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73화 스테이시 교수와의 대화를 마친 시몬과 메이린은 작전과 관련된 세부 임무를 전달받았다. 첫 번째 임무는 테러 소식을 아직 알지 못하거나 키젠에서 온 공문을 받지 못한 채 랭거스틴에서 개학 준비를 하고 있는 1, 2학년들을 찾아내, 로크섬으로 향하는 부두로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두 번째 임무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랭거스틴에 머물고 있는 3학년 동기들의 협조 약속을 미리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을 작전에 포함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동기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시몬이 자신감 넘치게 답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키젠 3학년들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어지간한 현역 프로 네크로맨서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고, 어떤 경우에도 반격이 가능하다. 학생 신분과 교복만 입고 있지 않았다면, 드레스덴 왕국조차 이들이 수도에 머무는 것에 부담감을 느낄 정도의 대전력이었다. “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어요.” 스테이시 교수가 끝에 놓인 서류를 들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잠시 갈등하는 기색도 느껴졌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신임 혈류학 교수님도 이곳 랭거스틴에 와 있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시몬과 메이린의 눈이 커졌다. ‘그러네. 프레스턴 교수님이 일라이저 사건 이후 교수직을 그만두셨으니까.’ 서류를 내려놓은 스테이시 교수가 말을 이었다. “복잡한 지리 때문에 다소 길을 헤매는 것 같더군요. 현재 랭거스틴에 있는 하수인들은 기존의 일정 준비로 도무지 여유가 없으니, 학생회가 신임 교수님을 인솔해 이곳으로 데려와 줬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시몬은 신임 혈류학 교수에 대해 좋은 추억이 많지 않았지만, 호기심은 있었다. 3학년 2학기 끄트머리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혈류학과 교수직. 과연 누가 이 독이 든 성배를 자처했을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회의 종료를 선언한 스테이시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몸은 허수아비가 되어 있었다. * * * 회의를 마치고 성에서 나온 시몬과 메이린은, 바로 딕과 카미바레즈가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두 사람은 숙소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여기가 우리가 3일 동안 묵을 곳이야!” 딕이 두 팔을 벌리며 소개했다. 그는 거의 저택 한 채를 빌렸다. 1층에는 따듯한 벽난로와 함께 소파와 쿠션들이 가득한 일종의 호텔 라운지 같은 공간이 있었고, 10명 넘게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도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위층에는 방만 8개가 있었고, 무척 깔끔한 침구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시몬이 불쑥 물었다. “우리 넷이서 묵을 건데, 너무 큰 곳을 예약한 거 아냐?” 딕이 킬킬 웃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뭐,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네 사람은 짐을 정리하고 라운지에 둘러앉았다. 메이린이 스테이시 교수에게 전달받은 내용을 들려주었고 모두가 이야기를 경청했다. “벽보에 테러 미수라, 그게 근거였단 거지? 난 별일 없을 거라는 데 한 표.” 딕이 소파 등받이에 두 팔을 늘어뜨리며 단언했다. 반대편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메이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니가 어떻게 장담하는데?” “여긴 드레스덴 왕국의 수도인 랭거스틴이야.” 딕이 으스대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왕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반 키젠 세력이 그런 짓을 저지르면 오히려 자살행위지. 바로 왕국이 주모자를 찾아내겠다고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아.” “학생들을 노리는 게 반 키젠 세력이 아니라…….” 시몬이 말을 끊고 말을 이었다. “결사라면 어때?” “어어, 결사는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하지. 근데 그놈들이 대가리에 화살 맞은 것도 아니고, 굳이 예고 테러를 하겠어? 작전의 성공률 면에서도, 혼란의 유발 면에서도, 전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어.” “으음.” 그건 맞는 말이었다. 결사라는 조직의 생리에 대해 꿰뚫고 있는 시몬이라도, 이런 건 결사의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카미바레즈가 입을 열었다. “딕, 혹시 신성연방 측 강경파들이나 광신도들의 소행은 아닐까요?” “그래, 카미. 그나마 그게 가능성 있는데…… 지금 대륙의 양상은 결사가 모든 관심과 적대감을 다 끌고 있어서, 걔들이 멀리 랭거스틴까지 와서 키젠 학생을 건드릴 이유가 있을까 싶어.” 이때 시몬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손뼉을 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아. 하지만 학생에 대한 위협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대비는 해둬야 한다고 생각해.”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딕도 ‘그건 맞지’ 하고 순순히 동의의 뜻을 밝혔다. “내일부터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자.” * * * 숙소도 잡고, 스테이시 교수도 만났다가,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니 벌써 날이 저물어 있었다. 카미바레즈의 제안에 따라 네 사람 모두 파자마로 갈아입고 과자를 테이블에 잔뜩 늘어놓았다. “호잇!” 딕이 깝죽거리며 메이린의 등을 베개로 툭툭 건들며 장난을 치다가, 메이린이 칠흑까지 일으키며 쫓아와 딕을 구타하는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별일은 아니었다. 슥삭슥삭. 그리고 시몬은 책상에 앉아서 편지의 답장을 쓰고 있었다. 카미바레즈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시몬은 같이 안 놀아요?” “미안해. 이것만 빨리 답장 보내고 갈게.” 테이블에는 아직 답변하지 못한 편지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2군단장이자 북부대공 진 아르스칼트의 편지가 왔다. 최근에 북부가 또 난리라서 잠시 그쪽에 가 있다고 한다. 북신 자이로스와 합동작전을 펼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고 시몬은 승낙의 뜻을 밝혔다. 벤야 바닐라의 편지도 있었다. 시몬이 맡겨둔 에이션트 언데드 ‘마누스’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마누스는 전 유령왕녀 테네리페가 한번 손을 봐준 뒤, 벤야 바닐라에게 옮겨가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벤야는 제작 방향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니 한번 연구실에 방문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시몬은 랭거스틴에 나온 김에 바로 내일 방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에르제베트에게도 편지가 왔는데. <코랄 리치 부대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어요! 알라제의 말에 따르면 이제 한 가지 과정만 더 거치면…….> 7군단의 비밀 병기의 완성도 눈앞이었다. 시몬이 빠르게 답변을 작성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깃펜을 멈췄다. ‘대비한다고 나쁠 건 없겠지.’ 시몬이 깃펜을 다시 움직였다. <에르제. 피어에게 랭거스틴으로 와달라고 할 수 있을까? 주소는 아래에 써둘게.> * * * 다음 날, 이른 새벽. 사적인 일과가 있던 시몬은 다른 멤버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목적지는 벤야의 연구실이었다. 랭거스틴 외곽 창고 부지에 그녀의 개인 연구실이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길거리를 걷던 중. ‘응?’ 도시 돌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벽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키젠 학생 테러 사건도 ‘벽보’로 시작된 걸 떠올리니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낙서나 광고였지만, 그중에 단번에 시선을 붙잡는 벽보가 하나 있었다. <황제는 돌아온다.> “!” 시몬이 빠르게 다가가 그 벽보를 살폈다. <암흑연합은 명예롭지 못한 방법으로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제의 핏줄을 폐위했다. 이제, 초대 황제가 돌아와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암흑연합을 무너뜨린 뒤 제국을 재건하리라.> <제국민들이여, 황제를 섬겨라.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죽음뿐이다.> 시몬이 심각한 표정으로 벽보를 찬찬히 살피고 있는 그때. “그런 거 함부로 보시면 안 됩니다, 학생.” 피로에 찌든 얼굴의 남자가 그 벽보를 뜯어냈다. 랭거스틴에 근무하는 공무원으로 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은 쓰레기봉투에 그런 벽보들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관심 있어서 본 건 아니에요. 그보다 요즘 이런 벽보가 많나 봐요?” “말도 마세요.” 공무원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요즘 세상이 워낙 뒤숭숭하다 보니, 암흑연합에도 신흥 종교 같은 것들이 생기고 있어요. 돌멩이나 나무를 신으로 믿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는 ‘죽은 황제’를 믿는 자들까지 있다니까요.” 그가 한탄하며 옆에 붙은 황제 관련 벽보를 하나 더 뜯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시몬이 불쑥 말했다. “정말로 황제가 돌아올까요?” “아! 역시 관심 있어서 본 게 맞네!” 공무원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벽보를 쓰레기봉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 누구야, 제1군단장인가? 그 사람이 황제의 시체를 찾아서 되살렸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 일반 주민들에게도 그런 소문이 퍼져 있었다니. 시몬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사이, 공무원이 이마를 쓸어내렸다. “제국을 무너뜨린 암흑연합을, 죽음에서 되살아난 제국이 무너뜨린다라. 참 지어내기 편할 정도로 형편 좋은 이야기네요. 그쵸?” 그때 저 멀리서 선배 격으로 보이는 다른 공무원이 뭐라 외쳤다. 공무원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시몬을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학생도 조심해요. 괜히 이상한 소문 믿다가 낭패 보지 말구요.” “…….” 시몬은 공무원이 선배에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 * * “어서 와 제군아! 오랜만이야!” 랭거스틴의 창고 부지에 도착하니, 바닐라 그룹을 이끌고 있는 벤야 바닐라가 직접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와 악수한 시몬이 조용히 말했다. “……벤야 선배님,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그녀는 예전보다 살이 더 빠져 있었고, 눈 아래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나 있었다. “하하! 세계 정복을 위해 이 정도쯤이야!” 그녀가 가늘어진 팔을 들어 알통을 보이며 체력을 과시했다. 쾌활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피곤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1학년 시절 벤야를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돌연변이 동아리’ 전단을 캠퍼스에 붙이며 인원 모집을 외치던, 그리고 세계 정복을 부르짖던 철없지만 의욕 넘치는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간 그녀를 보니, 어른의 고충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부탁드린 마누스 작업 때문에 더 힘들어지신 건 아니죠?” 시몬이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묻자, 벤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하긴 해도 힘들지는 않아! 오히려 제군이가 맡겨준 일 덕분에 버티고 있는걸! 사무실에서 서류에 서명이나 하는 것보단 나는 이렇게 창고에 틀어박혀 언데드를 정복하는 게 훨씬 재밌어!” “다행이네요.” 그녀가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가 수많은 언데드들을 건드려 봤지만, 마누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역대급이야.” “어떻게 됐나요?” “지금 보여줄게.” 그렇게 시몬은 벤야의 안내를 따라 창고 깊숙이 들어갔다. 여러 보안 절차를 통과한 끝에 그녀의 개인 연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러 복잡한 관이나 언데드 물질들이 놓여 있는 가운데. 저 멀리 과거 대륙의 소드마스터이자 에이션트 언데드였던 마누스가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존재감이 느껴졌다. “4군단장 테네리페 님이랑 의논한 끝에 육체는 다크홀을 기반으로 한 데스나이트 말구, 억념의 룬을 기반으로 한 듀라한 형태로 가닥을 잡았어. 그쪽이 역시 더 적합한 것 같더라구. 대신 머리가 없는 보통의 듀라한 대신 마누스의 머리가 목에 붙어 있는 거고.” 시몬이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꼬르륵거리며 거품이 올라오는 실험관에는, 예전에 시몬이 얻었던 마검이 둥둥 떠 있었다. “이 마검을 마누스가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어. 다만-” “네! 뭐든 말씀해 주세요.” “이전의 마누스의 공격성이 너무 흉포해서 통제가 안 되는 게 문제라면, 지금의 마누스는 지나치게 움직일 의지가 없어서 문제야.” 벤야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마누스를 바라보았다. “스펙상으론 움직일 만한 사양도 갖춰놨고, 저 듀라한의 몸으로 마검을 다룰 수 있도록 판까지 깔아놨는데, 움직여 주지 않네. 툭 하면 그 소리야.” “그 소리요?” [슬픔.] 그때 고장 난 기계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마누스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슬픔을 이해했다.] “…….” 슬퍼하는 언데드라. 다른 네크로맨서 학자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벤야가 한쪽 눈을 감았다. “의지가 없는 언데드만큼 무가치한 건 없어. 이제 주인인 제군이가 선택할 차례야. 새롭게 생성된 마누스의 사념이 아쉽지만 그냥 네 의지로만 움직이는 소환형 언데드로 구축할 건지, 아니면 이대로 마누스의 저 슬픈 감정을 보존한 채 마무리 지을지.” “으음…….” “만약에 후자로 결정한다면.” 벤야가 팔짱을 꼈다. “상당히 쓰임새가 제한되는 언데드가 될지도 몰라.” 시몬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마누스를 바라보았다. 마누스는 과거 대륙의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마누스의 사념이 저렇게 슬픔을 곱씹게 된 건, 예전에 1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이자 전 동료를 만났던 때를 기점으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마검을 들거나, 듀라한의 육체를 움직일 수는 있는 건 확실히 가능한 거죠?” “그럼!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움직일 의지가 없어서…….” “이대로 마무리 지어주세요.” 여기 올 때 본 황제의 벽보를 떠올린 시몬이 미소 지었다. “아마, 쓰일 여지는 충분히 있을 겁니다.” “제군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좋아, 결정!” 그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언데드의 ‘슬픔’이란 걸 제군이가 이해하고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제군이가 바랐던 활약 그 이상을 이뤄낼 수 있을 거야.” “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배고프다! 아침 먹었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두 사람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이제 마지막 한 학기 남았네!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구! 역대급 학생회장이라던 판타서스 선배님도 졸업 시험에 삐끗해서 100명 중에 99등으로 졸업하셨잖아.” “진짜요? 졸업 시험 내용 알려주세요!” “미안, 대외비 서약 받아서 말 못 해. 사실 저주를 받고 들어가서 기억도 잘 안 나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몬은 마지막으로 마누스를 눈에 담은 뒤 걸음을 옮겼다. 그때 허공에 멈춰 있던 마누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돌아갔다. […….] 그의 시선은 시몬이나 벤야 쪽도 아니고, 다른 사람 쪽들도 아닌, 벽 너머의 어딘가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먼 곳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슬픔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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