은 통증에 오만상을 쓰며 입을 다물고 허우적거렸지만, 레테는 천연덕스럽게 다시 시몬과 손을 맞대고 재차 물었다. “잠시라도 사적이고 부정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으신가요?” “…….” 시몬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있습니다.” 꽈아악! 이번에는 맞잡은 레테의 손에 힘이 빡 들어갔다. 시몬은 손이 아픈 걸 느끼며 속으로 외쳤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그 죄를 위대한 여신 앞에서 낱낱이 드러내야겠네요. 어떤 마음이었죠?” 무슨 말을 하든 혼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시몬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 “수사에 집중해야 하는데, 예배회의 수업 커리큘럼을 듣는 동안 욕심이 생겼습니다.” 눈을 감고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맞잡은 레테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학생으로서의 욕심이었습니다. 전 지금보다 신성을 더 잘 다루고 싶습니다.” 최근에 현장에서 유독 많이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네크로맨서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도 의외로 신성을 쓸 일이 꽤 있었다. 시몬에게 있어 신성은 일발 역전의 한 수이자, 강력한 비밀 무기였다. 그리고 현재 시몬은 성녀의 정수의 잔재들을 손에 넣은 뒤, 다루는 신성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상황. 하지만 기본적인 기술 외에 제대로 다루고 가공하는 방법을 몰랐다. 약간의 가르침이나 노하우가 생긴다면 훨씬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성에 대한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칠흑과 피와 신성을 결합하는 ‘혼돈’의 신기술. 순수하게 칠흑과 신성만을 섞어 기적을 만들어내는 ‘보이드(Void)’에 대한 힌트까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사가 본분이지만 학생으로서도 집중하려 하는 건 조금.” 시몬이 눈을 떴다. “이기적인 생각일까요?” 어느새 레테 또한 잡고 있던 손을 제 무릎에 올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빤히 시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를 처하고 앉았네요.” “응?” “기왕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이 기회에 당신의 신성도 강화해야죠! 당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누가 뭐래도 이쪽임다. 네크로맨서로만 대성하려고 했어요? 안나 선생님이 물려준 힘은 힘도 아님까?” 그녀가 주먹으로 얍얍 시몬의 가슴을 때리는 시늉을 한 뒤 말했다. “목표도 세워야겠죠? 이번 예배회 기간 동안 최고 성적을 올려서 선발 1번을 따내요.” “……!” 시몬의 입이 벌어졌다. “그래도 돼?” “문제없슴다. 어차피 당신은 제가 선임한 비밀수사관 신분이에요. 이번 사건이 종결되면 돌아갈 테고 바뀐 번호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레테가 검지를 척 세웠다. “선발 1번을 따내면, 내가 뭐든지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요.” “뭐든지?” “그럼요.” 그러곤 레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대신 못 따면 당신이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지.” “불공평해.” “쫄았슴까?” “……해. 해.” 시몬이 울컥하며 말했다. 레테가 푸훗 웃었다. “자, 그럼 그렇게 됐으니 경전 상식이나 조금 더 공부해 볼까요?” *** 달칵. 문을 열고 시몬의 방에서 레테가 빠져나왔다. 조용히 방 안으로 손을 흔든 레테가 신성을 휘감아 존재감을 지운 채 걸어갔다. 이내 그녀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는 가운데. “…….” 흐릿한 몸의 누군가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신인 예배회 2일 차. 선발생이 모두 모인 아침 종례 시간에, 학생회 소속의 리리넷은 ‘우수성사’의 새로운 룰에 관해서 설명했다. 첫째 날에 아무도 우수성사를 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어서 실망했고, 그래서 이렇게라도 시켜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더 높은 신앙은 ‘같은 신도와의 교류’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리리넷의 말에, 학생들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에프넬에서 ‘신앙’은 절대적인 이유였으니까. 그렇게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게 됐다. 시몬은 선발 학생들과 함께 수업 장소인 근처의 기숙사 앞 마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색하다.’ 시몬은 눈만 굴리고 있었다. 다들 중등부에서 올라왔고, 외부에서 차출된 인원은 단 두 명뿐이었다. 다들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학교의 첫 수업에 빠졌다가, 둘째 날에 오니 자기들끼리 이미 친해져 있는 걸 본 기분이다.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제대로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이럴 때는 딕의 친화력이 부럽네.’ 시몬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차출된 9번, 리사라. 그녀는 이미 다른 여학생 한 명과 친해졌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친구를 못 사귀면 9번인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는데 실패다. 시몬이 어색한 공기 속에서 걷고 있는 그때. “오늘도 잘해보자고, 10번.” 갑자기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는 게 느껴진다. 심문청장 레이트의 아들, 2번 스웨이가 히죽 웃고 있었다. ‘하필이면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이 녀석이라니.’ 시몬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웃었다. “그, 그래.” “스웨이! 오늘 저녁에 밖에 나갈 거야?” 다른 한 학생의 물음에 스웨이의 관심은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시몬은 속으로 안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첫 수업은 야외 수업. 테이블과 책상이 놓여 있었고 오늘 수업을 담당할 일일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우스! 형제자매 여러분!” 보통은 3학년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가르치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에프넬 내 급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호밀리라고 합니다. 편하게 호밀리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오늘은 여러분의 신성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어요. 학생들마다 신성의 종류와 성향이 틀리니 자신의 신성이 어떤 종류의 신성인지 아는 게 중요해요.” 그녀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 신성의 성질을 알면, 어떤 전공을 선택하는 게 유리할지 알 수 있겠죠?” “네!” “가벼운 이론 수업 이후, 여러분이 직접 신성을 일으켜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어요.” 신성. 시몬의 눈이 빛났다. ‘수사를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적어도 최소한의 관심은 필요해.’ 언제까지 혼자 다닐 순 없다. 이 수업에서 슬쩍 실력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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