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43화 방학을 맞아 고향 레스힐에 돌아왔다.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안나가 힘을 쓴 건지,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호화로운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많이 먹으렴 아들.” “잘 먹겠습니다!” 키젠에서 먹는 식사도 맛있지만, 역시 안나의 가정식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맛과 정취가 있었다. “시몬, 왔느냐.” 마침 리처드도 시몬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영지 일을 일찍 끝내고 집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폴렌티아 가문이 모두 모였다.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몬은 학생회장이니, 군단장이니 하는 무거운 것들은 모두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이야기하니 리처드와 안나도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식사를 다 마치고는 아버지 리처드와 산책을 나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솔길을 걷다가,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레스힐 영지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리고 아버지께 군단 이야기를 드리는 건 조금 조심스럽지만요…….” “?” “이 이야기는 꼭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리처드나 피어나, 서로를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만나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리처드 또한 시몬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먼저 군단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피어도 방학이 되면 자신의 분신을 회수하곤 했다. 불편한 관계. 하지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시몬은 작은 상자를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지?” “이번 5군단과의 전투에서…….” 시몬이 고개를 숙였다. “아케뮤스의 코어가 부서졌습니다.” 달칵. 리처드는 상자를 열었다. 아케뮤스가 차고 다니던 팔찌, 그리고 검은 깃털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리처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랬구나.” 리처드는 한참을 말없이 붉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길고 긴 정적 끝에, 비로소 그의 입이 열렸다. “내게는 분에 겨운 수하였다. 아케뮤스의 충정에 나는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했지.” “…….” 리처드가 시몬을 돌아보았다. “언젠가는 너도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도록 해라.” “마치.” 시몬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에 엄청 놀았던 것처럼요?” “네 엄마가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구나.” 나란히 앉은 부자가 서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이내 리처드가 상자 안에 든 깃털을 들어서 날렸다. 바람에 흔들리며 검은 깃털이 날아가는 모습을, 두 사람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 저기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오자꾸나.” 리처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엄마가 아까보다 더 많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거다. 살아남으려면 먹었던 걸 소화시켜야지.” 시몬도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 리처드의 말이 정답이었다. 점심 식사에 이어, 저녁도 폭식이다. “시몬! 오늘은 입맛이 별로 없니? 평소보다 적게 먹는 것 같은데.” 안나는 걱정스럽게 제 아들의 얼굴을 살피면서도 양손에는 커다란 당근파이를 들고 있었다. 시몬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뜨거워서 그래요! 너무 맛있어요 엄마!“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는 안나의 모습에, 시몬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늘 식사도 힘겹게 먹어치운 시몬은 터덜터덜 나무 계단을 올라 방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들어온 내 방. 안나가 미리 깔끔하게 치워둔 건지 먼지 하나 없었다. 부른 배를 부여잡은 시몬이 침대에 털썩 누워서 창가를 바라보았다. 배도 부르고 이 뒤의 특별한 일정도 없다. 극도의 편안함과 행복감이 느껴진다. ‘아.’ 시몬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방의 창문으로 신선한 밤바람이 불어오며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정식으로 제안할게, 키젠으로 오렴. 저 창가에서 네프티스를 만났다. 바로 그 만남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는 당신이 이쪽으로 넘어올 차례인 거 알죠? 편지해요, 시몬! 그리고 또 한 사람. 같이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레테. 에프넬을 가출해서 시몬의 집에 놀러 왔던 그녀도 저 창가에서 작별했었다. ‘……편지.’ 시몬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편지는 주고받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보내던 편지가 끊겼다. 편지가 끊긴 건 결사의 대혼란 사태 무렵. 암흑연합뿐만 아니라 신성연방에도 심각한 사태가 연달아 터졌다고 하니 이해는 됐다. 레테는 현역 성녀고, 키젠의 학생회장인 자신보다 훨씬 더 바쁠 테니까. ‘레테는 잘 있을까? 다친 곳은 없겠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몬이 애써 이불을 붙잡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똑똑. 문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몬, 자니? 안나의 목소리였다. 시몬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 아직 안 자요 엄마! 그런데 이제 디저트는 괜찮…….” 달칵. 안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작은 등을 들고 있었다. 시몬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네가 오면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 그녀가 손에서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시몬의 눈이 커졌다. “이건…….” “레테가 네게 보낸 거란다.” 그녀가 말했다. “그 아이는 편지를 계속 보낸 것 같은데, 답장이 안 와서 서운해하는 눈치였어.” 침대에 앉아 있던 시몬이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저도 보냈는데 레테 쪽에서 답장이……!” 거기까지 말한 시몬이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은 국경을 오가는 긴밀한 우편 루트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역시 결사 사태 이후에는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무튼.” 안나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냉랭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여린 아이니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잘 달래주렴.” “아, 알았어요! 엄마!” 어쩐지 부끄러워진 시몬이 얼굴을 붉히며 일어났다. “이제 저 잘게요!” “알았어. 알았어. 나갈게.” 안나가 오호호 웃으며 시몬에 떠밀리듯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뒤 시몬이 숨죽인 채 귀를 대고 있자, 그녀가 삐걱삐걱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요.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과일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면 간식? -……말을 건 내가 잘못했네.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던 시몬이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짓고는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 이내 이불 안으로 들어가 편지를 뜯으려 했다. ‘응?’ 편지가 열리지 않았다. 레테가 손수 건 봉인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 편지를 힘으로 뜯으려 할 때마다 편지 전체가 찢어질 것처럼 웅웅 떨렸다. ‘하여간.’ 픽 웃은 시몬이 눈을 감고 후읍 심호흡을 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화아아아아악-! 눈부신 신성이 시몬의 방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머리가 솟구치며 이마가 드러나고, 뒤집어쓴 이불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시몬은 그 상태에서 봉투의 앞면에 신성을 불어넣었다. 잘그락. 잘그락. 그러자 신성 마법진이 거짓말처럼 풀려 나가며 사라졌다. 시몬은 가볍게 안도한 뒤 편지의 봉인을 뜯고 봉투를 꺼냈다. ‘평소엔 다른 네크로맨서들에게 걸릴 수 있으니까 이런 장치는 안 해뒀는데.’ 시몬이 긴장한 얼굴로 봉투를 펼치고 내용을 읽었다. “……!”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얼어붙었다. *** 신성연방. 하늘섬. “…….” 비좁고 어두운 골목.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하는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깨끗하고 밝은 옷차림의 소녀가 서 있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녀는 피 묻은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목격자는?” 입술이 벌어지며, 믿기 힘들 만큼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만 그 음성은 다소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송구하지만, 목격자는 없습니다. 성녀님.” 현장에 있던 갑주 차림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소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이마를 쓸어내렸다. “이런 흔적은 위대한 여신의 뜻이라 사료됩니다.” 현장에 미리 와 있던 한 노인이 말했다. “이자가 왜 죽어야 했을까요. 여신은 전능하십니다. 죽음이란 즉 여신의 필요에 의한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찮은 생물로서의 특성에서 발로된 미련일까요. 중요한 건 왜 여신께서 이자의 죽음을 눈감으셨냐는 겁니다.” “신앙이 부족했겠죠.” “우리 신앙 사회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살해 현장을 신학으로 분석하려는 사람들. 그런 바보들이 위에 앉아 있고, 그런 바보들을 신앙심이 거룩하다며 만인이 존경하는 곳. 그곳이 에프넬이다. 하늘에 떠 있는 이 섬은 바보들의 천국이다. “성녀시여. 이 현장을 어떻게 바라보시는……” “실례할게요, 여러분.” 별의 성녀, 레테. 황금색 눈동자에서 찬란한 별빛을 일으킨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그녀의 말에 모든 자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녀 또한 교복 스커트 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뒤 등을 돌려 걸어갔다. 호위 담당인 팔라딘들이 얼른 따라붙었다. “저희가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먼저 돌아가십쇼.” “예? 하오나…….” 레테가 웃었다. “오늘은 혼자 걷고 싶어서요. 여신의 계시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을 들은 팔라딘들이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물러났다. 그제야 자유가 된 레테가 으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다니까.” 괜히 에잇 하고 근처의 돌을 발로 찬 그녀가, 교복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불량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그러다 고개를 뒤로 꺾고 그동안 참았던 목소리를 냈다. “아-!” 스트레스가 쌓인다. 에프넬 재학생 중 유일한 성녀인 레테는 이제 3학년 학생회장이 됐다. 하필이면 자신이 학교를 책임져야 할 시점에, 결사 사태를 비롯한 온갖 뒤숭숭한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좀 굴러가는 사람들은 다들 밖에서 결사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학교에는 멍청이들만 남았다. 이러나저러나 레테의 부담만 커져가고 있었다. “……안나 선생님 보고 싶다.” 요즘 이 말이 입버릇처럼 붙어버렸다. 가끔 하는 이 말을 들은 동기가 ‘안나 선생님이 누구예요?’라고 묻기에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기록이 말소됐지만 혹시나 성녀 ‘안나 크로스’를 떠올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했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몇몇 사람들이 레테를 발견하고는 감격에 울먹이거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난리를 쳤지만 익숙하다. 성녀로서의 의무를 빠르게 마친 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기숙사 방 앞에 도착했다. 주위가 조용해지니 마음이 편했다. 똑똑. 룸메이트인 리리넷이 있을지도 모르니 노크를 했다. 없는 것 같아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피곤했다. 일단 교복 위에 걸친 성의부터 벗어 던진 뒤 자신의 책상 위 서랍으로 걸어갔다. 후읍.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이곳부터 확인하는 건 일종의 루틴. 아무것도 없을 걸 알면서도 긴장하게 된다. 왜 이럴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하니까. 알면서도 긴장한 채 팔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 당연히 텅텅 비어 있다. 편지 같은 건 없다. 뭘 기대했냐는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며 서랍을 닫은 뒤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으러 거울로 다가가는데. “또 편지 와 있는지 확인했죠?” 거울 너머로 리리넷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레테가 이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놀랐잖슴까, 리리넷!” “우히히, 가벼운 장난 장난! 놀랐죠?” 이불 밑에 조용히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리리넷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레테 성녀님, 잘 웃지도 않고 늘 무표정이잖아요! 너무 일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아서 살짝 분위기 전환 삼아 장난 좀 쳐봤어요!” “당신 허리도 분위기 전환으로 분질러 줄까?” “……죄송합니다!” 리리넷이 얼른 사죄의 의미로 엎드렸다. 레테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은 뒤 다시 거울을 보고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그러고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물음을 툭 던졌다. “편지를 전해주는 노파분, 오늘도 안 오셨슴까?” “네, 제가 다 미안하네요. 성녀님 삶의 낙이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님다.” 리리넷이 생글생글 웃었다. “레테 성녀님은 신기하다니까요. 만인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 성녀의 삶! 누구나 꿈꾸는 생활을 하면서도, 정작 성녀님이 행복감을 느끼는 건…… 섬 아래에서 오는 한 남자의 편지! 그리고 방학 때 시골에 놀러 갈 생각뿐!” “야 이 새끼야! 남자 아니라고 했잖아!” 레테가 버럭 소리 질렀다. 리리넷이 히히 웃으며 제 침대에 벌렁 누웠다.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신분상 성녀는 공개 연애 금지인 거 알죠? 적당히 남자 첩들 몇 명 들여서 희희낙락하면 되는…….” “란.” 바로 레테의 성수인 백룡 란이 창밖에서 꼬리를 내밀더니 리리넷을 휘감아 조이기 시작했다. “커헙! 큭! 레테 성녀님……! 자, 자비를……!” “왜 맞을 걸 알면서도 까불거리는 검까, 진짜.” 레테는 한숨을 푹 쉰 뒤 책상에 앉았다. 그래. 이제 그는 키젠의 학생회장이다. 자신은 에프넬의 학생회장이고. 완전히 남남. 아니, 숙적. ‘올 수 있을 리 없지.’ 그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창가를 바라보았다. ***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 “엄마! 아버지!” 커피를 마시던 리처드와 안나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미리 여행 가방을 비롯해 짐을 싸놓은 시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하늘섬’에 다녀오겠습니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