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83화 [……시몬 폴렌티아.] 시몬이 나타나자, 중력마법으로 바닥에 억눌려 있던 헥토르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리치들이 시전하던 중력마법이 불안정해졌다. 헥토르의 의지가 극도로 강해지며, 순수한 완력만으로 중력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상체를 일으킨 헥토르가 입을 벌렸다. [―――――!] 드래곤의 권능 중 하나인 ‘드래곤 피어’가 발동하며, 리치들의 집중력이 순간적으로 흩어졌다. 그사이 중력 범위에서 벗어난 헥토르가 시몬 쪽으로 물러났다. “와줄 줄 알았어, 헥토르.” 시몬이 미소 지었다. “방금은 당하고 있던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한 헥토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큘라와 뮤르를 노려보았다. “내 힘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랬겠지.” 작게 웃음 지은 시몬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빨간색 로브를 둘러쓴 전형적인 흑마법사 같은 외형에, 두 눈에 사악한 동공이 번쩍이는 언데드가 보인다. “반가워 뮤르, 우리 7군단의 골칫덩이. 5군단 다음은 1군단이야? 언제쯤 집에 돌아올래?” 그 말을 들은 뮤르의 눈이 옆으로 더더욱 길게 찢어졌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쓰레기의 아들. 나는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다.] 속박되지 않는다는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시몬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뮤르에게서는 1군단 특유의 칠흑이 느껴지지 않는다. 1군단장이라면 당장에라도 뮤르의 코어를 손에 넣으려 할 줄 알았는데, 군단화하지 않고 내버려둔 모양이었다. “속박되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이런 짓에 가담한 거야?” 그렇게 말한 시몬이 주위의 왕궁이 불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넌 1군단의 명령을 따라 사람을 해치고 있잖아. 우리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내 인내심은 이미 문드러진 지 오래다.] 뮤르의 지팡이에서 칠흑이 거칠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모든 굴레를 끊겠다!] 처억. 레큘라도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 그의 손에 들린 체스 기물은 ‘킹.’ 그것을 앞으로 내밀자. 화아아아아아아아-! 왕궁 전역에서 반딧불들이 번쩍이며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레큘라와 뮤르의 뒤로 1군단의 수백 병사들이 도열했다. 펄럭! 황제의 깃발이 세워진다. 스릉! 척! 달빛을 머금은 검이 반짝인다. 하나하나가 보통의 공격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는, 강력한 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언데드 병사들이었다. 헥토르가 긴 숨을 내뱉으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네놈, 만전의 상태가 아니군. 왜 그 꼴이지?” 시몬이 조용히 답했다. “……이미 구원자랑 한번 싸우고 왔어.” “양동이 있었나.” 상황을 파악하듯 생각에 잠겨 있던 헥토르가 이내 무릎을 굽히고 돌진할 준비를 했다. “내가 레큘라를 소멸시키겠다. 네놈이 뮤르를 맡아라.” “조금만 더 기다려.” 시몬이 빙긋 미소 지었다. “한 명 더 올 거거든.” 삐익. 삑. 삑. 삑. 다소 앙증맞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헥토르가 뒤를 돌아보자 태엽 달린 곰인형 하나가 귀여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처억. 척. 삑. 삑삑. 그러나 잠시 후, 수많은 망령 깃든 인형, 병정 등의 장난감들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끌며, 허공에 둥둥 뜬 채 다가오는 한 소녀. <메리다 오리지널 -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 주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꿈의 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감각. 메리다는 등장한 것만으로도 주위를 자신의 꿈으로 덧입히고 있었다. “안녕.” 머리 위에는 마름모꼴의 티아라를 쓰고, 스피릿 드레스를 입은 메리다가 사뿐히 지상에 착지해 시몬의 옆으로 왔다. “빨리 와줘서 고마워. 메리다.” “별말씀을.” 메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너희 군단들도 오고 있어.” 고오오오오오오! 세간의 별칭으로 불리는 바로는 일명 ‘악의 무리’.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무수한 7군단의 언데드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숫자와, 가장 다양한 종류의 언데드 병력들이 왕궁 전역을 집어삼키듯 쏟아져 들어왔다. “더럽게 늦는군.” 헥토르가 툴툴거렸다. 하늘을 나는 6군단의 부유암벽들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안에 벨른 협곡의 토착종을 기반으로 한 데스 와이번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7군단, 6군단, 4군단. 무려 암흑연합의 세 군단이 1군단을 막기 위해 드레스덴 왕궁에 집결했다. -우우우우우우! -끼릭! 끼이익! 장난감 인형 곳곳에서 레이스, 밴쉬, 팬텀 따위의 망령들이 솟구쳐 올라 비명을 질러댔고. -끼이이이이익! 부유암벽에서 뛰쳐나온 데스 와이번들이 눈을 빛내며 하늘을 뒤덮었으며. -캬아아악! -키에에에에에! 시몬이 팔을 들어 올리자 7군단의 언데드들이 서로의 몸을 쌓고 쌓으며 거대한 파도를 이룬 채 검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포효했다. 가히 압도적인 광경. 국가가 아닌 개인으로서, 움직임이 자유로운 군대를 소유할 수 있는 암흑연합의 여섯뿐인 존재. 누구라도 이 풍경 앞에 서 있다면 전의가 꺾일 것 같은 대군의 위압이었다. “너희 1군단은 암흑연합의 규칙을 어지럽히고 왕궁을 짓밟았다. 우리 3개 군단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어.” 시몬이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투항해. 레큘라, 뮤르. 그렇지 않으면-” 시몬이 머리 위에 올려둔 피어의 투구를 꾸욱 턱 끝까지 눌러썼다. 피어의 텅 빈 눈에서 검푸른 안광이 횃불처럼 솟구쳐 올렸다. [군홧발로 짓밟겠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언데드 군단의 함성이 하늘을 찢고, 왕궁을 진동시켰다. 랭거스틴 전역 어디서도 들릴 듯 압도적인 함성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슴에 박혀 있던 레큘라의 가면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더니 다시금 눈을 떴다. 처억. 그가 소매 안에서 동전을 꺼내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동전을 중심으로 주위가 우주처럼 시커멓게 변하며 일그러졌다. 그러다 허공에 기울어진 직선의 형태로 금이 가곤, 그 금이 주우욱 벌어지며 거대한 눈동자의 형태가 되었다. 악몽에서나 나올 것 같은, 핏발 선 눈동자.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시몬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제1군단장, 헤일!’ [애송이 군단장들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핏발 선 눈동자가 게슴츠레 떠지며 비웃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힘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용감해지는 법이지. 너희는 입 밖으로 뱉은 말의 무게를 절감해야 할 것이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일순, 엄청난 살기가 눈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시몬은 자신의 몇몇 언데드들의 사념이 끊기는 것을 느꼈다. ‘본체가 오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시몬은 절로 주먹이 떨리려는 걸 가까스로 버텨냈다. [차이를 절감하고, 무지를 깨달아라.] 눈동자가 움직여 레큘라를 보았다. [레큘라.] [예, 폐하. 나의 황제시여.] 헤일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하임을 허락한다.] 그 말과 함께 허공에 뜬 눈동자가 사라지자, 주위를 짓누르던 압박도 함께 걷혔다. 엎드려 있던 레큘라는 황제에게 예를 갖춘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뮤르. 관을 가지고 떠나세요.] [그러지.] 뮤르가 군말하지 않고 노트를 받아 든 채, 휘하 리치들을 이끌고 물러섰다.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세우며 뛰어나왔다. [멈춰 뮤르!] [당신들은 갈 수 없습니다. 감히 그분의 위엄에 맞먹으려고 한 죄.] 처억. 레큘라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직시하고 한탄하십시오.] <터치 오브 피그말리온>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먹구름 형태의 저주가 뿜어져 나왔다. 헥토르가 경고했다. “강제로 사람을 사물로 변신시키는 저주다. 방심하지 마라.” 저주의 힘이 빠르게 확장하자, 시몬도 긴장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어느새 지금 데려온 군단 전원을 무력화할 수 있는 양의 저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으- 레큘라가 갑자기 걸치고 있던 두꺼운 케이프를 벗어 던졌다. 놀랍게도 그의 텅 빈 목 위로는, 잘린 단면이 아닌 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쩌저억 벌어지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촤아아아아아아! 이내 모든 저주가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시몬이 눈을 치켜떴다. ‘강제 변신 저주를 자기 자신에게……. 그렇다면!’ 레큘라의 몸 또한, 헥토르가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형태를 잃어가더니 분수대로 변해갔다. 그러다 분수대에서 여러 차례 바뀌었다. 대리석 동상으로 변하기도 했고, 기둥으로 변하기도 했으며, 움직이는 석고상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 “윽!” 메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유령왕녀인 그녀가 유지하던 ‘몽유도원도’가 밀려나고, 곳곳에 펼쳐진 장난감 건물들이 이내 옛 고대시대의 석고상과 무너진 기둥 따위로 변했다. 마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된 듯, 주위가 온통 고대풍의 고즈넉한 회색 대리석 동상과 분수대 따위로 뒤덮였다. 지면은 회색 수증기로 뒤덮여, 마치 거대한 구름 위에 발을 디딘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쿠쿵! 구름 위로 거대한 석고상으로 변한 레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고대풍 기둥들이 병풍처럼 촤르르르 깔렸다. [거룩한 분께 영광을!] 레큘라로부터 저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밀려 나가지 않도록 강렬한 돌풍에 견디던 시몬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 놀란 그가 얼른 피어의 투구를 벗고 확인했다. 손가락 일부가 석고처럼 딱딱해졌고, 다리 한쪽은 이미 기둥처럼 변형되었다. 강제 변신 저주의 효과였다. “크윽!” 시몬이 필사적으로 칠흑을 일으켜 저주 저항식을 몸에 새긴 뒤, 흐려지는 집중력을 되살렸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니 간신히 저주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들 괜찮……!”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언데드 병사들의 1/3이 벌써 조각상이나 석고상, 분수대 따위로 변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세상이 온통 고대풍의 전시회장이 된 것 같았다. ‘이게 에이션트 언데드 하나의 게하임이라고?’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1군단장 헤일은 대체 어느 정도의……!’ [정신 차려라 소년!] 피어가 머릿속으로 외쳤다. [헤일의 술수에 흔들리지 마라! 네가 지금까지 쌓아온 힘과 지혜를 믿어라!] 처억. 척. 어느새 메리다와 헥토르도 시몬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메리다는 몽유도원도로 주변을 장악하는 대신, 그 힘으로 망령 군단의 유지에 집중하고 있었고, 헥토르는 악룡으로 변한 채 날아오르고 있었다. 시몬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레큘라를 쓰러뜨리면 헤일과 1군단에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어.” 공기마저 저주로 일그러진 이 공간에서,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강하게 붙잡았다. “다들,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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