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36화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의 격전지인 바힐라 영지. 군단장 요나와 기적의 성녀가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이곳은 일명 '봉서 쟁탈전'이 한창인 장소였다. 시몬도 역사서에 수없이 나오는 '봉서'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었다. '100년 전쟁의 후반기는 봉서의 소유권이 핵심이라고 했지.' 봉서는 고대문명의 유물이자 강력한 전술병기로 알려져 있는데, 마지막 권의 존재가 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리고 유물이 파묻혀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가장 유력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바힐라 영지였다. 따라서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은 서로에게 봉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다투어 봉서가 발견될 확률이 높은 지역을 점령한 뒤 유물 발굴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의 발굴지를 빼앗거나, 발굴 작업을 방해하는 등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투가 일어났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시몬은 리처드와 함께 암흑연합의 주력군이 진을 친 야영지로 들어왔다. '와.' 전선의 야영지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거대했다. 균일한 외형의 군막들이 무수히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군막 옆으로는 일꾼들이 봉서를 찾으려 바닥을 파는 모습도 보인다. "이봐, 조심해." 리처드가 시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발에 족쇄를 찬 대형 언데드, 어보미네이션이 쿵쿵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밟혀 죽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어. 통제가 안 되는 언데드들도 있으니까." "아, 네." 확실히 징집된 병사들이나 네크로맨서 외에 언데드들도 상당히 많이 보였다. 아공간에서 꺼내 최종점검 중인 것들이었다. 두 사람은 지나가는 언데드들을 피해 가장 큰 사령부 군막에 도착했다. [크흐흐! 돌아왔나.] 익숙한 목소리에 시몬의 눈이 커졌다. '피어!' 키가 홀쭉하고 망토를 두른 스켈레톤, 무려 과거의 피어였다. 시몬이 아는 피어의 모습과 동일했지만, 풍기는 칠흑이나 로브에 두르고 있는 무기의 가짓수가 달랐다. 리처드의 전성기 시절이라 그런지 상당히 강력해 보였다. "네 끝내주는 연기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 유감이야, 피어." 리처드도 이죽거리며 주먹을 세웠다. 피어가 주먹을 맞부딪히며 말했다. [상대 진영에 뛰어난 책략가가 있나 보군! 이쪽의 기만계나 양동이 전부 막히고 있다!] "쯧. 원래 프리스트 놈들은 상성만 믿고 잔머리는 못 굴리는데." 피어가 고개를 돌려 시몬을 보았다. [이 소년은?]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 시몬은 순간 몸에서 섬찟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할망구가 보낸 감시자." [.......] 피어는 시선을 움직여 시몬이 차고 있는 모래시계 아티팩트를 보았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그렇게 툭 내뱉은 그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갔다. 시몬은 눈을 끔뻑거렸다. '저게 무슨 말이지? 나한테 한 말인가? 아니면.......' "자, 그럼!" 리처드가 시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우린 가볼까? 감시자." "네?" "총사령관한테 할 보고는 알아서 잘 부탁한다." 그가 뒤따라온 부하들에게 말했다. 부하들은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총사령 군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처드는 시몬을 데리고 총사령 군막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어, 어딜 가시는 거예요?" 시몬의 당황한 물음에, 리처드가 히죽 웃었다. "스트레스가 쌓였으니 시원하게 풀어야지." * * * 사령마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리처드가 도착한 곳은 중립지대의 한 도시였다. 이곳은 암흑연합의 통제를 받는 땅이었다. 곳곳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여기서도 봉서의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그리고 리처드가 시몬을 데려온 장소는 다름 아닌. -한잔 거하게 들어간다! -하하하하하! 주점이었다. 그것도 동네 아저씨들이 맥주 마시러 들르는 낡은 동네 주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당한 핫플레이스로 보인다. 세상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병사들은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요나! 어서 오십쇼!" "귀한 군단장께서 이리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군기 따윈 없었다. 병사들은 리처드와 격식 없이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런 장소는 처음 와보는 시몬의 입장에선 문란함의 집합체처럼 보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남녀 서로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너도 한잔해야지!" 어느새 리처드가 맥주잔을 넘기며 말했다. 시몬은 얼른 손을 휘저었다. "괜찮습니다! 임무 중이라......!" "에헤이, 재미없는 자식이 꽁무니에 붙었구만." 리처드는 싫으면 말라는 듯 맥주를 크게 원샷했다. 그러곤 두 팔을 벌리며 후읍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달다!" 이내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라 사람들이 음식을 맥주와 안주를 먹고 있는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앉았다. 맥주가 쏟아지고 바닥이 더러워지면서 난리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낄낄대며 환호했다. "요나 님이 오셨다!" "오늘 날 제대로 잡았군!" 리처드가 화려한 동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던 바드들의 현악기 하나가 빠져나와 그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지지지지징! 그는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다. 아니, 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줄을 튕기며 만돌린 연주를 시작했다. 그 현란한 음색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뒤쪽에서 연주하는 바드들은 '또 시작이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짝! 짝! 짝! 짝! 모든 관중이 그의 연주에 박자를 맞춰 손뼉을 쳤다. 리처드가 만돌린을 연주하며 걷다가 테이블 위에서 바텐더들이 있는 '바'로 걸어갔다. "오늘은 내가 산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폭발 같은 환호성이 들리고, 종소리가 땡땡땡 울렸다. 분위기를 띄운 그가 폭주하듯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는데 주점주인이 킬킬 웃으며 리처드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또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요나." "잘 물어봤어, 오늘 아주 개 같은 일이 있었지." 지지지징! 그가 연주를 마치고 만돌린을 공중으로 던졌다. 언제부턴가 기다리고 있던 스켈레톤이 악기를 붙잡더니, 리처드가 한 파트를 정확히 똑같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기적의 성녀! 그래, 그 여자가 문제야! 승승장구하던 내 커리어에 그 여자가 나타난 뒤로 모든 게 꼬이고 있어!" 그는 다른 악기를 가져와 연주하고 다시 공중으로 띄우기를 반복했다. 스켈레톤들이 착착 악기를 연주했고, 일을 잃은 바드들은 다른 관중들과 같이 손뼉 치는 기계로 전락했다. "이제는 내가 전선에 나타났다 하면 연방에서는 그녀를 보내지. 한번 걸리기만 해봐, 쉽게 죽이진 않아." 하하하하하하! 고성방가가 몰아친다. 악기를 요란하게 등 뒤로 던진 그가 들썩거리며 피아노로 다가왔다. 이어지는 극도로 현란한 피아노 솔로. 고개가 격렬하게 위아래로 흔들리며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사방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고,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거나 혀로 입술을 훑었다. "모두 잔을 들어라!" 대앵! 그가 한 번에 몇 개의 건반을 동시에 내리친 다음, 피아노 의자 위로 벌떡 올라왔다. 이내 스켈레톤의 손이 그에게 와인잔을 건넸다. "기적의 성녀의 죽음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복창하며 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중에서 시몬은 입맛이 쓰려오는 걸 느끼며, 찜찜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은 내가 사니까 다들 시원하게 즐기라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음악은 찐한 멜로 스타일의 음악으로 바뀌고, 이곳저곳에 끼어들어 즐겁게 놀던 리처드는 이제 자신에게 다가온 여성들 중 한 명을 선택했다. 리처드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는데. "잠깐만요!" 더는 지켜볼 수 없던 시몬이 끼어들었다. 리처드가 인상을 구겼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응? 갑자기 뭐야, 너." "당신의 일탈을 막는 게 네프티스 님이 맡기신 제 역할이에요." 시몬이 목에 찬 모래시계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여성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뭐야, 진짜." 여성은 흥이 식었는지 떠나버렸다. 리처드가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리처드의 사나운 시선이 시몬에게로 꽂혔다. "감시자가 아니라 족쇄였나."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전시상황에서, 군단장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곳에서 유흥을 즐기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싸우는 체스말이 아니라 사람이야.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하다고!"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영업하겠습니다!" 마침 절묘한 타이밍에 주점 주인이 클로즈를 선언했다. 리처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걸음을 옮겼고, 시몬도 바로 뒤를 따랐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이 정도였다니. 골치 아프네.' 저벅저벅. 걸어가던 리처드가 시몬을 돌아보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유흥이 문제라면 다른 건 괜찮겠지?" "......네?" 이 사람. 아직도 놀 생각이었다. * * * 신성연방 측의 요새. "주여, 오늘 우리에게 사악한 자들을 정화할 힘을 주옵시고." 안나가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 안나를 필두로 모든 프리스트들이 기도실로 나와서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다리야.' 안나의 시종을 자처한 레테도 계속 꿇어앉아 있느라 다리가 저려왔다. 허벅지를 주먹으로 콩콩 내리친 그녀가 힘겨운 표정으로 안나를 보았다. '안나 선생님이 이 정도로 '바른생활녀'일 줄은.......' 아침부터 잠에 잠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정이 꽉꽉 차 있는 그녀는 마치 신앙에 미처 사는 사람 같았다. 매일 밤 눈을 뜰 수 있어서 감사하고,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뭔 감사할 게 그리 많은지 툭하면 기도를 올렸다. 휘하의 프리스트들도, 성녀가 기도하는데 어찌 자기들만 고개 뻣뻣이 들 수 있겠는가. 다 같이 반강제 기도가 시작되었다. 안나는 취미 같은 것도 없었다. 사생활도 없다. 그녀에겐 오로지 데바 여신과 신앙뿐이었다. 레테는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하아, 이런 안나 선생님을 어떻게 바람둥이 리처드와 이어야 하지?' 그나마 점심시간 식사와 기도가 끝날 즈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레테는 안나가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얼른 가서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안나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자애롭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 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이런 포상을 받으니 위로만 된다. 너무 좋아서 자꾸만 헤실헤실 바보 같은 웃음이 나온다. 저 멀리 이스라필이 살벌하게 노려보며 지나가곤 했다. 그때마다 질투하는 이스라필을 약 올리는 것도 소소한 재미 중 하나였다. "헤헤, 안나 선생님." "또 그 말씀을, 저는 선생님이 아니에요." 안나가 쩔쩔매며 말했다.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어요. 배우고 익히기만 했죠. 제게 그 호칭은 과분하답니다." 무슨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 정도로 이렇게 부끄러워할까. 레테가 슬쩍 손을 들어 면포를 걷자,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소녀가 보였다. 진짜 대륙이 부서질 때까지 꽉 끌어안고 싶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그래도 이젠 슬슬 일을 시작해야 할 때다. 내일 자정에 시몬과 둘이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와 만나기 전에 뭔가 성과를 내고 싶었다. "제가 아는 거라면 얼마든지 답할게요, 레테."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안나가 눈을 끔뻑거렸다. "남자는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을 말한답니다. 성서에서는 한 여성의 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해요." 뭔 답이야, 이게. 당황한 레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막 길거리를 걷다 보면 멋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오잖아요. 키도 훤칠하고, 목에 목젖도 튀어나와 있고, 핏줄도 막 있고...... 그런 근사한 사람은 조금 눈이 가지 않아요?" 안나가 눈을 끔뻑였다. "잘 모르겠네요." 그냥 연애 세포가 증발해 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신전에서 지냈고, 대주교들의 철저한 교육을 받으며 신실한 신도로서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에프넬을 거쳐 성녀가 됐다. 그녀는 이성관계에 대해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레테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이 그 바람둥이 리처드와 그런 일을 벌였다고?' 레테는 방향을 바꾸었다. 안나가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아이와 가정 쪽으로 질문을 돌리기로 했다. "아, 그럼 혹시." 레테는 감시하려는 이스라필이 있는지 휙휙 살피고는 불쑥 물었다. "아이는 갖고 싶으신가요?" "네!" 안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희망의 불이 들어왔다. "황새가 제 아이를 물어다주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가 생긴다면 여신께 감사드리고 열심히 키울 거예요." "......아." 레테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이마를 덮었다. 아무래도. 이쪽이나 저쪽이나 고생길이 눈에 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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