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41화 의외로 기말고사는 좋은 컨디션으로 칠 수 있었다. 시험 직전에 공부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병동에서 실컷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맑았다. 지문을 다 읽기도 전에 출제자의 의도가 보이고 손은 답을 체크하고 있었다. 시몬은 거의 키젠 생활 처음으로, 자신이 생각해도 시험을 잘 쳤다고 느꼈다. 그렇게 기말고사를 치른 뒤에야, 카쟌으로부터 이번 사태의 경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우선 결사의 중앙 연구소는 바힐과 아론의 손에 99% 파괴되었다고 한다. 기습이었고, 워낙 짧은 시간이었기에 모든 걸 파괴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결사에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안긴 건 사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화이트 같은 복제 인간은 나올 염려가 없다. 거기에 대륙을 뒤흔든 문제의 이상 증세 약물도 생산이 끊겼고, 발락 같은 실험체 사태도 없을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 시몬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키젠 본부의 직원이 찾아와서 시몬에게 매그너스 쪽 상황을 물었는데, 시몬은 매그너스가 새로운 몸의 부작용으로 자멸했고 관리자와 함께 던전의 낭떠러지 아래로 빠졌다고 보고했다. 물론 네프티스에게는 제대로 보고했다. ‘7군단이 5군단을 통합했습니다’ 하고. 화이트들은 결사의 눈이 닿지 않는 안전한 장소로 옮겨진 뒤, 펜타모니엄 연구자들 측의 보호를 받으며 남은 수명 동안 편안히 지낼 것이다. 소환학 교수 아론은 그간의 피로에, 이번 전투의 부상까지 더해져서 당분간 긴 요양이 불가피해 보였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시몬은 그의 병문안을 갔는데, 전신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후련했다. “매그너스 알반은 내 첫 번째 직속제자이자, 가장 큰 오점이었다.” 아론이 눈을 감았다.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을 네게 맡기는 식이 되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교수님.” 시몬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과 함께 만든 본 드래곤이 없었더라면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전부 교수님 덕분입니다!” 아론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창밖의 먼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좋은 교육자로는 남지 못하겠지.” 시몬이 눈을 빛내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영원히 좋은 교수님으로 남을 거예요. 가르침에 늘 감사드립니다!” 아론은 여전히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방학 잘 보내도록. 사고는 치지 말고.” “네!” *** 이전 전쟁에서 희생된 아케뮤스의 장례 예식도 단출하게 치렀다. 피어는 언데드에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이건 시몬의 고집이었다. 비명의 정글에서 그를 묻은 뒤, 향을 피웠다. 그리고 장례 내내 시몬이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피어가 다가와 말했다. [언데드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존재라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미 죽은 존재다, 소년! 하늘이 두 쪽 나도 생자가 될 수 없지.] “네, 그건 알지만…….” [그런 언데드에게 중요한 건 마지막이다. 어떻게 끝낼 것인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피어의 동공에 푸르스름한 불똥이 튀었다. [아케뮤스는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했다.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지. 그것은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워할 일이지, 슬퍼할 일이 아니다. 네 지금의 행동들은 네크로맨서답지 않다는 뜻이다.] ‘…….’ [넋을 달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오늘까지. 너는 다음으로 가야 한다. 아케뮤스도 그리하길 바랄 것이다.] 피어와 아케뮤스는 거의 ‘천년 지기’이자 서로가 서로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동지였다. 하지만 말하는 것만 보면 피어는 아케뮤스의 소멸에 덤덤해 보였다. 그런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피어의 마지막 말만큼은 동의했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주군. 이제는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아케뮤스도 그리하길 바랄 것이란 사실을. 시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피어의 말대로 흔들리는 건 오늘까지만 할게요. 가죠.” 아케뮤스가 만든 스컬윙 부대는 이번에 들어온 5군단의 에이션트 부대에 통합될 것이다. 언데드에게 끝은 없다. 시몬은 마음을 다잡은 뒤, 로크섬으로 돌아갔다. *** 학교 일정도 거의 다 끝났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종업식까지 4~5일 정도 남았다. 어떻게 보면 키젠에서 가장 마음 놓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기간이다. 로체스트의 모든 주점과 식당이 미어터졌고, 학생들은 성적 고민은 잠시 잊고 미친 듯이 뛰어놀았다. 이 기간만큼은 교수들이나 숲을 지키는 파수꾼들도 그들의 일탈을 눈감아주는 게 관례였다. 학기 말이기도 하니 시몬 일행도 오랜만에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문제는 로체스트의 어떤 가게든 예약이 꽉 차 있다는 점이었다. 키젠 생활 최고의 황금기를 이렇게 허무하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모두가 안달복달하고 있는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한 사람이 있었다. -지몬! 제 별장이 비어 있으니 친구들을 초대해저 자유롭게 쓰제요! 마투학 교수 홍펭이었다. 그녀는 시몬에게 외부 별장을 통으로 빌려주었고, 시몬은 오겠다는 친구들을 전부 초대했다. 학생회 멤버들, 소환학과 친구들, 돌연변이 동아리 멤버들, 1학년 A반 친구들, 그 외에 편히 알고 지냈던 여러 학생들까지. 거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이 모였다. 교수의 허가를 받았으니 거칠 것도 없었다. 로크섬의 바다가 보이는 그림 같은 별장에 다 같이 모여 커다란 테이블을 세팅하고 모닥불을 다섯 개나 피워서 바비큐 파티를 즐겼다. 술과 음식의 향연. 분위기는 너무 빨리 무르익었다. “얘들아아! 다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거 알지?” 최근 마음고생이 심했던 전 A반 반장 제이미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메이린의 말에 따르면 심기일전해서 이번 기말고사는 잘 쳤다고. 그래서인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나 키젠 학생이어서 너무너무 행복하고! 훌쩍! 무엇보다 이 섬에서 너희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너무너무 행복해. 우리 나중에 졸업해도 평생 같이 보는 거다? 알았지?” “당연하지! 바보야!” 눈물은 빠르게 전염됐다. 메이린과 클라우디아가 서로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피츠제럴드와 와인 잔을 부딪힌 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애들은 이해가 안 돼. 이 좋은 날에 왜 우는 거지?”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여성은 슬픈 상황에서 감정을 전달해 주는 신경세포의 활동이 남성보다 여덟 배 이상 많고 또한 눈물의 분비를 돕는 호르몬이 3배 이상 많다는 내용을 책에서 읽었다. 그리고…….” 듣다못한 신디 디바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니들이 없는 거야.” “왜 시비냐!” “응? 주어를 뺐는데 어떻게 알아들었어?” 시끌벅적한 파티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시몬과 로레인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로레인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중앙 연구소에서의 이야기를 들은 로레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는 무사하고?” “응.”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아쉽네. 살아남은 5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들은 어떻게 됐어?” “모두 피어의 유적에 들어와 있어.” “잘 회수했다니 다행이야. 무엇보다…….” 로레인이 시몬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네가 무사한 게 무엇보다 다행이야.” 시몬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고개를 돌린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고, 고마워. 로레인.” “어머나. 실례할게요.” 어느새 사복 차림의 세르네가 불쑥 나타나 시몬의 옆자리에 여우처럼 앉았다. 로레인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세르네는 훗 하고 비웃음을 흘리는 걸로 응수했다. “내가 조금 늦었네요. 요즘 좀 바빠서.” “어서 와, 세르네.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웠어.” “우후후.” 세르네가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야 시몬이 ‘나한테만’ 한 부탁이니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덕분에 재밌는 경험을 해서 좋았네요.” 로레인의 표정이 더더욱 싸늘해졌다. 갑자기 일어난 냉전 분위기에, 중간에 낀 시몬이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자, 동기 여러분! 주목해 주십셔!” 딕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 팔을 뻗었다. “시작하자마자 부어라 마셔라 근본 없는 파티였지만 할 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주최자이자 호스트! 우리들의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 님이 한 말씀 하시겠답니다!” 오오오! 와아아아아아!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시몬이 무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그러다 딕을 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딕이 히죽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조장! 이거 받아!” 에슈가 건네준 와인 잔을 받은 시몬이 입을 열었다. “올해도 이제 거의 다 끝나가네. 믿을 수 없는 1년이었고, 내가 살아온 평생에 최고로 알찬 1년이었어.” 나도오오오! 술에 취한 제이미가 삑사리를 내며 호응했다. 주위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돌이켜 보면 전부 지금의 우리를 만든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 이제 곧 방학이 시작되고, 그 방학이 끝나면 3학년이야. 3학년부터 우리는 학생 신분을 넘어서 진짜 키젠의 ‘전력’이 된다고 해.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질 거야.” 시몬이 잔을 들어 올렸다. “학생회장으로서 너희들은 내가 끝까지 지킬 거야. 좋은 학교를 만들도록 노력할 테니, 앞으로도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와우우우우우우!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시몬이 씩 웃으며 선창했다. “공부는-!” 모두가 웃으며 외쳤다. “다음 해에!” 예에에에에에에!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올해 마지막, 2학년으로서 로크섬에서의 나날이 저물고 있었다. *** 달콤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몬도 이 골든데이를 다른 동기들처럼 원없이 즐기고는 싶었지만, 학기 말은 학교의 행사가 집중된 시기였기에 학생회장으로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가 열렸다. -328기 키젠 3학년 여러분의 졸업식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3학년이었던 키젠 328기가 졸업했다. 재학생 대표 시몬은 강단 앞으로 나가, 선배들의 앞날을 위한 문구를 낭독하고 3학년 대표인 레오나드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졸업복을 입은 레오나드는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무척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금빛 배지를 떼서, 시몬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너희 기수가 이끌어 나갈 키젠에 대해 기대가 커. 앞으로 더 좋은 학교로 만들어줘.” “물론입니다, 레오나드 선배님! 졸업 축하드려요.” 시몬을 비롯한 많은 2학년들이 졸업식에 참여해 큰 박수로 3학년들의 졸업을 축하했다. 학과 신고식 사태나 교류전 등 크고 작은 이슈들이 많았지만, 3학년에 대한 악감정은 대부분 발락이 가져간 상태였다. 다들 발락 학생회는 싫어했지만 그냥 평범한 3학년에 대한 악감정은 크게 없긴 했고, 감정이 있었던 사람들도 마지막 순간인 졸업식만큼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제군아!” “벤야 선배님!” 키젠 생활 내내 늘 신세 졌던 벤야와는 한 차례 크게 포옹하기도 했다. 같은 돌연변이 동아리의 피츠제럴드와 토토도 다가와 꽃다발을 건넸다. “뭐야, 제군아. 우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살짝 콧잔등이 시큰하긴 했다. 벤야는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의 후배가 마냥 귀여운 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뒤 웃었다. “나 어디 멀리 가는 거 아냐. 랭거스틴의 바닐라 본사에 있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와.”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제 턱에 손을 얹었다. “이제는 후계자가 아니라 바닐라 그룹의 대표! 벤야 바닐라 되시겠습니다!” “네, 꼭 시간 내서 갈게요!” “응응! 자, 마지막은 다 같이 안아볼까?” 동아리 시즌 동안 이어진 작은 인연. 돌연변이 멤버들이 다 함께 부둥켜안고 미소 지었다. *** 졸업식 이후, 시몬은 1학년 진급심사를 지원하러 갔다. 1학년들은 진급심사를 치러야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는데, 이번 진급심사도 작년처럼 던전에 들어가는 시험이었다. 거의 3주간의 긴 시험 끝에, 악명 높은 삼총사인 특례 1번 사샤, 특례 2번 용병왕 아서, 특례 10번 몰리 공주의 대활약으로 던전주를 파괴하고 시험이 끝났다. 이번 시험의 생존자는 320명. 다행히 시몬이 아는 1학년들은 대부분 합격했다. 그렇게 굵직굵직한 행사들을 해치운 시몬은 이제 피어의 유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학교 일은 물론, 이제 군단장의 일도 처리할 때다. [군단장. 복귀. 환영.] 꾸물꾸물. 그때 유적에서 살점 하나가 올라오더니 괴물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시몬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알라제. 좀비집사는?” [아직 버티고 있다.] 시몬이 쩝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서 이야기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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