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48화 “저는…….” 가만히 고민하던 시몬이 마침내 천천히 눈을 뜨며 왕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왕태자와 이왕자가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창가에 앉아 있던 제독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시가를 입에 물었다. “바, 받아들일 수 없다니! 혹시 내 제안이 부족했던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제안입니다. 하지만…….” 시몬은 잠시 먼 과거, 7군단 사태에 휘말린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카르델과 인근 지역을 다스리는 건 결국, 그 지방의 주민들만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물론 몬스터를 몰아내는 건 경중을 따질 수 없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저는 7군단의 힘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아…….” “대공이 대륙을 위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거대 몬스터들을 막아주는 것처럼, 왕녀께서 유령궁을 지키고, 제독이 바다를 수호하는 것처럼, 저도 장래에는-” 시몬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대륙을 위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오며 시몬의 푸른 앞머리가 한 차례 흔들렸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왕태자는, 입을 달싹거리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두 팔을 파르르 떨었다. 하하하하하! 결국 커다란 웃음을 터뜨린 그가 참지 못하고 옆에 앉은 이왕자를 붙잡아 마구 흔들었다.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어! 대단하지 않느냐 막내야! 그릇의 크기가 달라! 이런 인물이 볼드윈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느냐!” “아파요, 형님.” 이왕자가 툴툴댔다. 손을 떼어놓은 왕태자는 장난기 섞인 눈으로 제독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오 제독!” 제독은 아무 말 없이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가, 담담하게 시가를 물고 연기를 뿜었다. “키젠에서 졸업하면 저놈을 누가 데려갈지, 아주 치열하겠군.” “……하하.” 왕태자가 다시 시몬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도 더 강요할 수는 없을 것 같소. 하지만 중부도독 자리에 대한 제안은 앞으로도 유효하니, 혹시나 생각이 바뀌면 찾아주시오.” “감사합니다.” 그가 이번엔 이왕자의 어깨를 툭 쳤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이 약속을 기억하고 실현해야 한다, 둘째야.” “아, 자꾸 왜 그러세요 형님.” 이왕자가 정색을 하며 그의 팔을 치웠다. “형님이 직접 왕이 되셔서 약속을 지키시면 되잖습니까.” “음, 그 말도 맞구나.” 그렇게 잠시 곁길로 샜던 이야기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시몬은 볼드윈이 국경을 열어주고 군단 통행의 자유를 부여할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1군단의 영역으로 향하는 여정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고, 왕태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직 왕이 아니라 권한이 제한적이지만, 반드시 아바마마를 설득해 보겠소. 약속하오!” “감사합니다 저하.” 그들이 화기애애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형님! 왜 그를 만나주시는 겁니까!” 덜컹! 왕태자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또 한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누구?’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시몬 정도의 또래에 마른 체구, 다른 두 형제와는 달리 창백한 느낌이 감도는 갈색 머리에 치렁거리는 제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손님이 왔다, 헨릭. 예의를 차리거라.” “지금은 중요한 시깁니다!” 다소 화가 난 듯한 그가 두 팔을 벌렸다. “이제 네크로맨서의 시대는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겁니다!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군단장을 왕태자실에 들이다니,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헨릭!” 천장이 떠나갈 듯 호통을 친 왕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백성들이 이상한 소문에 흔들릴지언정, 네가 그러면 아니 되지 않느냐!” “소문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시대의 끝자락입니다! 300년 전에도 그랬듯, 중소왕국인 볼드윈은 처세를 잘해야 살아남습니다! 결사의 공세로 암흑연합의 힘은 꺾였고, 죽음의 마녀는 앓아누웠습니다. 반면 1군단에서는 황제가 부활해 굳건한 제국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그들의 힘을 보셨지 않습니까?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건 그들뿐입니다!” “시끄럽다!” 왕태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가 어디 있고, 제국이 어디 있단 말이더냐!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왕국의 운명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만에 하나 제국이 살아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암흑연합과의 의리를 지킬 것이다!” 쯧. 헨릭이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이리 시대의 흐름에 무지하시니, 왕국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그가 시선을 돌려 시몬을 응시하며 이를 갈았다. “시몬 폴렌티아……. 오랜만이군.” 이 모든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누구세요?” 휘청. 잠시 다리가 삐끗하여 자리에서 넘어질 뻔한 헨릭이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날 잊었는가! 같이 룬 리그 합숙도 참여했거늘! 하운드 키즈의 삼왕자 헨릭 볼드윈이다!” ‘아, 하운드 키즈.’ 조금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룬 리그 합숙에 같이 참여했다가, 결국 룬 리그를 사퇴하고 물러났던 그 삼왕자였다. 사실 별로 중요한 기억은 아닌 것 같았다. “크윽!” 그리고 헨릭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날카롭게 말했다. “네놈도 군단을 가졌다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잘 판단해라! 결사를 아무리 많이 쓰러뜨렸다고 한들, 큰 흐름은 바꿀 수 없다!” 시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언 새겨듣겠습니다.” “제독께도 똑같이 드리는 말이오.” 헨릭이 이번엔 시가를 태우고 있는 남부제독, 라즌을 바라보았다. “내 집무실에 와달라고 그렇게 간청했거늘, 사가루인에 왔으면서 형님을 먼저 만나다니 섭섭하오. 내 아바마마께 해역 통제를 풀어달라 잘 말씀드릴 수 있소!” 후우우- 시가 연기를 뿜어낸 제독이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답지 못한 육지인의 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라.” “크웁!” 역시 인외권력. 헨릭의 얼굴이 전보다 더 붉어졌고, 시몬은 잠시 속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후회하게 될 거요!” 그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헨릭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주위가 조용해졌다. “못난 동생을 대신해 사과드리겠소.” 왕태자가 침울한 얼굴로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시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궁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왕태자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약 300년 전, 볼드윈 왕족은 제국과 황제에 충실한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을 배신하며 암흑연합의 편에 섰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중요한 귀족들을 없애는 등 궂은일도 많이 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지금까지도 볼드윈 왕국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이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불안한 소문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궁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흑흑흑. 집무실로 향하는 볼드윈 국왕의 앞에, 기사의 시대 시절 조상들과 시조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 심지어 하인에게 깃든 조상이 ‘배신자’라며 꾸지람을 하기까지 했다. 이에 볼드윈의 왕실 네크로맨서들이 흑마법의 흔적을 쫓았지만 여전히 원인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입에 담는 것조차 불효인 걸 알지만…… 아바마마는 미쳐가고 있소.” 왕태자가 이마를 슥슥 문질렀다. “사가루인 밖에 사는 친척들도 아무 이유 없이 종적을 갖추고 있지. 뭐, 그런 건 귀족 문화 특유의 암투라고 넘어간다 쳐도, 요 한 달간 왕국 전체가 소문으로 뒤흔들리는 건 사실이오.” 그가 피폐해진 얼굴이 되어 눈썹을 모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제국이 돌아온다는 말은 허무맹랑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문이었소! 그런데 드레스덴 별궁 습격 사건 이후, 백성들이 제국의 존재와 그들의 귀환을 진지하게 믿고 있소! 심지어 암흑연합을 버리고 제국의 편에 붙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그 말을 들은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전에 봤던 그 미망인 브리만티아의 힘.’ 그녀는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어떻게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까지 사람들을 홀릴 수 있을까. 역시 단순히 언변이 좋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황제가 원한 게 그 브리만티아의 힘이고, 브리만티아가 그 힘을 통해 볼드윈 왕국을 동시다발적으로 흔들고 있다면. ‘갑자기 제국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늘어난 것도 이상하지 않아.’ “내가 강요할 수는 없지만, 언제가 됐든 제국의 망령과 1군단장 헤일을 처단해야 한다 생각하오.” 왕태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암흑연합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말 거요.” * * * 왕태자와의 면담이 끝낸 뒤 시몬은 로크섬으로 되돌아왔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며칠 뒤에 암흑연합이 주최하는 4왕국 회의가 열리는데, 그곳에서 왕태자가 국왕을 설득해 ‘1군단과의 전면전’을 핵심 안건으로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전 세력이 힘을 모은 연합군이 갖춰진다면, 제아무리 최강이라 불리는 1군단이라도 방도가 없을 것이다. 휘이이이이잉-! 그리고 여전히 학교에서는 ‘합숙 훈련’의 막바지 일정이 한창이었다. 많은 키젠 학생들이 과제를 수행하느라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시몬은 언덕 위에서 마검을 든 마누스와 이런저런 교감을 나누는 중이었다. 살랑- 특히 시몬은 마누스에게 ‘검’을 배우고 있었다. 단순히 검술이나 무도가 아닌, 진짜 ‘검’을 익혔다. 마누스가 시범을 보이듯 마검을 뽑아 세웠다. 그리고 내려오는 나뭇잎에 칼이 닿는 순간 부드럽게 반으로 갈라져 쪼개졌다. 시몬이 감탄하며 자신도 검을 세워 들었지만, 나뭇잎이 닿는다고 쪼개지지는 않았다. “으음……!” 쉽지 않았다. 마누스는 목검으로도 해내는 걸 보니, 단순히 절삭력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역시 마누스가 가르치는 클래식한 검의 세계란 네크로맨서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배우고 싶었다. ‘베이지 않았어.’ 브리만티아와의 전투에서, 시몬은 그녀의 실을 벨 수 없었고 마누스는 그녀의 실을 베는 게 가능했다. 앞으로 벌어질 1군단과의 전투에서는 어느 정도 제국의 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시몬은 조금 더 검을 정진해서, 주머니에 있는 브리만티아의 실을 자를 수 있도록 단련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을 하는 도중. “시몬-!” 한 여학생이 시몬이 훈련 중인 언덕 위로 뛰어 올라왔다. 검을 휘두르던 시몬이 이내 활짝 웃으며 미소 지었다. “카미!” 다름 아닌 카미바레즈였다. 그녀가 쪼르르 달려와 에헤헤 웃으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아보 교수님이 부르세요!” 그녀가 말했다. “시몬의 오리지널 흑마법인 ‘친위대’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해요!”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아보 교수님이……?’ * * * 그렇게 카미바레즈와 함께 아보 교수가 기다리는 혈류학관 뒤뜰에 도착했고. 시몬은 당혹스러운 광경을 마주하게 댔다. 부우우웅! 파아아아앗! 수많은 ‘아보’들이 에메랄드빛에 반짝인 채 엄청난 속도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달리는 아보, 물구나무서서 걷는 아보, 하늘을 나는 아보까지. 세상이 에메랄드빛 궤적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정신없었다. ‘이게 다 뭐야?’ 시몬이 멍해 있는 그때. “그래, 시몬. 여기란다.” 공원 벤치에 태연히 앉아 있는 아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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