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64화 파멸의 대검이 황금빛 실을 부드럽게 베어냈다. 브리만티아의 놀란 표정이 드러났고, 시몬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파멸의 대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그녀의 어깨가 깊숙이 베였다.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아직이야!’ 시몬이 몸을 빙글 돌리며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양단하기 위해 검을 높게 들어 올리는 그때. 팽팽-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새 황금실이 검의 손잡이와 검신을 붙들고 있었다. [검의 극의를 익혔구나. 볼 때마다 실력이 달라져 있는 건 놀라우나.] 그녀의 손안에 금빛 창이 번쩍이며 만들어졌다. [끝이다.] 촤악! 그녀가 창을 내질렀고, 시몬이 즉시 고개를 꺾어 공격을 피한 뒤 피어의 본 아머에서 뛰쳐나왔다. 맨몸이 된 시몬이 칠흑을 뿜어내며 그녀에게로 접근했다. [같은 상황의 반복이구나. 그렇지 않느냐?] 스르르륵! 다가오는 시몬을 막기 위해 브리만티아가 황금실을 감옥의 창살처럼 촘촘히 펼쳐냈다. 그러나 시몬은 멈추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검이란 무.’ 극의의 가르침을 손에 담은 채, 시몬이 맨손인 손날을 옆으로 그었고. 촤락! 황금실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말도 안 되는……!] 그대로 실을 자르고 돌파한 시몬이 마무리를 위해 손을 아래서 위로 휘둘렀다. 손날이 그녀의 옆구리에 파고들고, 가위로 종이를 찢듯이 그대로 양단하려는 순간. 터업! 그녀의 손바닥이 시몬의 얼굴을 덮었다. * * * 주위의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당황한 시몬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피부에 뜨거운 열기가 닿았다. 그러다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고, 시몬은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화륵! 화륵!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여기는…… 랭거스틴?’ 도시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무너져 있고, 시커먼 단색의 탑이 기형적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보통의 불이 아닌, 기둥처럼 세워진 화염이 이글거리며 주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 그리고 싸우다 흩어진 언데드들의 잔해도 보인다. 순간적으로 이곳은 대륙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만큼 크게 바뀐 풍경. 무엇보다 하늘이 다른 세계의 하늘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가 정말 대륙이라고?’ 시몬은 멸망의 순간을 보고 있었다. 그가 터벅터벅 걸었다. 도시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면에는 썩어가는 살덩이와 해골이 겹겹이 쌓여 있어 그대로 딛고 걸어야 했다. 창가마다 축 늘어져 있는 사람들. 괴로워 스스로 목매단 사람들까지. 저 멀리 바다 너머로 보여야 할 로크섬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고, 그 자리엔 파편만이 떠다녔다. 시몬은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걸었고, 이내 눈앞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무수한 시체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남자는 잘린 대검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멍하니 있었다. 시몬이 다가가 그 모습을 확인했다. ‘……!’ 빛이 바랜 머리카락, 겉옷 안으로 다 찢어진 낡은 키젠 교복. 박살 난 피어의 배지. 반쪽으로 잘려 나간 파멸의 대검. 이것은 미래의 나 자신이었다. ‘대체…….’ 당황한 시몬이 동공을 흔들고 있는 이때. 스스스스- 언데드가 된, 뼈만 남은 자신의 두개골이 움직여 시몬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 * * “허억!” 시몬이 눈을 크게 뜨며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그는 노바렌 상공에서 지면에 내려온 상태였고, 바로 앞에는 친위대의 검에 여러 차례 찔린 채, 여전히 시몬의 얼굴에 손을 얹고 있는 브리만티아가 있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미래를 보았구나. 아이야.] 시몬은 전신에서 일어나는 강한 떨림을 느꼈다. 돌아온 직후 온몸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미래였다고.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광경이었다. 시몬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대륙의 운명이라는 건가?” [그래.] “결사의 공격으로?” 그녀가 손으로 시몬의 뺨을 쓸었다. [인간은 분열하고 갈등한단다. 심지어 공동의 멸망 앞에서도 옆 사람이 나보다 오래 사는 걸 시기하는 게 인간이지. 인류가 결집하지 않으면 세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질 거란다. 내 아들은 이를 막기 위해 모두를 하나의 영광으로 묶으려는 거야.] 시몬이 힘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헤일과 황제는 세상이 멸망을 막기 위해 이 모든 참극을 벌인 거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시간이 없단다. 아이야.] 그녀가 말했다. [내 아들에게 가서 네 군단을 바치고, 함께 영광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멸망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란다.] 시몬이 눈을 꾹 감았다. 한 차례 손을 파르르 떨며 생각을 정리한 그가 이내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냉정히 말했다. “베어도 좋아, 라큄.” 촤아아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나타난 라큄의 마검이 그녀를 깊숙이 베었다. 몸이 갈라진 브리만티아가 털썩 지면에 쓰러졌다. “이미 딕과 카쟌으로부터 들었어. 네게 접촉한 사람들이 어떤 미래를 보았는지.” 시몬이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악의 미래를 보여주고, 그것을 막기 위해 영광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지. 미안하지만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그 사실을 몰랐다면 시몬도 조금은 흔들릴 뻔했지만, 이미 정보를 얻고 난 뒤였다. 그녀가 떨리는 고개를 움직여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본 미래도, 네가 본 미래도, 모두 현실이 될 거다. 우리가 살길은 영광밖에 없단다.] “너희가 말하는 전 인류가 영광에 속하는 것도-” 시몬이 숨을 한 차례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 멸망이야.”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시몬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모든 걸 알면서도…….’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몸은 미래를 믿고 있다. 그야말로 정해진 미래가 각인당한 기분이었다. 특히 해골이 된 자기 자신과 마주했을 때의 그 섬뜩한 감각이 아직도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러니까 볼드윈 국왕과 미래를 본 사람들이 그토록 극단적으로 움직였던 거구나.’ 시몬이 복잡한 표정으로 제 뺨을 탁탁 때리며 정신을 다잡는 그때. 스윽. 온몸을 덮은 기사 갑주 언데드가 옆으로 다가왔다. “라큄…… 아, 깜짝이야.”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 기사 언데드는 방패로 무장하고 그 푸른 망토를 두른 ‘엔밀’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흐린 회색 눈동자에, 내부에는 시몬의 칠흑이 흐르고 있었다. “라, 라큄. 엔밀의 몸을 차지한 거야? 그 전의 몸은?” 라큄은 옆으로 비켜서며 뒤를 가리켰다. 다리와 팔이 엉망으로 꺾여 있고 몸통은 방패로 찍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길리의 몸이 보인다. 시몬이 쓰게 웃었다. “이번에도 재활용하긴 어렵겠네.” 처억. 척. 곧이어 엔밀의 기사 다수를 마검으로 베었는지, 방패를 든 기사들이 시몬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복종의 태세를 보였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방금 쓰러진 브리만티아를 보았다. “이 녀석도 네 편으로 만드는 게 가능할까? 기존 방식의 언데드로 일으켜 봐야 그렇게 강할 것 같지는 않아서.” 처억. 라큄이 마검을 들어 올렸다. 마검에서 회색빛 힘이 뿜어져 나와 시체로 스며들었고, 잠시 뒤, 온몸이 마검의 힘으로 채워진 브리만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시몬이 브리만티아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저어보았다. 시체를 마검의 힘으로 움직일 뿐, 1군단 때처럼 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에이션트 언데드도 아니었으니까. “이전 기술도 재현할 수 있을까?” 촤아아아아아아아! 말 끝나기 무섭게, 브리만티아가 팔을 뻗어 황금선을 주위로 뿌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옆의 건물이 두부 잘리듯 갈라졌다. “그, 그 정도면 충분해.” 이전의 힘을 온전히 가진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라큄 기사단의 전력이 크게 상승했다. 라큄이 마검을 바닥에 꽂아서 회색 안개를 주위에 깔았고, 기사들이 그 안으로 하나둘 들어가며 마검에 수납됐다. ‘이대로 쭉쭉 1군단의 전력을 흡수한다면, 앞으로의 전투에도 더더욱 승산이 있어.’ 시몬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크르르르르르르! 하늘에서 웅장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자, 하늘 위로 검은 악룡이 내려오고 있었다. 펄럭! 펄럭! 하늘에서 속도를 감속하며 악룡이 시몬이 있는 지상에 착지했다. 시몬이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고생했어 헥토르. 그런데…….” 시몬의 시선이 악룡의 등 뒤쪽에 펼쳐진 낯선 붉은 날개로 향했다. 날개가 두 쌍이었는데, 뒤쪽 날개가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저건 어떻게 된 거야?” 스르륵- 붉은 날개가 피처럼 흘러내리더니, 서서히 한 언데드의 형태로 변했다. 시몬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크흐흐!] 어느새 시몬의 곁으로 돌아온 피어가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년! 저건 1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 말라디우스다!] “정말이에요?” 말라디우스에게 헥토르의 칠흑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사이 헥토르가 악룡의 모습에서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죽다 살아난 참이다.” 그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중얼거렸고, 뒤이어 말라디우스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는 이제 황제가 아닌 헥토르 군단장을 섬기기로 했다.] 놀랍게도, 말라디우스는 헥토르와의 전투 도중 스스로 코어를 열고 헥토르의 군단에 들어가겠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다만 헥토르는 관리자가 없어서 말라디우스를 온전히 부릴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코어를 집어삼켜 본인의 드래곤 폼에 더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내가 섬기던 군단장은 헤일이었으나, 이제 그는 없다. 그래도 그동안은 1군단에 남아 그들의 지시를 수행했으나, 헥토르 군단장이 ‘영광’에 접촉하고도 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았다.] 말라디우스가 눈을 번뜩였다. [헤일마저도 영광에 접촉한 뒤 무너졌다. 헤일 대신 그를 섬길 가치는 충분하다.] 그 말을 들은 시몬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헥토르를 보았다. “1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를 뺏어왔네! 첫 외부 에이션트 언데드 획득 축하해 헥토르!” 그런데 헥토르는 양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숨이 찬 듯 계속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가 말라디우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지.” [그리하겠다. 헥토르 군단장.] 말라디우스가 붉은 날개로 변해 헥토르의 몸으로 들어가고, 그제야 헥토르가 큰 숨을 내쉬며 얼굴을 마구 쓸어넘겼다. 시몬이 태연히 말했다. “나중에 에이션트 언데드의 컨트롤 노하우 알려줄게.” “선배인 척하긴.” 헥토르가 픽 웃더니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피어와 라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몬 폴렌티아.” “왜?”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에이션트 언데드를 꺼내놓고 멀쩡히 다닌 거지? 고대의 존재와 사념으로 이어지면 압박감이 적지 않았을 텐데.”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난 그냥 처음부터 괜찮았는데?” 그 말에 헥토르가 어찔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진짜 돌아버리겠군.’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몬과의 격차를 오히려 절감하게 되는 헥토르였다. * * * 1군단과 3왕자 헨릭의 계획은 저지되었다. 인파에 섞여 탈출한 삼왕자 헨릭을 놓치긴 했지만, 대도시 노바렌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사히 빠져나갔고, 미망인 브리만티아와 에이션트 언데드 말라디우스, 기사단장 엔밀이 패배한 뒤에는 남은 1군단의 병력들도 빠르게 잠적을 감추었다. “이거 진짜 대박 아니냐?” 모든 이야기를 들은 딕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싸운 결과로 브리만티아, 말라디우스, 엔밀이 전부 우리 편이 된 거잖아! 1군단 이놈들 아주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데? 이대로 전력을 쭉쭉 흡수해서 1군단을 통째로 집어삼키면 되지 않을까?” 시몬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 방금 흡수한 전력을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만들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해.” 라큄의 마검으로 다시 일어난 언데드들은,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도 라큄의 역량 미만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라큄 기사단에 들어온 브리만티아도 본래의 힘을 내지는 못했으니, 라큄이 조금 더 언데드로서 격이 높아져야 했다. 거기에 헥토르의 전력이 된 말라디우스도 헤일 군단장 휘하 아래에서는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흑마법 사이즈를 가졌으나, 헥토르의 칠흑으로 가동하는 지금은 본래보다 약해져 있었다. 헥토르가 이 사실에 꽤 충격을 받는 것 같자, 시몬은 자신도 처음엔 그랬다며 그의 자존감이 깎이지 않는 선에서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주었다. 거기에 드래곤 폼의 부담이 전보다 더 커져서, 당분간은 새로운 에이션트 언데드를 흡수하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할 수 있는 건 했어. 이제 리어스 왕자님의 차례네.” 시몬 일행이 노바렌에 남아 도시의 질서 유지에 도움을 주는 사이, 이번 사태 극복으로 탄력을 받은 리어스 이왕자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현 사태의 경과를 전 국민들에게 알렸으며 카르델 대영주와 함께 자신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임을 만인에게 밝힌 뒤. -저 리어스 볼드윈은……. 마침내 선언했다. -볼드윈 왕국의 왕위에 오르겠습니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