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99화 그녀는 어디에 있든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신성연방에서 갓 '부름'을 받은 어린 성녀. 아직은 학생이기에 성의(聖衣)가 아닌 에프넬 교복을 입었다. 파도치듯 휘날리는 하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걸을 때마다 반짝이는 별빛이 축복하듯 그녀의 발걸음을 수놓는다. 가히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아름다움. 백옥 같은 피부에는 흠결 하나 없고, 동작에는 품위와 격조가 넘쳐흐른다. 밝게 피어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는 연방민들에 대한 걱정과 존중이 묻어나 있다. 주민들은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의에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성녀님." 그런 그녀를 수행하는 팔라딘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을 걸었고, 성녀는 자애로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한다. 저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여신의 뜻에 대해, 연방민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길바닥에 엎드려 있는 주민들은 그저 경의하고 존경하며, 저들이 가는 길에 여신의 무한한 축복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살짝 달랐다. "성녀님! 오늘 오후 일정은 라흘 교수가 낸 과제를 수행하셔야 합니다!" "다음 장소로 모시게 허락해 주십시오!" 팔라딘들의 재촉에 레테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음-?" 그러곤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실로 후광이 내릴 듯한 자애로운 미소였지만, 이상하게도 저 덩치 좋은 팔라딘들이 겁먹은 토끼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오, 오후 일정을 준비하셔야......." "오늘 일정은 비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성녀의 교과서 같은 사근사근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팔라딘들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표정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라, 라흘 교수가 예절 교육 일정을 추가했습니다." "예절교육?" 하.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그딴 거 추가함까." 일말의 가식이 걷히며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모두가 눈알을 굴리며 침묵하는 가운데, 선임 팔라딘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말을 이었다. "에, 에, 에프넬에서 요청을......" "요청을 한다고 다 받냐! 이 등신들아!" 그녀의 허리가 번개처럼 돌아가고 다리는 대기를 가르며, 이내 그림과도 같은 발차기가 팔라딘의 투구에 꽂혔다. 공중으로 치솟아 육 회전쯤 하던 팔라딘이 '크헉'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후배 팔라딘들은 얼른 눈부터 깔았다. '시작됐네.' '별의 성녀님의 3단 감정 변화.' 레테는 1학년 초에는 다소 다혈질이긴 했지만, 그래도 독실한 신성을 가진 전형적인 프리스트였다. 하지만 1학년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무자비한 폭군이자 반항아로 떠올랐다. 대체 방학 때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소문만 무성했다. 이후 성녀 세례를 받고 성녀 교육이 시작될 시점에는, 다소 기가 죽었는지 원로들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학년. 이제 레테는 사람들이 성녀로서 기대하는 모습과, 자신의 성깔 있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완전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종일 그녀의 수발을 들며 눈치를 보는 팔라딘들만 그녀의 변덕에 말라 죽어가는 중이었다. "하, 나. 진짜." 주위에 주민들이 없는 걸 확인한 레테는, 근처의 바위에 한껏 불량스럽게 걸터앉았다. "야, 기상." "......." 쓰러져 있는 팔라딘은 미동이 없었다. 레테가 재차 검지를 위아래로 까닥했다. "기상." 시리고 서늘한 음색이 울려 퍼지자, 쓰러져 있던 팔라딘이 파박! 달려와 그녀의 앞에 기립했다. "하, 나 X발.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저런 상스러운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팔라딘들도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듯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팍 숙였다. "대체 또 왜 이럼까." "소, 송구합니다!" "나 요즘 성녀 노릇 잘하고 있잖슴까." "예! 실로 모든 프리스트들의 귀감이십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저런 사람이 귀감이면 신성연방은 진작에 멸망했으리라. "내가 뭐 하루 이틀 쉬게 해달라고 했어요? 오늘은 진짜 중요한 날이니까 안 된다고." "그, 그렇지만......! 라흘 교수가 이번 주교 폭행 사건으로......." "맞을 짓을 하니까 팼지! 그 변태 성녀 성애자 새끼!" 팔라딘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아무리 인류 위의 반신이라지만 주교를 저렇게 폄하하다니! "아무튼. 오늘은 쉴 검다." "자, 잠깐만요! 성녀님!" 바위에서 일어나 여자기숙사로 걸어간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예쁘게 웃었다. "그렇게 됐으니 뒷수습 잘 부탁드려요~" 그러고는 눈을 깜빡이며 윙크하자 별이 통 하고 튀어 올랐다. "성녀이니이이임!" 레테는 금남의 구역인 에프넬 여자기숙사로 들어가 버렸다. 바닥에 엎드린 선임 팔라딘이 팔을 뻗으며 그녀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지만 레테가 돌아올 일은 없었다. 테라스에 앉아서 티 타임을 즐기던 에프넬의 여학생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웃음 지었다. "저 기사님들은 오늘도 당했네요." "박봉에 저리 구르면서 일하는 게 안타깝네." "오라버니께서 팔라딘 지망인데, 어떻게든 뜯어말려야겠어요." 타박 타박 타박 타박. 기숙사에 돌아온 레테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들뜬 미소가 가득했다. 이내 본인의 기숙사 방 앞에 도착할 즈음에는 뛸 듯한 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칵! "나왔어요! 리리넷!" 기숙사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주근깨 소녀가 휘익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리리넷이었다. 그녀는 손을 착 모으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을 뵙......." "아오! 하지 말랬잖슴까 그거!" 레테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하며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사실 성녀는 여학생 기숙사를 쓸 필요가 없이, 극도로 호화로운 하늘섬 내 대저택에서 하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레테는 무슨 이유인지 저택을 거절하고 기숙사를 고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어린 성녀의 청렴한 선택이 기특하다며 칭찬했으나,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보다! 편지! 편지 왔슴까?" "아, 그럼요! 그 노파가 가져온 모종의 편지 말이죠?" 룸메이트인 리리넷과 헤어지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진짜 목적은 바로 이 편지. 저택으로 올라가 버리면 안나가 있는 암흑연합에서 오는 편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협력자인 리리넷 또한 이 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국경 너머에 레테의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요!" 리리넷이 편지를 내밀자, 레테의 뺨에 황홀한 홍조가 떠오르며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휙! 이어서 리리넷이 편지를 제 품으로 숨기자, 레테의 표정이 극부의 칼바람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재밌어!' 장난기가 발동한 리리넷이 편지를 내밀고 숨기길 반복했고, 그때마다 레테의 표정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크윽, 성녀란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빠악! "사람 가지고 장난치지 마!" 결국 레테의 발차기에 응징당한 리리넷이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레테는 편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후다닥 달려갔다. 안나의 편지를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극도로 진지했다. 바로 목욕재계부터 한 다음, 뽀송뽀송한 상태로 밖으로 나와 신성한 성녀복을 입었다. 카펫 위에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편지를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신이시여. 오늘도 선생님의 편지가 무사히 도착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손을 모은 그녀가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1년 중 레테의 신앙과 신성이 최대치가 되는 순간. 대기 중의 모든 마나가 신성으로 뒤바뀌며 새하얀 빛의 커튼으로 변했다. 대낮에 별이 떠오르고 마치 신이 계시를 내리듯 하늘에서 빛무리가 내려왔다. 성녀의 신앙은 자연현상마저 바꾸고 있었다. "오오!" "성녀께서 계시를 받으신다!" 여자 기숙사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팔라딘들은 그 위대한 현상을 보며 바닥에 엎드렸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증명.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신앙심이 샘솟게 하는 광경이었다. "레테 성녀님. 쟤들 또 쇼하는데요?" 창밖으로 보고 있던 리리넷이 키득거렸다. "냅두십쇼." 레테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기도를 마쳤다. 두 손을 떨어뜨려 무릎에 고스란히 올려놓은 그녀는 잠시 긴장한 얼굴로 숨을 한 차례 골랐다. '연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안나 선생님의 편지. 성녀 교육, 그리고 에프넬 생활의 버팀목이자 원동력.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풀고 편지 봉투를 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흰 편지지 한 장이 나왔다. <레테에게> 이 수려하고 우아한 글씨체. 안나의 편지가 확실했다. '.......' 그녀는 일단 그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편지 봉투를 뒤적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스윽- 포기하지 않고 편지 봉투를 뒤집어서 탈탈 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뭐야.' 그녀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이번에도 그 자식 편지는 없.......' "성녀님!" 우왁!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리리넷 때문에 레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굳어졌다. "뭐, 뭠까! 놀랐잖아요!" "? 뭘 그렇게 놀래요?" 리리넷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슥슥 다가왔다. "편지지 꺼내놓고 편지 봉투를 막 털고 있길래 이상해서요. 고장 난 줄 알았어요." "......신경 끄십쇼." "얼굴은 또 왜 벌게져 있어요?" 레테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언제!" 얘가 또 왜 저러나 싶어서 눈을 끔뻑거리던 리리넷이 으흠- 소리를 내며 입을 달싹였다. "아하, 편지가 두 장이 있는지 찾고 있으셨나 봐요?" "......." "한 장은 매번 오던 그분일 테고, 다른 한 장은 누굴까아?" "란!" 와장창!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튀어나온 하얀 용이 대뜸 리리넷을 붙잡아 천장에 착 붙여 버렸다. "으앙아아! 왜, 왜 이러세요!" "아, 시끄러워! 내가 편지 읽을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슴까!" 레테가 버럭 소리 지르며 손짓했다. 란이 꼬리 끝을 움직이더니 리리넷의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그녀가 으허헉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끅! 끄하하하! 요, 용서해 주...... 이히히히!" 가뿐하게 무시한 레테는 다시 바닥에 경건하게 꿇어앉아 안나의 편지지를 집었다. '아니, 헤어진 지가 언젠데 어떻게 편지 한 통 안 보낼 수가 있지?' 잠시 그녀의 눈이 맹렬한 분노로 타올랐다. '아, 이제 나도 몰라! 전장에서 만나기만 해. 안나 선생님의 아들이고 뭐고 철저하게 찢어발길 테니까.' 그녀는 으르렁거리며 안나의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나마 우아한 안나의 필체를 감상하고 있으려니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안이 됐다. 행복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벌써 마지막 문장이었다. <참, 그리고 시몬이 네게 편지를 보낼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하더구나.> '!' 레테가 눈을 크게 떴다. <키젠의 우편은 외부업체를 사용하고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엔 보안이 취약하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키젠에서 하늘섬으로 직접 편지를 보낼 루트를 찾고 있다고 해.> '......이 바보가.' 그녀의 입가에 거짓말처럼 미소가 걸렸다. '그런 일이 있음 진작 말하든가!' 그녀는 지인인 이단심문관 메틴을 통해 로크섬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결코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방법을 알려주려고 보내는 것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바로 책상에 앉아 깃펜을 꺼냈다. "으헉! 꺄하하하학! 레테 성녀님! 살려주......!" "아, 시끄러워요!" * * * 시몬의 중간고사 준비는 계속되었다. 다른 과목들의 수업을 들으며, 틈이 있을 때마다 돌연변이 지하실로 들어와 마누스의 활용법을 연구했다. 아론에게 동기들 중 최고의 듀라한을 만들어 보이기로 약속했다. 평범한 듀라한으로는 다른 학생들이 만들 '가디언 듀라한'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특히 아세라즈와 헥토르 둘 다 가디언의 시체를 손에 넣은 걸로 알고 있다. 두 사람이라면 가디언 듀라한을 완성하는 건 물론, 플러스 알파로 뭔가 더 특이한 힘을 부여할 것이다. 능가할 방법이라면 에이션트 언데드였던 마누스의 힘뿐이다. '어렵다.' 시몬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도 듀라한 특강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론은 주말에도 반드시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날 수업에서. "중간고사 직후, 학과에서 진행할 최중요 수행평가를 발표한다." 듀라한과 관련된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의 수행평가 내용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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