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52화 시몬의 팀을 찾아온 건 다름 아닌 볼드윈 국왕의 제1 후계자인 왕태자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키젠 측의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시몬을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고, 그 위치를 전달받아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드세요.” 로레인이 따뜻한 차를 건넸다. 비에 흠뻑 젖은 왕태자가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로레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왕태자님, 얼굴이…….”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오.” 얼굴 곳곳이 퉁퉁 부어 있었다. 특히 뺨 한쪽이 심하게 부어 있었는데, 눈 아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누가 봐도 주먹으로 맞은 흔적이었다. “아버지를 말리려다가 조금 다쳤을 뿐이오.” “네?” “……엎드리고, 눈물로 빌고, 욕하고, 협박하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다가 그래도 안 돼서 결국 바지까지 내렸소.” ‘?’ 마지막은 굳이 안 말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한 시몬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소.” 왕태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미 현실적인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소. 아버지는 어떤 중대한 생각이 강하게 머릿속에 박힌 사람 같았소. 자신이 내릴 구국의 결단이, 결과적으로는 이 나라를 지켜줄 거라고 굳게 믿고 계셨지.” “…….”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호소해 봤소. 내가 우니까 아버지도 따라 우셨소. 왜 이해해 주지 못하냐고, 나를 믿어야만 한다고.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언어가 허공에 맴돌았소.” 이야기를 듣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시던가요?” “미래를 보셨다고 했소.” 그 순간, 시몬과 다른 팀원들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왕국이, 암흑연합이, 더 나아가서는 대륙이 무너질 미래라고 했소! 아버지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고 했고, 한 명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그 운명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소.” “잠깐, 잠깐만요! 말 끊어서 송구하지만……!” 딕이 흥분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브리만티아를 통해 미래를 본 사람들과 정확히 똑같은 증세입니다!” “……브리만티아? 브리만티아라면 사가루인의 지하에서 집회를 열었던 사람이지 않소. 그녀가 미래를 보여줄 수 있단 말이오?” 딕이 시몬에게 정보를 공유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시몬은 괜찮다고 답했다. 이어서 딕은 지금까지 얻어낸 정보들을 모두 왕태자에게 말해주었다. 안개가 가득했던 왕태자의 동공이 한결 선명해졌다. “그런 일이……! 그랬던 거였군!” 테이블에 올린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도 브리만티아라는 자에게 당한 거였소! 이대로 1군단의 손에 볼드윈 왕국이 송두리째 넘어가기 전에 어떻게든 말려야 하오! 부디 내게 힘을 빌려주시오!” “물론이죠!” 이렇게 볼드윈이 어지러울 때, 정식 왕가의 후계자이자 왕족이 이쪽 편이 되겠다고 나선 건 큰 이득이었다. 동기들의 분위기가 점점 끓어오르고 있는 그때. “최악의 상황에는, 해칠 수 있겠습니까?” 의자에 기대어 팔짱을 낀 헥토르가 말했다. 왕태자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누, 누굴 말하는 것이오?” 헥토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하의 아버지 말입니다.” 주위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세르네만이 여유롭게 풋 하고 웃었지만, 그 밖에 모든 학생들은 거의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못했다. “진정해, 헥토르.” 그나마 빨리 평정을 되찾은 로레인이 헥토르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옆의 딕은 식겁한 표정으로 한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 위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왕태자 저하! 오해입니다! 오해! 저놈이 사실 약간 그…… 아시죠?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해야 하나……!” “내가 틀린 말 했나?” 헥토르가 털썩 자리에 앉아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대륙의 불안 제거다.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선 원인인 1군단을 제거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굳이 볼드윈을 구하느라 돌아갈 필요가 없지.” 그의 눈이 게슴츠레 떠진 채 왕태자를 응시했다. “타인에겐 목숨을 걸라고 쉽게 종용하면서, 정작 본인은 목숨은커녕 빈말도 못 하는 자를 따를 이유는 없다.” 주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왕태자는 길게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대들의 목숨과 시간을 걸고 간청하는 건 내 쪽이니 내 거짓말은 안 하겠소.” 입술을 한 차례 벌벌 떨던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죽일 수 없소.” “…….” “하지만, 그 외의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소. 이번에도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폐위까지 결단하겠소.” 모두의 표정이 더더욱 경악으로 물들었다. 폐위라는 건 즉 왕위 교체. 지금 현역 왕태자의 입에서 ‘반역’이 튀어나온 것이다. 단순 임무로 시작한 일이 스케일이 너무나 커져 버렸다. “크, 크흠! 친구들? 갑자기 목이 막혀서 그런데 밖에서 마실 것 좀 사 올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딕이 한 걸음씩 물러나다가 이내 등을 홱 돌려 도망쳤다. 그러나 세르네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겨 다시 결계를 펼쳤고,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딕의 탈출은 제지되었다. 딕이 오두방정을 떨며 유리창을 텅텅 두들겼다. 다른 팀원들도 충격에 빠져 있는 가운데.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다면 쓸데없는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헥토르가 걸어 나와 살짝 고개를 낮추며 왕태자에게 예를 갖췄다. “협력하겠습니다.” “고, 고맙소.” 몇 분 사이 10년은 늙은 듯한 표정의 왕태자가 헥토르의 손을 맞잡았다. “그대는 정말 협조를 얻기 힘든 군단장이군. 내 역량 밖이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맞춰진 것 같자, 잠자코 지켜보던 시몬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하신 말은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최후의 수단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미뤄둬야 하니까요.”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이 일을 풀어나가는 게 좋을까요? 왕태자 저하.”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하오.” 왕태자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브리만티아에 대한 정보, 미래를 보여준다는 그녀의 힘, 그리고 지금 부활한 제국을 자처하는 1군단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와, 그것이 볼드윈에 해가 될지 아닐지까지. 전부 말이오!” 손톱을 다듬으며 ‘후’ 하고 바람을 불어놓은 세르네가 천천히 물었다. “여태껏 아버님을 설득하시는 데 계속 실패하셨는데, 증거가 있다고 해서 설득이 가능할까요?” “세르네 영애. 아버지는 늘 자기 생각이 확고하시지만, 그만큼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논파하는 걸 진정으로 반기는 사람이오! 아버지는 이 결단이 볼드윈 왕국을 위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소! 그 믿음만 깬다면 정신을 차리고 이 미친 짓을 멈출 거라 나는 확신하오.” “알겠어요. 그렇다면…….” 세르네가 손끝을 펼쳤다. 그녀의 등 뒤에서 아름다운 날개가 일어나더니, 이내 깃털의 형태로 흩어져 그녀의 손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내 날개 하나 분량의 깃털들이 응축되어 한 장의 깃털로 변했다. 프리즘 빛깔의 깃털이었다. “세뇌에는 세뇌로 맞서야죠. 이걸 사용하세요.” 그녀가 깃털을 왕태자에게 내밀었다. 왕태자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이, 이건 무엇이오?” “국왕 전하가 저하의 말을 조금 더 잘 듣게 하는 깃털이에요.” 그녀가 오호호 웃었다. “극단적인 방법보다는 낫잖아요?” 쿵-! 쿵-! 쿵-! 딕이 눈물을 쏟아내며 건물에 쳐진 결계를 두들기고 있었다. “왕위 찬탈에, 반란에, 이제는 왕족 세뇌냐고! 이번 임무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이즈야!” “걱정 마세요, 딕 헤이워드.” 세르네가 다리를 반대로 꼬며 웃었다. “일반 귀족이 왕족을 범접하는 건 심각한 반역이고 대부분은 그 끝이 좋지 않지만, 왕족과 왕족 간에 벌어지는 왕위 찬탈은 역사 내내 흔히 있는 일이에요.” “그런 말을 들어도 전혀 위로가 안 돼!”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왕태자가 일어나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대들은 내 고민을 상담해 줬을 뿐이고,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고 내린 판단이오! 붙잡힌다고 해도 그대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차라리 내 스스로 목숨을 끊겠소.” 그제야 딕이 주르륵 창가에서 흘러내려 앉아 머쓱하게 말했다. “그, 그렇게까지 하실 것까지야…….” “그럼 지금부터 정보 수집을 시작하자. 사흘 뒤 이 자리에 다시 모이는 거야.” 시몬이 동기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왕태자를 보았다. “지금 모든 국경이 폐쇄된 상태라 그런데, 볼드윈에 우리가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야 물론이오.” 왕태자가 얼른 말했다. “내 인장이 찍힌 친서라면 그게 누구든 길을 내줄 것이오. 어떤 협력도 아끼지 않겠소!” 그렇게 다시 한번 정보 수색 준비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다른 곳으로 연락을 넣으며 이번 일과 1군단에 대한 조사를 준비하려는 그때. 퉁! 퉁! 시몬에게 의외의 연락이 왔다. 창을 부리로 콕콕 찌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뭔가 했더니,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와 있었다. ‘저 까마귀는!’ 대륙에 흔히 보이는 까마귀와 달리 크기가 무척 컸다. 다름 아닌 칼로스 북부에서 온 까마귀였다. 시몬이 유리창을 열어주자 까마귀는 편지 한 통을 내려놓았고, 시몬이 그것을 펼쳐 읽었다. “뭔데 그래?” 딕이 아까 유리창에 박던 제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대공이 보낸 편지야.” 북부대공. 2군단장이자 키젠의 군단학 교수이기도 한 진 아르스칼트가 근래 일어난 문제로 시몬을 보자고 하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훑어본 시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쉽게 단서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는데.” * * * 다음 날 아침. 칼로스 북부. 아무리 가도 끝없는 북부의 설원. 방금만 해도 랭거스틴의 도심에 있던 시몬은, 어느새 흰 눈이 쏟아지는 북부에서 말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다. “승마 실력이 녹슬지 않았구나, 건방진 것.” 그곳에서 함께 설원을 달리는 여성이 있었다. 비단결 같은 흑발을 늘어뜨리고, 빈틈없이 몸에 딱 달라붙는 매끄러운 제복, 그 위로 어깨를 덮은 코트와 등 뒤에 메고 있는 커다란 장궁까지. 진 아르스칼트는 여전히 품격이 넘쳤다. 오랜만에 스승이자 선배를 본 시몬이 싱긋 웃었다. “그럼요. 한번 배운 건 오래가거든요.” “다행이구나.” 시몬이 말고삐를 가볍게 쥐었다. “방학 동안 북부에 일이 생겼다고는 들었는데, 대공의 복귀가 늦어져서 걱정하고 있었어요.” “바로 그 이유를 보여주려고 부른 것이니라.” 두 사람은 넓은 설원을 지나 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북부의 네크로맨서들이 결계를 펼쳐놓고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곳곳에 울타리가 세워져 있고, 천장에는 결계가 펼쳐져 눈이 내려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몬스터 부락이 눈에 들어왔다. “화이트 코볼트의 부락이다. 한파에 적응한 북부의 토착 몬스터지.” “그렇군요. 그런데 이건…….” 시몬의 눈이 커졌다. 부락 곳곳에 핏자국으로 그려진 수십 개의 마법진이 있었고, 그 안에 몬스터들이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화이트 코볼트들의 시체. 대량 학살의 흔적이었다. “살펴봐도 될까요?” “물론이다.” 시몬이 말에서 내려 현장을 자세히 살폈다. 원인은 명확했다. “핏자국으로 그려진 마법진의 흔적과, 그 안에서 죽은 몬스터들…….” 시몬이 굳은 얼굴로 진을 돌아보았다. “클래식하네요.” “그래, 피로 만든 마법진의 힘으로 몬스터를 가둬 죽인 거다. 낡고 고리타분한 방식이지.” 지금은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네크로맨서들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깔끔 떨고 지적이며, 냄새나는 언데드는 더럽다며 쓰지도 않는다. 가끔 아이돌이나 배우로도 활동하기까지 한다. 이런 때에 저렇게 피로 그린 마법진 안에 놓인 몬스터의 시체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너무나 구식이고 고전적인 방식. 아마 300년 전쯤에는 이런 게 네크로맨서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 흑마법이었으리라. “나도 처음에 보고를 받았을 땐, 시대에 뒤떨어진 미치광이 네크로맨서가 북부에 기어들어 와서 해부 실험이라도 하는 줄 알았느니라.” 진이 긴 머리를 쓸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지천에 널린 대륙에서 굳이 추운 북부까지 올 이유는 없겠지. 이 일을 벌인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눈이 많이 내리는 북부에서 실험을 벌이고 있었던 거다.” 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을 살피던 시몬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자세를 낮추었다. “이건…….” 이 피의 마법진 안의 몬스터는 기력이 빨리거나, 몸이 녹아내리거나 한 게 아니었다. 자상(刺傷). 발톱이나 칼날에 당한 상처가 보인다. 자기들끼리 싸운 것이다. ‘정신계열 흑마법인가?’ “집중해라, 건방진 것.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녀가 고갯짓하자, 현장을 지키던 북부군 병사가 뭔가를 내려놓았다. 핏물이 담긴 그릇이었다. “북부에서 발견된 이 피가, 현재는 북부 외의 장소에서도 빠르게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잠깐만요, 북부 외라면……!” 시몬의 머리에 팟 하고 스치는 이미지가 있었다. 볼드윈의 국경이나 도시 곳곳에, 네크로맨서들의 언데드와 저주를 막는다며 칠해져 있던 붉은 칠이 떠올랐다. “그래, 볼드윈 왕국이니라.” 무의미해 보이던 그것. 사실은 흉악한 음모의 일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할까? 이런 클래식한 마법진은 원을 그리는 게 중요해. 한 군데라도 끊긴다면 마법이 발현하지 않으니까.’ 도시에서 이런 종류의 마법을 사용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도시 한복판에 핏자국이 있으면 사람들은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 밖에도 누구라도 청소하거나, 아니면 바닥을 밟고 다니는 것으로 피의 마법진은 끊긴다. 하지만 지금 그런 핏물이 도시 곳곳에 펼쳐져 있어서 사람들이 이상하지 않게 여긴다면……. ‘큰일이야.’ 시몬이 급히 대공을 돌아보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피는 제가 가져가서 키젠의 아보 교수님께 성분을 의뢰해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니라.” 그렇게 말한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조심해라. 1군단은 강하니, 나도 일이 일단락되는 대로 합류하겠느니라.” 시몬이 씩 웃었다. “대공과 2군단이 도와준다면 든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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