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44화 첨벙 첨벙. 제독이 입에 시가를 삐딱하게 문 채, 물 위를 천천히 걸어왔다. 챙이 긴 모자 아래로 의안이 흔들리며 번뜩이고 있었다. 그 위압적인 존재감에, 성 앞에 몰려들어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물러서라.” 그의 한 마디만으로 사람들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발이 걸려 자리에 넘어져 바닷물에 옷이 젖는 사람도 있었다. 태연히 걸어 들어온 제독은 마침내 대치 중이던 시몬과 오드발의 앞에 멈춰 섰다. “비켜라,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 ‘제독도?’ 제독 또한 볼드윈 왕국 출신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유명한 ‘해군 제독’이라는 직책 역시 군단장으로서 바다로 떠나기 전, 볼드윈에서 내린 것이기도 했으니까. “이보게, 라즌.” 오드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나는 왕명으로 이곳을 봉쇄하고 있는 걸세. 누구도 내가 담당한 경비 구역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이지.” 제독이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천천히 반대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을 텐데. 일국의 왕이 해군 총사령관의 보고를 듣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미안하지만 상황이 그렇네. 전하께 자네가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릴 테니, 오늘은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와주지 않겠나.” 제독이 시가 연기를 뿜어냈다. “거절한다면?” 스릉. 챙. 왕국군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오드발 또한 구부리고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왕명의 지엄함을 증명해야겠지.” 주위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몰아쳤다. 스으읍. 후우우우우우- 제독은 마지막까지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뒤, 타다 남은 꽁초를 입에서 떨어뜨렸다. 그것이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 그때 다 꺼진 꽁초가 점점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주변의 수위가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었다. 발목이 조금 잠길 정도의 바닷물이 점점 불어나 무릎 위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라즌 맥밀런!” 오드발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제독은 비릿하게 웃으며 응수했다. “아까 자네의 ‘구역’엔 들어올 수 없다고 했지?” 제독의 등 뒤에 펼쳐진 뿌연 안개 너머로, 거대한 군함 한 척이 바닷물을 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여긴 바다고, 바다는 내 영역이다.” 콰콰콰콰콰! 군함이 살벌한 속도로 성을 향해 돌진했다. 로크섬의 네프티스조차도 겪어야 했던, 제독이 격분했을 때 저지르는 일명 ‘군함 번지기’였다. 군함은 근처의 바리케이드 따위를 모조리 밀어내며 성문으로 접근했다. 주위에 서 있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던져 양옆으로 흩어졌다. 그사이 제독은 태연히 군함 위로 뛰어서 올라탔다. “닫아! 성문을 닫아!” 오드발이 다급히 외쳤다. 문지기들이 달려와 성문을 닫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터어어어어어어엉! 군함의 선미가 충차처럼 성문을 들이받는 것으로, 거대한 왕궁의 성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동시에 바닷물이 밀물처럼 성내로 쏟아졌다. 주위가 순식간에 물난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대 군단장으로서 조언 하나 하지.” 제독이 럼주가 든 수통 뚜껑을 퐁 소리와 함께 열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갑판에 올라타 있는 시몬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관료란 것들은, 말로 해선 안 들어처먹는다.” 시몬이 씩 웃었다. “새겨듣겠습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제독의 전함이 성내에 무사히 잠입했다. 그가 아래로 뛰어내렸고, 시몬도 뒤따라 착지했다. 시몬은 감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성이 전부 물바다가 되면 어쩌나 했는데.’ 성문의 인근만 바닷물이 가득했다. 마치 해변가처럼, 쏴아아 파도치는 물살이 주거지 인근까지만 밀려들었다가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라즈으으은! 푸읍! 흡!” 가슴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고 다가오려던 오드발이 역류하는 파도에 얻어맞아 다시 성벽 밖으로 떠밀려 갔다. 제독은 그 모습을 무시하며 방금 뚜껑을 딴 럼주를 목으로 가져갔다. 꿀떡꿀떡 목구멍이 움직이더니, 이내 크흐- 하는 아저씨 특유의 감탄성과 함께 입가를 닦았다. “한잔하겠나?” 제독이 수통을 내밀자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이제 곧 국왕 전하를 만나 뵈러 가야 해서요.” “그러니 마셔야 한단 거다.” 제독이 럼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술기운이라도 있어야지. 맨정신으로 가봐야 복장만 터질 뿐일 테니까.” “?” * * * 볼드윈 왕국의 왕이 기거하는 왕궁은, 엄밀히 말하면 궁전이 아니었다. 대형 저택을 여섯 채쯤 이어붙여 왕궁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길 잃기 딱 좋을 만큼 넓고 복잡했다. 시몬은 저택의 지리에 익숙한 제독을 따라 걸어 왕의 집무실에 도착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곳에서 왕을 만나지는 못했다. “어째서 해군의 이동권을 통제한 겁니까.” 제독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제 와서 불시 감사에 관리 점검까지.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로 내 발을 묶는 이유가 뭔지 묻는 겁니다.” “왕명일세, 라즌.” 제독이 직접 왔다는 소식에 볼드윈의 재상이 직접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문제이니,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기다려 주시게.” “이 나라의 왕궁에는 개밖에 없습니까? 이 새끼도 왕명, 저 새끼도 왕명. 개처럼 왈왈 짖을 게 아니라 정확한 이유를 대야 납득할 것 아닙니까.” “제독! 재상께 말씀이 너무 지나치오!” 제독이 필터 없는 분노를 쏟아내는 사이, 시몬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리 났네.’ 3군단장인 제독마저 본국의 지시로 발이 묶인 신세였다. 시몬은 아직 학생 신분이었지만 제독은 세력, 명성, 인지도 모든 면에서 수준이 높고, 한 나라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책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손을 쓰지 못할 정도라면 시몬의 7군단 통행이 이루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군단장 둘을 묶어두는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직접 전하를 뵈어야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은신처에 가 계시네. 근래 묘한 일들이 자주 벌어져 신변의 위협을 느끼신 듯하네. 미안하지만 위치를 알려줄 수는 없네.” 생각보다 제독과 재상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시몬은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 방금 들은 단서들을 머릿속에서 짚어나갔다. ‘포인트는 세 가지네. 묘한 일들, 신변의 위협, 은신처에 숨어 있는 왕.’ 확실히 볼드윈 왕궁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시몬은 둘의 언쟁이 계속되는 사이 조용히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저택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용인들의 표정이 안 좋아.’ 시몬은 제일 먼저 사람들의 얼굴부터 살폈다. 시몬과 눈을 마주치면 샥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초조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던 시몬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텅 비어 있는 벽면. 시몬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 벽면을 훑어보았다. ‘벽의 색깔이 달라.’ 전체적으로 오래되어 바랜 듯한 벽면이었지만, 특정 사각형 구간은 유독 색이 진했다. 그러고 보니 저택 입구에는 볼드윈 왕국을 상징하는 인물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곳도 액자가 있었던 자리 같아 보이는데, 왜 액자를 모두 내린 걸까? 의문을 품은 시몬이 조금 더 주변을 꼼꼼히 살피자, 마침 커다란 액자를 들고 급히 이동 중인 사용인들이 보였다. ‘액자들을 어딘가로 옮기고 있어!’ 시몬이 그들을 따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도착했는데, 한 사용인이 앞을 막았다. “외부인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 시몬은 암흑연합 내 수사권을 보장하는 키젠 학생증을 보인 뒤, 벙어리가 된 그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아.” 저택의 수많은 액자들이 이곳에 기대어져 있거나 뒤집혀 있었다. 그중 하나를 본 시몬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한 여인의 초상화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에 기대진 액자들을 들어서 확인해 보니, 그중 몇몇 역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짜 피잖아?’ 시몬은 그 피를 손수건으로 살짝 닦아 맹독학 키트에 보관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았다. 깨진 유리창, 식탁보나 의자에 튄 흥건한 핏자국 따위가 발견되었다. 시몬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 그렇게 모퉁이를 돌자 이번엔 새하얀 해골이 시몬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왕궁 내에 자연형 언데드?’ 시몬이 급히 칠흑을 끌어올리며 대응하려는 순간. 퍼억! 뒤에서 청소 도구로 스켈레톤의 뒤통수를 후려쳐 무너뜨린 메이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또 시작이네. 괜찮아요?” “아, 괜찮습니다.” 메이드가 신속한 동작으로 흩어진 해골을 줍기 시작하자, 시몬도 얼른 도와주었다. “도와주시기로 하신 업체 분들이시죠? 빨리 움직여야 하니 서둘러 주세요.” “네, 네.” 시몬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 해골은 대체…….”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비밀 유지 서약 기억 안 나세요?” “아, 죄송합니다.” 시몬이 다시 묵묵히 해골을 줍고 있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뭐, 궁금할 수는 있죠. 나도 사실 자세한 건 몰라요. 왕가의 묘에서 언데드가 일어났다나 뭐라나.” 저택에서의 업무가 계속되었다. 해골을 수습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는 중에, 시몬은 여러 참담한 광경을 마주했다. “아으윽! 아으으으으!” 방바닥의 매트 위에 누워 거품을 문 채 발작하는 하인들. “저주! 저주가 내릴 것이다!” “배신자에게는 죽음뿐이야!”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시몬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듣다 보면 익숙해져요.” 메이드가 말했다. “새벽에 왕비 전하가 화장실에 가다가 갑자기 하인이 뛰어들어서 저런 말을 했다나 봐요. 왕비께서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국왕 전하도 점점 피폐해지고 있고요.” “…….” 시몬은 다시금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망령에 씌인 건가?’ 초상화에 흐르는 피도 그렇고, 망령이 들린 것까지. 네크로맨서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이상하네. 볼드윈 왕궁에도 뛰어난 네크로맨서들은 있을 테니, 이 정도 수작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시몬은 그녀를 돕는 척하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팔을 잡고 몰래 마법진을 그려 넣어 그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확인해 보니 시몬이 아는 상식적이고 교과서적인 흑마법이 사용된 건 아니었다. 지나치게 오래되어 현대에는 대응법이 사장되거나 잊혀진, 고대의 흑마법 느낌이 물씬 났다. 가장 비슷한 예를 들자면- ‘……강제 변신 저주인 터치 오브 피그말리온, 혹은 코랄 리치들의 고전식 시체폭발.’ 너무 구식이면서도 강력해서, 현대의 지식 체계로는 대처가 잘 안 될 것이다. 이 흑마법들은 네크로맨서가 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언데드의 짓이야.’ * * * 시몬은 다시 조용히 현장에서 빠져나와 제독을 찾았다. 제독은 답답함을 삼키듯 연거푸 시가를 물고 있었다. “어디 다녀왔나? 풋내기. 너도 국왕 전하께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시몬은 저택에서 본 일들을 남김없이 설명했다. 제독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턱을 쓸었다. “고전적인 수작이군.” “그런가요?” “마치 기사의 시대 말기에, 흑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제국 귀족들을 네크로맨서들이 괴롭히던 짓과 유사해.”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이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첫 번째는 왕궁의 네크로맨서들이 지키고 있는 저택에서 이런 흑마법을 성공시킬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것. 일종의 무력시위지.” 시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그들이 당했던 짓을 볼드윈 왕궁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정신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볼드윈 왕족들이 정신이 나갈 만하지.”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 떼긴.” 제독이 이를 드러내며 음침하게 웃었다. “이번 일의 배후는 제1군단, 드디어 그 ‘황제’가 전면에 나서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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