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51화 볼드윈 왕국 남부에 위치한 도시, 에스트라넬. 이곳의 지하에서도 비밀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로브를 눌러쓰고, 빨간 촛대를 든 사람들이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가운데, 한 여성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아, 빈궁한 내 아이들아.] 그녀가 팔을 세우며 말했다. [단죄의 칼날이 내려온다. 이를 피할 방법은 오직 내 아들을 섬기는 것뿐이니라.] “프라슈마 마시아라.” “프라슈마 마시아라.” 사람들의 경건한 음성이 뒤따랐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오늘도 한 아이를 이 자리로 불러오마.]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이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모두가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저벅 저벅. 로브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남자가 사람들을 헤치고 멋대로 연단으로 나왔다. 불평 가득한 소리가 주위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불쑥 내뱉었다. “브리만티아?” 그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고.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문답무용. 남자가 팔을 휘두르자, 그녀의 몸에 새까만 선이 그어지더니 갈기갈기 찢어졌다. “꺄아아아아악!” “저 남자가 어머니를!”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태연히 손바닥을 펼쳤다. 새까만 비늘 조각 따위가 그의 손바닥에서 넘실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스스스스- 그사이 찢어진 황금실들이 뒤로 뭉쳐 다시 브리만티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몸 곳곳에 잘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너는 누……!] 뭐라 할 틈도 없이 남자가 입을 벌렸다. 시커먼 브레스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쏟아져 폭발했고, 사람들의 비명이 재차 울렸다. [크윽!] 불길에 휩싸인 브리만티아가 급히 몸을 빼내며 동굴 벽면에 그려둔 마법진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 마법진마저도 이미 비늘 조각들이 꽂혀 구성 요소를 깨뜨린 뒤였다. “네 능력과 수작질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헥토르가 태연히 손끝을 내렸다. “저주에 약한 것까지 말이다.” <말레디코(Maledíco)> 쿠쿵! 어느새 벽면과 천장 곳곳에 펼쳐진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그녀의 몸에 강력한 탈진 저주를 가했다. 그녀가 큭! 소리를 내며 몸을 낮췄다. “암흑연합에서 보낸 암살자다!” “비열한 놈!” 사람들이 험악하게 야유했지만, 헥토르는 그들을 무신경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리고 지하에 숨어든 네놈들 역시 떳떳한 처지는 아닐 텐데.” 그가 품고 있는 용의 힘을 끌어올린 뒤, 눈을 부릅떴다. <드래곤 피어> 헥토르의 몸에서 일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 피어의 영향권에 들어온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알아서 출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흴 주렁주렁 달고 싸울 여유 따윈 없다.” 그렇게 중얼거린 헥토르가 저벅 저벅 다가왔다. [나의 아이야.] 브리만티아가 저주에 버티면서도 미소 지었다. [배신의 칼날이 너를 단죄할 것이다.] “녀석이 말한 데스나이트 호위도 없군. 이쪽은 꽝인가.” 헥토르가 손바닥을 펼치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사라져라.” 이어지는 칠흑 화염계가 브리만티아를 불태웠다. * * * 같은 시각. 카르델 영지 비밀 집회 장소. “후읍!” 촤아아아아아아악! 시몬도 마누스와 함께 진입하여 이곳의 브리만티아를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본체가 아니었고, 이번에도 황금실처럼 풀려서 사라졌다.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치는 사이, 시몬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사실 지금 브리만티아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정신없는 일이 벌어져 버렸으니까. ‘볼드윈 왕국의 독립이라니.’ 이번 회의는 4대 왕국은 물론 암흑연합과 키젠을 비롯하여 핵심 기관들이 참여한 대규모 회의였다. 최중요 안건은 드레스덴 왕궁 침범 사태와 1군단의 제재.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시몬, 헥토르, 메리다의 군단전에 대한 논의였다. 현 규칙상 암흑연합 회의에서 안건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4대 왕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볼드윈 국왕이 1군단에 대한 연합군 설립에 연달아 반대표를 행사했고, 뒤이어 역사에 남을 만한 대형 사태를 일으켰다. -금일부로 볼드윈 왕국은 암흑연합에서 탈퇴하며, 독립국으로서 나설 것을 천명한다. 볼드윈의 독립선언은 그야말로 대륙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지금껏 암흑연합이 발효된 이후로, 가맹국의 탈퇴는 존재하지 않던 일이었으니까. 각국의 왕들이 해명과 탈퇴 이유를 요구했지만, 볼드윈 왕국은 덤덤히 ‘국가의 존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란 말만 남기고 공식 석상에서 물러났다. 암흑연합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영토, 정치, 군사, 경제 등 볼드윈 왕국이 관련되지 않은 분야가 없었기에 모든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며 행정 체제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볼드윈 내부에서 브리만티아 급습 작전을 펼치던 시몬 일행도 계획을 대폭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시몬과 헥토르는 가짜를 제거했지만, 다른 팀원들은 브리만티아를 급습하기 전에 왕국군에게 제지당했다. -볼드윈 왕국 내에서는 허가를 받은 내국인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외국인은 즉각 퇴거해 주십시오. 여기서 볼드윈 왕국이 말하는 ‘내국인’의 조건도 까다로웠는데, 특히 암흑연합과 관련된 인물은 볼드윈에서 출생했을지라도 해당 직책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는 한 내국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키젠 학생들은 볼드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계획의 변화가 필요했다. * * * 우선 시몬의 팀원들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대도시 랭거스틴의 숙소에 모이기로 했다. 3학년 2학기가 시작하기 전, 딕이 예약했던 바로 그 회의실을 겸한 큰 숙소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가장 먼저 도착한 딕은 충격에 빠진 채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볼드윈 왕국이 암흑연합에서 독립한다고?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럼 화폐는? 유통은? 우리 학교에 다니는 볼드윈 애들은?” 하암- 회의실 구석에서 누워 하품을 한 차례 한 메리다가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시작해 보기도 전에 막혀 버렸네.” 모두가 깊은 침묵에 빠진 사이, 멀쩍이 떨어진 자리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로레인이 테이블 위에 통신 수정구 수십 개를 가져다 놓고 끊임없이 연락을 받고 있었다. 미래의 암흑연합 총수인 그녀에게도 온갖 연락이 쇄도하고 있는 모양. 한참을 통화한 뒤에야 연락이 일단락된 로레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로 돌아왔다. “많이 바쁜가 보네요? 죽음의 마녀의 따님.” 세르네가 싱글거리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찾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이만 키젠 본부로 돌아가도 돼요.” “난 여기 남을 거야.” 로레인이 단호하게 답했다. 다시 울리기 시작한 통신 수정구의 전원을 냉정히 꺼버린 그녀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위에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냐. 누구라도 발 벗고 나서서 행동해야 할 때지.”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났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사태 해결에 가장 가까운 게, 시몬이 이끄는 이 팀이라고 생각해.” “크으!” 그녀의 말에 딕이 감탄을 터뜨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로 우릴 고평가하다니! 좀 쑥스러운걸?” 그 말을 들은 헥토르가 코웃음 쳤고, 딕이 벌게진 얼굴로 그 비웃음은 뭐냐고 따져댔다. “늦었다.” 쏴아아아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밖의 빗소리가 들렸다. 우산을 쓰고 나타난 카쟌과 시몬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이제 올 사람은 모두 왔네요.” 세르네가 손가락을 튕겨 건물에 쳐둔 결계를 강화했다. 시몬이 회의실 중앙에 앉았고, 그제야 침낭 속에서 빈둥거리던 메리다도 꿈틀꿈틀 애벌레처럼 기어와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이번 회의에는 카쟌이 브리핑하기로 했다. 전보다 더 수척해진 얼굴의 그가 모두의 앞으로 나왔다. “정보의 과다다.”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전례 없는 사태로 온갖 유언비어와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퍼지고 있다. 암흑연합의 주민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두려워하고 있지. 이 회의에서는 최대한 확실한 사실들만 전달하겠다.” 딕이 손을 들었다. “그럼 불확실하지만 그럴듯한 소문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카쟌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볼드윈 왕국의 지도를 꺼내 칠판에 붙였다. “볼드윈 왕국은 독립선언 직후, 전 영토의 국경을 철저히 봉쇄하고 병력을 전진 배치하고 있다.” 그가 손끝으로 국경을 쭉 훑었다. “외국인들을 빠르게 추방하고, 다른 국가와의 모든 교류와 협력 관계를 일방적으로 중단했지. 거기에 왕국 전역에 설치된 통신탑을 파괴하거나 봉쇄하고 있다더군. 명목상으로는 암흑연합과의 단절을 선언했으니 도청을 비롯한 흑마법 테러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시몬이 두 손에 깍지를 꼈다. “이건 마치 스스로 고립되려는 것 같네요.” “그렇다.” 카쟌이 눈 밑의 상처를 슥슥 긁으며 말을 이었다. “볼드윈 왕국은 중간무역으로 부를 불려왔고, 연합이 공고할수록 이익을 보는 나라다. 연합을 탈퇴하는 나라가 있다면 샤헤드 왕국 정도를 생각하지, 볼드윈이 떠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더 혼란이 커진 것도 있다.” “카쟌의 말이 맞아요. 암흑연합도 타격이 있겠지만, 가장 큰 피해는 오히려 볼드윈 왕국이 받을 거예요.” 로레인이 말을 받았다. “극심한 손해를 무릅쓰고서라도 스스로 암흑연합을 탈퇴한 이유가 뭘까요?” “그야 뻔하지.” 지금까지 말을 아끼고 묵묵히 듣고 있던 헥토르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볼드윈의 국왕은 나라의 존립을 국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제국’ 외 달리 생각할 건 없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결국 모든 사건들이 제국을 자처하는 1군단과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몬도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다행히 부모님과 레스힐은 무사한 것 같지만…….’ 시몬은 통신이 단절되기 전에 고향에 연락을 해보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극지의 산골 마을인 레스힐은 평화로운 일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독립 소식마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몬이 고심하고 있는 그때. “아.” 세르네가 눈을 깜빡였다. 시몬이 상념에서 깨어나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세르네?” “누군가 결계를 쳐둔 이 저택에 들어오려 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내가 가볼게.”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결계를 걷어줘, 세르네.” 시몬이 문을 향해 걸어가 앞에 섰고, 그 모습을 본 세르네가 손가락을 튕겼다. 결계가 해제된 것을 느낀 시몬이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고.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리는 랭거스틴의 거리. 그 앞에 한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힘겹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면목 없소.” 그의 첫마디였다. 남자를 알아본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왕태자 저하!” 볼드윈의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이곳에 직접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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