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10화 시몬은 함께 천년향의 왕도로 향할 동행자를 찾아 나섰다. 믿을 수 있고, 든든한 인물. 무엇보다 위험에 빠져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시몬은 주위 하수인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카쟌!” 잿빛 머리에 눈 밑으로 긴 흉터가 보이는 남자. 시몬이 선택한 건 1년 유급생인 카쟌 에드발트였다. 늑대가 쪼그린 것처럼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시몬, 무슨 일이지?”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서요!” 시몬은 카쟌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결사가 천년향에 접촉할 거라는 정보, 류운이 붙잡혔다는 사실, 그리고 제인이 동행자를 함께 데려가라고 지시한 것까지. 하지만 카쟌은 고개를 저었다. “제인 교수님이 말한 조건이 ‘세 과목을 이수한 학생’이라면, 나는 갈 수 없겠군.” “네? 왜요?” -크오오옷! -끄윽! 이곳은 아보의 혈류학과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자신의 피를 이용해 호문쿨루스를 대체하는 간이 꼭두각시 인형을 제작하는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이 만든 꼭두각시들 모두 흐느적거리며 풀밭에 쓰러지기 바빴다. 카쟌이 피곤한 얼굴로 눈 밑의 흉터를 긁었다. “나는 이제 한 과목 클리어다. 혈류학과의 과제는 빠른 시일 내에 통과하기 힘들 것 같군.” “……아.” 임무에 대해서는 늘 프로페셔널한 카쟌이 이번 동행에 적합해 보였지만, 과제가 난행 중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시몬은 다시 동행자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카쟌과 같은 유급생이자 학생회장급 실력을 갖춘 에이젤이었다. “에이젤 선배님! 아…….”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아직도 홍펭의 공용 과제에 묶여 있었다. 10일이 넘도록 호흡법을 성공하지 못한 3학년들이 열댓 명 정도 남아 있었는데, 전체 4위의 에이젤이 여기에 있다는 건 다소 의외였다. “호흡법! 지작하제요!” 후우우우우우! 홍펭의 지시에 따라, 모든 학생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년향의 마나를 칠흑으로 정제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휘오오오오오오오! 그런데 거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에이젤이 있는 쪽이었는데, 풀밭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고, 칠흑바람계가 형성되어 폭풍처럼 주위에 휘몰아쳤다. ‘……호흡법보다 저게 더 대단하지 않나?’ 시몬이 땀을 삐질 흘리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에이젤이 입을 벌려 바람을 크게 들이마시고 코어를 작동시켰다. 그러나 실패했는지 콜록거리며 부유력을 잃고 풀밭에 떨어지고 말았다. “불합격이에요! 에이젤 학쟁!” 홍펭이 팔을 홱 휘두르며 선언했다. “며, 면목 없습니다.” 에이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이 보기에, 저 정도면 호흡법만 빼고 모든 걸 다할 수 있는 경지였다. 다만 에이젤은 키젠 329기들이 홍펭에게 배운 호흡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 칠흑을 형성하는 타입이었다. 호흡법에는 미숙했다. 그래도 룰은 룰. 홍펭은 호흡법을 익힐 때까지 에이젤을 계속 붙잡아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누굴 데려가야 할까.’ 학생회 멤버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지만 결사와 관련된 일이라 너무 위험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들 두 과목째 도전 중이라 데려갈 수 없었다. 같은 군단장인 헥토르와 메리다도 후보였지만, 헥토르는 자신의 파벌들과 함께 개별적으로 천년향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메리다는 낮잠을 자느라 이제 한 과목 합격한 상태였다. ‘……어떤 상황이든 홀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 일을 끝내고 돌아와도 합숙 과제에 큰 지장이 없는 사람, 그리고 신뢰가 가는 사람.’ 세 가지 조건 모두를 만족하는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나마 그 신뢰라는 조건을 아주 조금만 완화한다면. -우훗. 한 사람이 떠올랐다. * * * 그렇게 시몬이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위의 학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함을 지르는 등 과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가히 유유자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한 모습. 붉고 노란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시몬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머나, 시몬.” 그녀가 여우 같은 눈웃음을 흘리며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웬일로 먼저 와줬네요. 무슨 일이에요?” “안녕 세르네. 바로 본론이라 미안하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세르네는 말없이 돗자리를 탕탕 두들겼다. 시몬이 하는 수 없이 그 옆에 앉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천년향의 왕도로 같이 갈 동료를 찾고 있는 거죠?” 시몬이 흠칫했다.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방법이 있죠.” 휘이이이잉! 마침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상앗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세르네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손끝을 세웠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깃털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손에 가볍게 안착했다. “목적은 결사의 계획 저지, 그리고 붙잡힌 천년향 친구를 탈출시키기. 맞죠?” “다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시몬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와 함께 천년향의 왕도에 가줘.” “맨입으로요?” “…….” 이럴 줄 알았다. 이게 세르네를 조금 늦게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시몬이 한숨을 푸욱 쉬며 말했다. “……그래, 거래하자. 이번 일은 네가 말하던 소원 쿠폰 몇 개로 만족하…….” “그걸로는 안 되죠.” 그녀가 무릎을 모아 앉으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까 쿠폰 모으기를 마냥 기다리는 건 내가 너무 손해인 것 같아요. 미래의 시몬에게 부탁할 권리도 좋지만, 이제 졸업도 가까워졌으니 나도 조금 더 실용적인 대가를 원해요.” “어떤 대가를 원하는데?” 시몬이 긴장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고, 그녀는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이곳 천년향에서 쓸 수 있는 다섯 가지 요청 들어주기.” 시몬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세르네는 늘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조건을 달아줘.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후훗, 좋아요. 그럼 다섯 가지 맞죠?” “두 가지.” “다섯 가지.” 한동안 ‘다섯 가지’, ‘두 가지’의 무한 대치가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시몬이 손을 들고 말했다. “소원 쿠폰 한 장에, 천년향에서는 세 가지 요청으로 하자.” “그렇게 결정!”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희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시몬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 악수도 세 가지 요청 중 하나야?” “화이트랜드에 다녀온 이후로 더 짓궂어졌네요, 시몬.” 그녀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상앗빛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요청은 아니니까 악수를 거절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할게요.” 하지만 시몬은 결국 그녀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세르네는 키가 여학생 또래보다 큰 편이었지만, 의외로 손은 작아서 손안에 가볍게 착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아 참.” 악수를 마친 시몬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동행자는 세 과목을 합격한 사람만 데려갈 수 있어. 그 조건은 충족했지?” “나는 이제 두 과목째예요.” 시몬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세르네가 훗 하고 웃으며 뒷짐을 진 채 걸어갔다. “해결하고 올게요.” 그녀는 지금 하고 있는 사령학과 과제를 수행하러 떠났고. 현재까지 합격자가 0명이던 과제를 30분 만에 해결하고 돌아왔다. * * * 시몬과 세르네는 제인의 허락을 받아낸 뒤, 함께 합숙지에서 벗어났다. 하늘하늘 낙엽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숲을 지나, 강을 건너, 시몬이 류운과 만났던 거대한 나무도 지나쳐 계속 나아갔다. ‘천년향에서 이렇게 먼 곳까지는 처음 와보네.’ 조금은 긴장한 시몬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단풍을 밟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산 아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아래로 초가집들이 가지런히 들어선 이곳은 처음 느껴보는 정겨운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었다. 주위에는 소매가 긴 천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왕도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이 마을은 왜 들렀어요?” 세르네의 물음에 시몬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니까, 여기서 천년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 류운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얻고 싶기도 하고.” “일리가 있네요. 그럼 환상마법을 걸게요.” 시몬과 세르네는 로브를 뒤집어쓴 차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마을에 들어가기엔 눈에 띄었다. 세르네는 능숙하게 로브에 환상마법을 걸어 지나다니는 천년향 사람들과 복장과 비슷한 형태로 바꾸었다. 얼굴도 살짝 변화를 줘서, 이쪽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역시 정신조작과 환상마법에 능한 세르네와 함께하니, 이런 부분은 편했다. ‘좋아.’ 이제 외관상으론 이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몬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용감하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하지만 그 마을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말은 통할 텐데? 안 들리는 건가?’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 이들은 누가 말을 걸어도, 심지어 앞을 가로막아도, 홀린 듯이 본인의 하루 일과만을 묵묵하게 수행했다. 그냥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천년향의 문화가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던 시몬은, 사람들의 동작이 묘하게 부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이들은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물건을 집 앞에 두면, 몇 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와서 그것을 가져갔다. 농부가 이마를 닦은 뒤 손을 뒤로 내민 채 기다리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가 수건과 물통을 내려놓고 지나간다. 모든 동작이 정밀하게 얽혀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서도 서로 부딪히는 일 없이 멍하니 서로를 지나친다. “재밌네요.” 세르네는 어느새 지나가는 아낙네에게 깃털을 날려 꽂아두고 있었다. 시몬이 깜짝 놀라며 말렸다. “세르네! 또 그렇게 함부로 이능으로 사람을 조종하면…….” “조종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한 세르네가 그 아낙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실례할게요!” 세르네가 살갑게 말을 걸었지만, 아낙네는 자기 일을 하기 바빴다. 목덜미에 깃털이 꽂혀 있었지만,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모습. “희로애락, 감정이 거의 없어서 정신지배도 쉽지 않아요. 마치 매일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인형 같아요.” “……매일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고?” 세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우리가 보는 건 수천, 수만 번 반복하고 있는 하루일 뿐이에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느꼈구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시몬은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들의 하루가 촘촘하게 보이는 이유,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균일하고 균등해서 ‘괴리감’마저 느껴지는 이유. 아무런 변화 없이 마을의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 마을만 시간이 다르게 흘러서, 마을의 하루가 계속 되풀이되는 느낌. 마치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거기에 방금 확인해 봤는데 내 이능으로도 기억을 추출할 수가 없네요.”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단조로운 일상을 천 년 가까이 반복하다 보니 쓸 만한 기억은 너무 깊게 묻혀 있어요.” 시몬은 이마를 짚었다. 이런 게 인간이 그토록 소망하던 불로불사를 가진 결과라니. 눈으로 보도고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세르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류운이라는 시몬의 친구도 이랬어요?”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류운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었어.” 흠칫. 흠칫. 그때 주위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류운이라는 말에 반응한 것 같았다.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동작이 삐거덕거리는 모습. ‘왜 이러는 거지?’ 이에 시몬이 가만히 주민들을 지켜보자, 멈칫했던 주민들은 다시금 원래 하던 일을 재개했다. 마치 멈췄던 시간이 한순간에 배속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듯, 멈춰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두 걸음 빨리 걸었고, 삐거덕거리던 농부들도 전보다 더 여러 번 괭이를 내려쳤다. 아주 잠깐 삐걱였던 일상이 아주 빠르게 원상복귀되었다. “방금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공포.” 세르네가 귓속말로 시몬에게 말했다. “당신 친구가 큰 죄를 지어서 잡혀간 게 맞나 보네요.” “…….” 시몬은 류운의 말과 불타는 남자의 말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죽음을 달라는 게 뭐 잘못됐소?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 똑같은 삶! 우린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도 나랏법 때문에 영원히 한 장소에 얽매여 살아가야 하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똑같은 절망감을 그대는 이해하오? -천년향에서, 지역 이탈죄는 중죄다. “류운은 이곳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미래라고 했어.”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지난 세월 동안 살았던 시간이 너무나 길어서, 앞으로 살아갈 세월의 무게를 힘들어하지. 특히 갇혀 살아야 한다는 형벌에 대한 공포가 큰가 봐.” “어머, 흥미롭네요.” 세르네가 입술을 쓸었다. “계속 삶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통제되는 게 문제인 걸까요?” “내 생각은 그래. 1,000년을 살면서 새로운 자극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시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류운 같은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 계속 말을 걸어보는 게…….” “거기!” 시몬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수염이 지긋하게 자라난 한 남자가 다급히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류운이라고 하지 않았소?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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