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03화 낙원. 그것은 데바교의 원점이자, 근본이자, 이상향이다. 데바교 경전의 첫 장에 기록된 장소이자 신에게 선택받은 땅이라 일컬어지는 ‘낙원’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집요했다. 실제로 경전에 기록된 성물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것은 신성연방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사업 중 하나인데, 이 과정에서 해석이 완료된 성물의 가치는 어마어마했고, 어떤 것은 암흑연합과의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전략병기로서 기능하게 되기도 했다. 그중에서 이것이 실존한다면 단번에 힘의 균형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진 것이 바로 태초의 땅, ‘낙원’. 현재 낙원은 소멸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하늘섬만이 낙원의 일부로 남아 있다는 게 에프넬 측의 교리 해석 내용이다. 하지만 지식인들과 탐험가들은 여전히 낙원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 굳게 믿고 신성연방 전역을 쥐 잡듯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중요한 유적은 거의 다 발견되었고 이제 더 새롭게 발견할 장소는 없다고 여겨지며, 사람들이 하나둘 모험에서 손을 놓는 사이. 의외로 위대한 발견을 해낸 인물은 신학자도, 하늘섬에서 고용된 탐험가도 아닌, 중립지대에서 온 밀렵꾼들이었다. -우리가 낙원을 찾아냈다! 신성연방 극서지역, 한 거대한 호수 인근에서 놀랍도록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과 폐허를 발견한 것. 심지어 이 유적의 일부는 ‘하늘에서 떨어진’ 흔적이 있었다. 발견 당시 유적은 무성한 수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하늘에서 찾을 수 없었고, 대부분의 신성연방 신도들은 신성한 숲이라며 들어가는 걸 꺼려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규칙을 무시하고 돈만을 좇던 밀렵꾼들이 이곳을 발견한 것이다. -낙원이 또 발견됐다고? 그 발견은 하늘섬에 사는 에프넬 측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뒤집힐 만한 사건이었다. 기득권인 에프넬 측에 있어 ‘통일된 교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늘섬만이 유일한 낙원이어야 했기 때문에, 지상에 또 다른 낙원이 있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들이 오랜 세월 지켜온 유적을 지키려는 숲의 소수민족들이 이에 결집해 맞섰고, 바로 그 과정에서.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소수민족 측에서 새로운 성녀가 탄생했다. 몇 년간 주인을 고르지 않고 까다롭게 굴며 대기권을 떠돌아다니던 성녀의 정수 하나가, 하필이면 전쟁 중인 소수민족의 한 소녀에게 깃든 것. 너무 많은 이들이 그녀의 각성 장면과 힘을 목도했다. 심지어 새 성녀의 각성을 본 병사들 중 일부가 그녀를 성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무기를 놓고 전투를 거부했다. 하늘섬의 대주교들 입장에서는 머리가 지끈거릴 문제였다. 아예 전술병기로 그곳을 흔적 없이 날려 버릴 계획까지 꾸미고 있었는데. -제가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로서 이 전쟁을 중재하겠습니다. 소수민족 성녀는 직접 하늘섬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영리했고, 하늘섬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우리 아록의 프리스트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성전을 받들며, 하늘섬만이 유일한 낙원임을 선언합니다. 자신들이 ‘낙원’임을 포기하는 대신, 성전에 나와 있는 또 하나의 성역 ‘아록’을 자신들의 지명으로 삼은 것. 그리고 성녀가 하늘섬의 교황을 만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충성 서약을 하게 된다. 이로써 하늘섬의 전쟁 명분도 상실. 소수민족의 성녀는 정식 성녀로 인정받았고, 유적 근방은 ‘낙원’이 아닌 ‘아록’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와…….” 시몬의 입이 벌어졌다. “뭔가 엄청난 대서사시를 들은 기분이네.” 그렇게 말하는 시몬이 손바닥을 펼치자 정령들이 포근히 내려앉아서 속닥거렸다. 하미엘이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엄청난 쪽은 이쪽 같긴 한데요.”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게, 아록은 지금까지도 신성연방의 위대한 4대 성역 중 하나로 불리게 되었어요. 사실 그때 당시의 하늘섬은 아록의 성녀가 사망한 뒤를 노리고 있던 것 같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녀의 정수는 성녀가 죽어도 같은 지역의 소녀에게만 깃들었거든요. 명맥이 이어지게 된 거죠.” “신기하네.” 하미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하늘섬은 이제 정쟁과 권력투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곳이 됐어요. 살기 좋은 곳으로 따지면 아록이야말로 신성연방 최고의 낙원에 가깝다고 해요.” “빨리 가보고 싶다.” 정령은 깨끗한 대자연 속에서 주로 태어나고, 신수 또한 신성이 깃든 숲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그 두 가지 모두 가득하다는 ‘아록’. 물론 성녀의 정수를 얻는 임무가 우선이지만, 반드시 한번은 경험해 보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신성연방의 4대 성역, 아록으로 떠나기 이틀 전. 시몬은 하미엘로부터 정령술의 기초를 배우고 공부했다. -정령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장 순수한 마나를 빠르고 정밀하게 뽑아내는 기술이라서 다른 마법에 응용이 된다는 점이에요! 나중에 프리스트의 백마법을 운용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네크로맨서들에게도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 하미엘은 정령 위에 천을 얹고, 그 위에 광휘를 더해서 일종의 간이 ‘성령’을 만들어냈다. 그 불안정한 짝퉁 성령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고 활동했으며, 또래의 에프넬 성령사제들을 제치고 룬 리그 멤버로 선발될 정도였다. 이 모든 게 정령술의 성과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거기에 시몬은 아버지 리처드 폴렌티아로부터 정령술 책을 물려받았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모르겠구나. 리처드가 집안 창고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한 책 뭉치들을 꺼내주었다. 시몬이 그것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정령술이 크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칠흑의 기반이 되는 마나를 숙달하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될 거다. -하미엘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시몬은 이틀간 정령술의 기초를 배웠다. 아직은 하미엘이 불러낸 정령들만 보거나 교류할 수 있고, 직접 정령을 불러낼 수는 없었지만 하미엘은 빠르게 실력이 붙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왜 마나 숙달에 도움이 되는지는 금방 깨달았다. -마나에 불순물이 들어갔어요! 더 정밀하게! -으음, 생각보단 어렵네. 마나가 불순하면 애초에 제대로 정령술을 구사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정령술을 배우고 새로운 동료들과 신성연방의 지식을 점검하는 사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고. 그렇게 이틀 뒤, 시몬과 모제, 하미엘이 짐을 챙기고 신성연방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출입 과정은 늘 그렇듯 비슷했다. 마차를 타고 레스힐 옆의 이웃 도시인 호브에 이동한 뒤, 호브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국경 브로커를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네요.” 매 방학 동안 거의 연례행사가 됐기에, 시몬은 브로커와 태연히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지금까지 시몬과 레테를 아무 문제도 없이 국경을 넘게 해준 업계 최고의 실력자였다. 곧바로 브로커가 준비한 비공식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호브에서 중립지대 인근으로 이동. 중립지대에서 브로커가 상단으로 위장한 짐마차로 일행들을 데리고 갔다. “……애석하게도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 “근래 결사의 공격으로 연방이 뒤숭숭해져서, 중립지대에서 신성연방으로 가는 천국의 문의 단속이 삼엄해져서 말입니다. 하나의 화물 상자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몬과 모제, 하미엘은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브로커가 가리킨 짐마차에 실려 있는 건 화물용 상자 딱 하나였다. “못 타 못 타 못 타! 절대 못 타요!” 하미엘이 질색팔색하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사람 셋이 저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보다 소관이 남자들 둘이랑 어떻게 저기에 들어가냐구요!” “나야말로 질색인데.” 모제가 경멸 섞인 눈으로 하미엘을 바라보았다. “축복을 줘도 제대로 못 다루는 범재가 내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텅 비는 병이 도질 것 같단 말이다.” 그렇게 말한 모제가 시몬을 돌아보았다. “물론 당신은 예외입니다.” “……별로 기쁘진 않네.” 시몬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모제가 고개를 홱 돌려 브로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기 당신, 이런 상자에 이분을 모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모제가 오른손을 쫙 펼치더니, 화물 상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화아아아악! 모제가 가진 최고의 능력인 ‘성물화’의 권능이 발휘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조차 성검으로 만드는 힘. 그의 힘이 닿자 상자가 갑자기 크게 변하며 은빛으로 반짝였고, 호화로운 문양이 새겨지고 내부가 푹신하게 변했다. 평범한 화물 상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이 들어 있을 것 같은 보물 상자로 변했다. 모제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내밀었다. “타시죠. 당신에겐 이곳이 어울립니-” “안 됩니다!” 브로커가 딱 잘라 말했다. “이단심문관들에게 제발 수사해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겁니까? 제 밀입국 통과 100% 기록을 박살 내려고 이러는 거라면, 저도 이번 일에서 손 떼겠습니다!” “뭐라? 불법으로 벌어먹는 무엄한 놈이 감히……!” 모제가 더 말하려는 걸 하미엘이 뜯어말리고 시몬이 몇 번이고 설득한 뒤에야 브로커의 화가 풀렸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시몬이 모제에게 고개를 붙잡고 사과하도록 했다. 브로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에도 이유는 있는 법입니다. 그래도 단골이시니 이번만은 넘어가겠습니다. 문제는 이제 연방 측으로부터 사전 승인받은 화물 상자가 하나밖에 안 남았다는 건데…….” “네?” 브로커가 저기 바닥에 대충 떨어져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저기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군요.” 아까 것에 비해 훨씬 오래되고 작은 상자였다. 시몬과 하미엘이 조용히 모제를 노려보았고, 모제는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입맛을 다셨다. 하늘섬에서 평생 나고 자란 이 철없는 도련님을 케어하는 게 꽤 쉽지 않을 거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 * * 중립지대&신성연방 국경. 신성의 문. 덜컹 덜컹 덜컹! 무수한 상단들의 짐마차가 열을 지어 국경을 넘어 신성연방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많은 상자 중 하나에. “…….” “…….” “…….” 시몬과 모제, 하미엘이 밀착하다 못해 들러붙다시피 해서 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요.” 하미엘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녀의 발바닥에 닿아 뺨이 찌그러져 있는 모제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너야말로 이 울분의 대가는 치러야 할 거야. 범재.” “우왓! 시몬 형제님! 움직이지 마요!”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은 처음인지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최선이에요? 사람이 못 할 일이에요!” “이번만큼은 범재의 말에 동의합니다! 성자님!” 그 말을 들은 시몬이 태연한 반응이었다. 이제 상자와 한 몸이 된 듯한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레테는 물론 이스라필 이모도 예외 없이 상자에 갇혀서 국경을 넘었어. 너무 불평하지 마.” “…….” “…….” 두 사람의 입이 쏙 들어갔다. 더 이상 그 둘은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시몬은 슬쩍 밖을 보았다. ‘다 왔다.’ 드디어 천국의 문이 보인다. * * * 같은 시각. 휘오오오오오! 전장에 홀로 우두커니 남아 있는 하얀색 머리카락의 프리스트가 서 있었다. 황혼을 연상케 하는 적막한 노을을 짊어지고, 그녀는 우뚝 선 채 멈춰 있었다. 고원 곳곳에 몬스터들의 시체가 산을 쌓고 있었고, 그 주위는 온통 운석이 떨어진 듯한 거대한 구덩이가 가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프리스트가 다가와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이를 신의 기적이라고 하겠지요. 이런 모습을 목도한 신도들이, 어찌 신의 존재를 부정하겠습니까.”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저기 주민들의 환호하는 광경을 보십시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모두 성녀님의 이름을…….” “야.” 싸늘한 음성에 프리스트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그러다 자신을 ‘야’라고 부른 것에 뒤늦은 거부감이 생긴 듯 삐딱하게 입꼬리를 꿈틀꿈틀했다. “성녀님, 단둘이서는 상관없지만 부하들 앞에서는 주교로서의 위엄을…….” “내가 이야기했지.” 쓰으. 그녀가 백발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눈동자에 눈부신 별 모양의 안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위 사제들 앞에서 예쁘게 웃는 인형으로 쓰든, 민심 뒤집는 도구로 쓰든, 전쟁병기로 쓰든 상관없으니까-” 고오오오오! 그녀의 웃는 고운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방학 때만큼은, 쉴 거라고.” 꿀꺽. 주교가 목구멍에 침을 한 차례 삼켰다. 이스라필이 이야기를 해두긴 했었다. -방학 때 레테를 데려가 쓸 거면,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주교가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전투가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아서 죄,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구원자는 막강합니다! 아, 말씀 중에 죄송……!” 그녀가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적의 새로운 공세 발견! 좌표를 보냅니다! 노벰버-빅터, 4541, 15435……. “아우!” 그때 레테가 하늘을 향해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취하더니, 거칠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밤하늘이 출렁이더니 무수한 혜성이 하얀 꼬리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좌표를 읊고, 몬스터들의 종류와 숫자에 대해 보고하던 프리스트가 급히 정정했다. -저, 적이 전멸하고 있습니다! 이럴수가! 이런 방대한 신성이라니! 저는 기적을 목도하고 있습……! 쿵. 놀란 주교가 통신 수정구를 떨어뜨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겠슴다.” 레테가 뚜둑 뚝 주먹을 풀며 말했다. “다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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