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55화 세 시간 전, 사가루인. “아버지,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볼드윈 왕국의 독립을 확정 짓기 위한 고위귀족 회의를 앞두고, 국왕과 왕태자는 단둘이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다.” 의자에 앉은 볼드윈 국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것을 고려한 끝에 내린 결론이니,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 왕태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키젠 분들은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뒤에 아버지를 설득하자고 했지만…….’ 그가 손에 쥔 봉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번 귀족 회의에서 아버지가 독립 사실을 확고하게 공표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돼.’ 아직 카드들이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왕태자가 서서히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던 왕이 그것을 보았다. “그게 무엇이냐?”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왕의 눈이 커졌다. 사진에 찍힌 건 다름 아닌 미망인 옷을 입고 있는 브리만티아였다. “네, 네가 그자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역시 알고 계셨네요. 저 브리만티아라는 여자와 만나고 돌아온 자들은 동일한 증상을 겪습니다. 멸망의 미래를 봤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호소하죠. 마치 아버지처럼요.” 쿵! 왕이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그녀가 보여준 것과는 별개로 모든 판단은 내가 내렸다! 너는 이 아비가 미친 것으로 보이느냐! 왕궁 네크로맨서들이 나를 진단했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왕궁 네크로맨서들도 한통속입니다. 아버지.” 왕태자가 사진을 내리며 단호히 말했다. “1군단에 나라를 팔아넘기려 하고 있죠.” “시끄럽다!” “아버지!” 왕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왕입니다! 수백만의 목숨이 당신 손에 달려 있어요! 만약 지금의 결정이 숙고 끝에 내려진 순수한 판단이 아니라, ‘불순물’이 섞인 결정이라면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 왕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덮었다. 하지만 이때 왕태자는 보았다. 불순물이라는 말에 왕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는 것을. 이때 마침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귀족들이 모였사옵니다.” “가겠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왕태자가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귀족들과 이야기해 보겠다.” 왕이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네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고, 정말로 내 결정에 불순물이 섞였는지 그들의 판단을 들어보마. 너도 함께 가자.” “아버지!” 왕태자가 감격한 얼굴로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나온 뒤, 하인을 따라 대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인이 살짝 문을 열어주며 비켜섰고, 왕과 왕태자는 당당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 “…….” 눈앞에 펼쳐진 것은 피범벅이 된 끔찍한 연회장의 내부였다. 곳곳에 핏물이 가득하고, 귀족들이 서로 죽고 죽인 듯 깨진 접시와 나이프를 휘두른 흔적이 보였다. 바닥에는 피의 마법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왕태자가 외쳤다. “아버지! 함정입……!” 그러나 이미 왕은 입에서 핏물을 토하며 무너지고 있었고. 뒤이어 왕태자의 뒤통수에도 둔탁한 충격이 내려와 그의 시야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 * * 시몬은 볼드윈에서 귀족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로레인과 함께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국경에 도달한 뒤, 하루를 꼬박 달려서 사가루인에 도착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벽 위로는 경비병들이 가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몰래 들어갈 방법이 없어 보였지만. “이쪽이야.” 다행히 시몬에게 협력하는 왕태자가 비밀 루트를 만들어두었다. 사가루인의 네 성문 중에서 북문 쪽으로 은밀히 이동한 시몬은 손등으로 성문을 리듬감 있게 몇 차례 두드렸다. 잠시 후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살짝 열렸다. “왕태자님께서 보내신 분입니까?” “예.” “이쪽으로.” 북문은 왕태자의 측근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몬과 로레인은 로브 후드를 더더욱 눌러쓴 채 안으로 들어섰다. 때는 늦은 저녁, 주거지역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거리에는 쥐 한 마리도 오가지 않았다. “불길해, 조금 더 서두르자.”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속도를 내려는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로레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볼래?” “으, 응?” 시몬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로레인의 손을 붙잡았다. 순간 시몬의 몸이 마치 거인에게 던져진 듯 미친 듯한 속도로 하늘로 치솟았다. ‘우와악!’ 맞바람에 얼굴이 따가웠다. 주위의 경관이 정신없이 휙휙 바뀌었다. 로레인은 시몬의 손을 붙잡은 채 붉은 이능을 다리에 집중시켰고, 지붕이나 벽 따위를 박차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터엉. 두 사람은 왕궁 저택의 정원에 안착했다. “고, 고마워.” 시몬이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말했다. 로레인이 생긋 미소 지었다. “언제든 의지해 줘.” “든든하네.” 하지만 왕궁 앞에 도착한 지금부터는 힘을 최대한 억제하고 움직여야 했다. 시몬이나 로레인이나 영향력이 하나같이 거대했고, 독립을 선언한 볼드윈의 왕궁에 무단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심각한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로레인은 마계의 힘을 갈무리했고, 시몬은 피어를 입지 않은 채 함께 저택 입구로 들어섰다. “잠깐만.” 시몬이 앞서가던 로레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손끝을 저택 안으로 가볍게 넣었다가 빼내며 말했다. “방음 결계야. 내가 전에 왔을 때는 없던 종류네.” 두 사람은 수상하단 눈빛을 주고받은 뒤, 더더욱 신중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섯 채의 저택을 합쳐놓은 볼드윈 왕궁은 여전히 복잡한 구조였지만, 다행히 시몬은 제독과 함께 왔던 적이 있었기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조용해.’ 불길한 침묵이 가슴을 옥죄였다. 왕태자가 부디 무사하길 바라며 시몬은 걸음을 재촉했다. ‘시몬, 저길 봐.’ 로레인이 시몬의 옷자락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아래를 가리켰다. 시몬도 훅 밀려드는 혈향을 맡고는 시선을 내렸다. 그들이 도착한 2층 복도는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시몬은 조심히 아래를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사람이 죽어 있었다. 경비병, 그리고 왕궁에서 일하는 하인들까지. 검에 베여 피를 흘린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스륵. 스륵.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시체의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질질 끌며 옮기고 있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복도를 따라 레드 카펫처럼 길게 그어졌다. ‘한두 명이 아니야.’ 습격자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로레인이 허벅지에 매여 있던 단검 케이스에 손을 댔지만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전투는 끝났고, 여기서 싸워봐야 득이 될 게 없었다. 저들이 1군단이 아니라 볼드윈 왕국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특정 귀족의 반란? 아니면 왕의 숙청일까?’ 오늘 이 자리는 국왕이 볼드윈 독립 건으로 귀족들을 설득하는 자리라고 들었다. 주모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일거에 몰살한 듯했다. ‘어쩌지 시몬?’ ‘계속 가자.’ 시몬이 입 모양으로 답했다. ‘왕태자 저하가 걱정돼.’ 두 사람은 미로 같은 저택의 이곳저곳을 빠르게 이동했다. 제일 먼저 왕의 집무실을 찾아갔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뒤이어 바닥에 찍힌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연회장이 하나 나왔다. 바로 그곳에서. ‘!’ 무수한 귀족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참혹한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연회장 입구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건 다름 아닌……. ‘볼드윈의 국왕!’ 왕이 죽었다. 로레인은 이 참극을 믿기 어려운 듯 입을 막은 채 떨었다. 시몬도 떨리는 손을 움직여 메모리얼 수정구를 꺼내 그 광경을 담았다. 뚜벅, 뚜벅. 바로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덜컹! 곧바로 연회장 문이 활짝 열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들이 들어왔다. “날 밝기 전에 전부 소각장으로 옮겨.” “움직여라.” 그들이 시체들을 거칠게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 위에 거미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시몬은 로레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채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증거를 수집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시몬의 다른 한 손으로 메모리얼 수정구를 붙잡고 시체를 끌어내는 남자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렇게 이들이 연회장을 다시 비운 사이, 시몬과 로레인은 조심스럽게 내려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혈흔.’ 바로 앞에 부서진 탁자의 파편과 떨어진 장신구들, 핏방울의 흔적이 보였다. 시몬은 로레인에 손짓하여 신호를 준 뒤 핏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핏자국은 연회장 옆방으로 이어져 있었고 바로 그곳에. “!” 피투성이가 된 왕태자가 검을 쥔 채 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는 왕실 네크로맨서 두 명이 왕태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네크로맨서들이 시몬과 로레인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누구……!” <사일런스> 시몬이 미리 준비해 둔 저주로 즉시 그들의 입을 봉쇄하고, 로레인이 뒤로 돌아와 그들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놀라운 호흡으로 상황을 정리한 두 사람이 바로 왕태자에게 다가갔다. “으, 으으…….” 왕태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몬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저하! 여기 포션을……!” “……나는 이미 틀렸소.”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가…… 둘째를 노리고 있…… 부탁한…….” 왕태자는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시몬은 허망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로레인이 다가와 왕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조용히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저하, 부디 편하게 눈감으시길.” 그렇게 말한 그녀가 한층 결연한 눈빛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시몬.” “……응, 이건 1군단의 힘을 빌린 삼왕자 헨릭의 쿠데타야.” 시몬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왕위가 목적이었겠지. 삼왕자 헨릭의 다음 목표는 이왕자일 거야.” 이왕자가 위험했다. 아직 이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빠르게 방에서 나와 이왕자를 찾아 움직이는데. 쿵쿵쿵쿵! 복도 끝에서부터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칠흑을 숨긴 채 기둥 뒤에 숨었다. 쿵쿵쿵쿵쿵쿵! 한 무리의 무장한 군사들이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에 삼왕자 헨릭이 함께 걷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 삼왕자 헨릭이 통신 수정구를 든 채 버럭 소리 질렀다. “아직도 형을 못 찾았어?” -본래 이왕자 저하도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심한 감기로 개인 저택에 남은 듯합니다. “염병, 그걸 변명이라고 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당장 찾아가 죽여! 당장!” -전력이 전부 이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1군단이 있잖아! 그놈들한테 부탁하면 될 거 아니야!” 그가 거칠게 소리치고는 통신 수정구를 바닥에 내던져 박살 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이 새끼들이 1군단의 절반만큼이라도 유능했더라면……!” 모두가 저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몬과 로레인이 조용히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왕자의 개인 저택. 이미 경비병과 하인들은 모두 베이고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잠옷 차림의 이왕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그런 이왕자의 앞을 막아선 건, 완전무장한 언데드 기사들이었다. “제발! 누, 누가 좀……!” 스릉! 언데드 하나가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왕자가 비명을 지르며 검이 내려오는 걸 보지도 않고 몸을 던졌다. 촤악! 검이 내려쳐지며 침대가 갈라졌다. 베개에서 깃털을 흩날리며 방 안이 하얗게 뒤덮였다. 왕자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놈들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작정이라는 걸. 언데드 기사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 하자, 왕자는 기지를 발휘해 그 기사의 가랑이 사이로 슬라이딩하듯 몸을 던졌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을 살짝 베며 지나갔다. 등 뒤에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지만 왕자는 아픈 것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줘요! 누가 좀!” 퍼억! 뒤이어 날아온 발차기에 복부를 걷어차인 왕자가 몸을 나뒹굴었다. 컥컥 소리를 내며 배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움츠렸다. ‘수, 숨을 쉴 수가 없어!’ 쿵! 기사 언데드가 그를 발로 짓밟고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촤아아아아아아아아! 건물 내부가 일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콰득! 퍽! 창밖과 벽을 뚫고 날아온 광선이 한 차례 번쩍이자, 저택에 있던 여러 언데드 기사들의 몸통이 뚫리며 동시에 허물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왕자가 눈을 크게 떴다. “실례합니다.” 저벅, 저벅. 깨진 창문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 곳곳에 독특한 본 아머를 두르고, 그 위로 클래식 정장이 희미하게 빛나며 감싸고 있었다. 마치 뼈대로 이루어진 옷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고개 숙여주세요. 저하.” 남자가 지팡이를 바닥에 꽂았다. <더 젠틀맨스 어코드(The Gentleman's Accord) - 신사협정> 그러자 집 곳곳에 펼쳐진 액자들에서 정장 차림의 뼈들이 빠져나와 지팡이를 세우고, 거대한 보랏빛 방패를 펼쳐냈다. 그 직후. 화르르르르르륵! 저택 전체를 휘감는 엄청난 화염이 몰아쳤다. 건물이 순식간에 타들어가는 가운데, 결계 속의 두 사람만이 멀쩡했다. “누, 누구시오!” 남자가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으며 예를 취했다. 벗어서 손에 드니 본 아머의 투구 모양이었다. “군단장 시몬 폴렌티아입니다. 왕자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볼드윈 왕가의 혈통이 위태롭기 직전,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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