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44화 그동안 몇 번이나 신성연방에 들락날락했더니, 시몬은 이제 국경 넘기의 장인이 되어 있었다. 산을 타고 레스힐의 옆 영지인 ‘호브’로 이동. 호브에서 브로커를 만나고 짐마차에 올라탄 뒤, 상단에 섞여서 암흑연합에서 중립지대로, 중립지대에서 신성연방으로 이동한다. 칠흑을 감지하는 ‘신성의 문’을 넘을 때는 프리스트로 변해서 통과. 모든 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휴우, 햇빛이 그리웠어.’ 그렇게 창고 건물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시몬은 짐칸에 있느라 굳어진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후덥지근한 열기와 함께, 특유의 향신로 냄새가 나는 이곳은 신성연방이다. 스읍. 하아아—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유의 세상. 모험의 냄새가 난다. 절그럭 절그럭. ‘아차.’ 저 옆에 이단 심문관이 고문기구를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 또한 신성연방에서만 볼 수 있는 적나라한 광경. 괜히 눈치를 본 시몬은 머리에 덮은 로브를 더더욱 눌러썼다. 그러곤 품속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쪽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엄마가 가보라고 한 곳이 이 근방이었지?’ 프리스트들의 학교, 에프넬이 있는 하늘섬까지 가는 건 쉽지 않은 여정이다. 우선 자신을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안나의 말에 따르면, 이 지역 근교에 결사의 짓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이상현상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태의 수습을 지휘하고 있는 ‘책임자’가 바로, 시몬이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이제 숙련된 모험가처럼 중립지대 근처에서 환전한 뒤, 신성연방의 화폐인 1만 블랑을 내고 마차로 이동했다. 근교 지역이었으니 도착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달려서 마차에서 내리니, 눈앞에 괴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거구나.’ 중소규모 정도의 도시. 그 도시의 가운데 경계선이 그어진 듯, 반은 멀쩡한 도시의 모습이었고 나머지 반은 모든 게 고운 보라색 모래로 변해 있었다. 마치 자줏빛 사막과도 같은 모습이다. ‘저주? 아니면 결사의 기술일까? 어느 쪽이건 악랄하네.’ 사태가 사태인 만큼 근처에는 신성연방의 경비가 삼엄했다. 무장한 병사들과 프리스트들이 주위를 오가며 지키고 있었다. ‘그럼 어떤 핑계를 대고 안으로 들어갈까.’ 시몬이 팔짱을 끼며 고민에 잠겨 있는 그때. “어떤 용무로 오셨나요?” 바로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시몬은 등줄기에 소름이 쭈우욱 돋는 것을 느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경계하고 있었는데,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상당한 강자인 게 틀림없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보리 색상의 로브를 입은 여성 프리스트가 서 있었다. 머리에 눌러쓴 후드 아래로 웃는 입매만 보인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지만, 시몬은 애써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 근방에 큰 이상현상이 벌어졌다고 해서, 호기심에 잠깐 와봤습니다.” 후드 아래의 입술이 열리며 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호기심은 좋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답니다. 다들 결사가 일으킨 참사로 예민해져 있거든요. 괜히 돌아다니다가 책잡히면 이단 심문관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요.” “…충고 감사합니다.” 프리스트의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서성거리는 발걸음을 보니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두근 두근. 시몬의 심장이 긴장감으로 뛰었다. 이 사람, 자신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프리스트가 먼저 로브의 후드를 붙잡더니 머리 위로 끌어 올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혹시 그 사람이-” 윤기 넘치는 긴 바다색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내려와 어깨에 맞닿았다. 갸름한 얼굴과 자애로운 미소. 무엇보다 굳게 감은 눈. “저는 아닌가요?” 시몬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손이 감격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스라필 이모!” 시몬이 달려들어 자신보다 머리가 하나 큰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 이스라필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보고 바로 달려와 준 조카의 모습이 감명 깊었던 걸까. 차분하던 그녀의 표정이 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두 뺨은 빨갛게 물들었다.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우리 조카!” 그녀도 반갑게 시몬의 몸을 꽈악 끌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한참을 부둥켜안은 채 재회의 감격을 만끽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분, 이스라필 성녀님 맞지?” “그, 그러게. 맞는 것 같은데.” 늘 이스라필을 곁에서 호위하던 팔라딘이 그 모습을 보고는, 다소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조카를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있는 이스라필의 얼굴은 더없는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 안나의 서류상 자매이자, 그녀가 가졌던 성녀의 정수를 물려받은 진정한 후계자. 숱한 전쟁과 참극을 막아낸 신성연방 내 온건파의 거두이자 평화의 상징. 신해의 성녀, 이스라필 크로스. “많이 먹어요, 우리 조카.” 그러나 여기서는 가감 없는 조카 바보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식당 하나를 통째로 빌리더니, 이곳에 있는 최고로 비싼 음식을 전부 주문해서 테이블에 한가득 쌓아놨다. “나는 안나 언니처럼 요리를 잘하지 못해서…… 이렇게 해줄 수밖에 없네요.” 포크를 든 시몬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크로스 가문은 원래 다 이런 걸까?’ 이상한 부분에서 안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시몬이었다. “감사히 잘 먹을게요 이모! 아, 그런데 저를 어떻게 딱 발견하신 거예요?” “후후.” 이스라필이 품속에서 안나의 편지를 꺼내 보였다. “안나 언니가 은밀히 보낸 편지가 조카보다 먼저 도착했답니다. 조카가 이 근방에 올 거라고 언니가 알려줬거든요.” “아하.” “그래서 근처에 산책하러 나가던 중에, 마침 딱 조카 또래의 남자아이를 발견한 거죠!” “타이밍이 좋았네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녀는 편지를 받자마자 너무 흥분해서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틀 내내 길가에서 미친 사람처럼 서성거리며 오매불망 시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만큼은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이스라필이었다. “많이 먹어요.” 그녀가 깍지 낀 두 손 위에 턱을 올린 채, 생글생글 웃었다. “이스라필 이모는 안 드세요?” “저는 조카가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답니다.” 그러다 시몬이 두 스푼 이상 먹은 음식을 보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버섯절임이 입에 맞나 보네요! 주방장님! 여기 버섯절임 한 그릇 더!” ‘……살려주세요.’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먹은 뒤, 식당 요리사들도 모두 가게에서 물린 두 사람은 본론을 이야기했다. “사정은 들었어요. 우리 레테를 도우러 하늘섬에 간다고요?” “네.” 이스라필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레테에게 정말 큰 힘이 되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성녀들이 다들 바빠서, 에프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 아이가 전담하고 있답니다.” 시몬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자세한 건 하늘섬에서 레테에게 직접 듣게 되겠지만, 굵직한 갈래만 지금 말해줄게요.” 이스라필의 감은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신성연방의 성녀가 살해당했습니다.” “!!” 시작부터 너무 큰 이슈라 머리가 멍해졌다. “어떤 성녀가 살해당했는지 밝힐 수 없음을 용서하세요. 연방에서는 민중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있지만, 점점 진실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시몬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 성녀분이 죽은 건 혹시 결사의 소행일까요?” 최근에 암흑연합에서도 3대 네크로맨서 학교의 총장이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글쎄요. 아직 속 시원히 밝혀진 바가 없답니다. 저도 결사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다른 세력, 혹은 다른 성녀들의 짓일 가능성도 고려해야겠네요. 무엇이 진실이든, 교황청에서는 필사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고요.” 역시 신성연방도 정치나 모략이 살벌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암흑연합의 키젠 내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의 정체를 떠나, 지금 당장 모두의 눈앞에 닥친 문제는 하나.” 넓은 식당 안에 바람이 휘돌며 이스라필의 앞머리가 휘날렸다. “성녀의 정수가 다음 성녀를 찾아 대륙을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렇겠네요.” “새로운 성녀 후보를 먼저 찾아내서 모시기 위한 각 세력의 물밑 작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현재 성녀가 나타날 곳으로 가장 유력한 장소는 하늘섬의 에프넬, 그리고 성녀의 사망 이후 하늘섬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 사건들. 레테는 바로 그 혼란한 사건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과연. 레테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눈에 훤히 보였다. 괜히 편지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었다. 잠시 숨을 돌리듯, 이스라필이 살짝 화제를 돌렸다. “최근에 암흑연합도 결사 사태로 큰 홍역을 치렀다고 들었어요.” “네, 신성연방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정보를 차단하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뿐, 신성연방은 거짓과 이상으로 구축된 허영의 제국이에요.” 이스라필이 두 손으로 시몬의 손을 붙잡았다. “암흑연합은 큰 시련이 와도 흔들릴지언정 다시 자리를 잡겠지만, 신성연방은 달라요. 너무나 강성한 체계와 경직된 사회망이 갖춰져 있으니 한번 흔들리면 뿌리가 송두리째 뽑힐 거예요.” “……뿌리.” “그럴 때마다 역사적으로 신성연방이 택하던 전략이 무엇인지 아나요?” 그녀의 감은 눈꼬리가 슬프게 아래로 내려갔다. “전쟁이에요. 외부로 시선을 돌려 내부의 단합과 결속을 꾀하는 거죠. 벌써 연방에서는 결사와 암흑연합을 동일한 ‘이단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답니다.” “전쟁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네, 어서 이 혼란을 바로잡고, 흔들리는 제국에 최소한의 안정을 부여해야만 해요.” 결사의 목적은 혼란. 혼란은 신성연방의 기틀을 흔들고, 이는 연방이 전쟁이라는 최악의 수를 두도록 종용하고 있다. “제게 맡기세요.”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하늘섬으로 가서 레테를 돕겠습니다.” “레테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시몬이 필요한 일일 테니까요.” “아, 결사에 의한 살인이라면 역시 네크로맨서가…….” “물론.” 그녀가 미소 지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 바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스라필은 이틀 만에 준비한 가짜 신분을 시몬에게 제공하였고, 그밖에도 하늘섬에서 의심받을 때를 대비한 이스라필의 지장이 찍힌 소개서, 그리고 하늘섬으로 가는 열차표까지 준비해 주었다. 문제는 얼굴이었는데, 아무리 프리스트들이 이단인 네크로맨서 쪽 인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제 시몬은 키젠의 학생회장이었다. 하늘섬에 올라가면 십중팔구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필은 인식 장애 마법이 내장된 아티팩트를 사용하라고 권했지만, 시몬은 이번엔 새로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리 나와, 알라제. 이번에 새롭게 얻은 새로운 에이션트 언데드 알라제. 그는 세포 조작이 가능한 언데드였다. -알라제. 변신 기능 보유. 에르제베트의 거미줄. 비가 오면 녹아내려서 무용지물. 하지만 알라제의 능력. 단백질을 기반으로 튼튼한 가짜 얼굴 제작 가능. 최근에 7군단에 들어온 알라제는 자신의 쓰임새를 인정받기 위함인지, 에르제베트와 비교하면서까지 자신의 능력을 어필했다. 그는 시몬의 얼굴에 덮어쓸 수 있는 얼굴 가죽을 체내에서 재조립하여 만들어주었는데, 언데드의 몸에서 나왔지만 신성에 반응하지 않는 단백질 덩어리였다. 이것을 얼굴에 가볍게 쓰고 거울을 보니,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시몬의 기존 얼굴에서 살짝만 달라진 모습, 지인들이 봐도 ‘저 사람 시몬 폴렌티아 아닌가?’ 하고 돌아보다가 시몬을 닮은 사람일 뿐이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의 차이였다. 시몬은 꽤 만족했다. 그렇게 이스라필의 큰 도움을 받고 헤어진 뒤, 시몬은 신성열차를 탔다. ‘이 열차도 오랜만이네.’ 이스라필은 1등석을 예약해 주었다. 프리스트 신분으로 위장한 시몬은 하얀 로브 차림으로 좌석에 앉은 채 경전을 꺼내 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단 심문을 받거나 했을 때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더 디테일 부분까지 예절이나 전통을 공부해 둘 필요가 있었다. ‘레테.’ 시몬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금방 그쪽으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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