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43화 사실 늘 궁금하긴 했었다. 무슨 연유로 군단장도 아닌 네프티스가 에이션트 언데드를 보유하고 있었을까. 시몬은 고치에 들어 있는 린과 룬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한때 린과 룬은 대륙의 강력한 에이션트 언데드로서 군림했었지만, 과거 한 전투에서 코어가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이에 네프티스는 시간의 힘으로 그녀들의 코어가 망가지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계속 싸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즉, 엄청나게 강력하긴 하지만 다른 군단장은 사용할 수 없는, 오로지 네프티스만이 다룰 수 있는 에이션트 언데드였던 것이다. [그런데 네프티스도 나이가 들어서, 우리를 유지하는 게 벅차졌나 봐!] 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전도유망한 군단장인 시몬 학생에게 맡긴 거야! 아주 아주 강력한 군단장의 절대명령이라면 우리를 부릴 수 있을 거거든. 기쁘지? 즐겁지? 행복하지?] 뒤이어 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도 코어 문제 때문에 두 분을 쓰지 못하는 거 아녜요?” [아니, 준비물만 하나 있으면 돼!] [망가진 우리의 코어를 대신할 강력한 칠흑의 에너지 핵이 필요해!] 그 준비물만 있다면 린과 룬을 에이션트 언데드로 다룰 수 있었다. 시몬의 눈빛이 반짝였다. “라이프 베슬? 드래곤 하트? 필요한 거라면 뭐든 말해주세요!” [에이, 그런 약아빠진 에너지 핵으로는 우릴 감당할 수 없어!] [그 정도라면 네프티스가 시간의 힘을 쓸 필요 없이, 다른 군단장이 어떻게든 우리를 고쳐서 썼겠지.] 이내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합쳐졌다. [[우리가 필요한 건 가장 위대한 언데드의 힘, 바로 관리자의 코어야.]] “!”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관리자의 코어가 필요하다고? 그럼 린, 룬을 전력으로 삼기 위해선 군단 하나를 또 줄여야 한다는 건가? 시몬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다른 군단장을 희생할 생각은 없습니다.” 북부대공과 남부제독, 유령왕녀, 헥토르까지 맡은 의무가 너무나 막중했다. 특히 헥토르는 자신이 관리자를 삼켰기 때문에 관리자의 코어를 찾을 수 없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네프티스는 너라면 꼭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 * * * 그렇게 시몬은 린과 룬을 만나고 밖으로 나온 뒤, ‘에브하임 아공간 수여’를 위한 시술이 시작되었다. 간이실 침대에 누워 아공간 문양을 이식받았고, 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가슴과 복부 일부에 아공간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확인했다. 이후 시몬은 원래 아공간에 있던 소환수와 언데드들을 전부 에브하임으로 이동시켰다. 그야말로 대규모 이사였다. 모든 작업이 끝난 뒤에는 적응 훈련이 시작됐다. “로레인에게 들었어! 넌 이제 몸짓으로 절대명령을 쓸 수 있는 단계의 초입에 들어선 거야.” 연구실 밖으로 나온 네프티스가 자신의 아공간을 열며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네프티스가 주먹을 꾹 쥐는 시늉을 하자, 아공간을 열기 무섭게 무수한 언데드 떼가 쏟아져 나와 주먹의 형태로 나무를 쥐어서 짜부라뜨렸다. 시몬이 탄성을 흘렸다. “순간적이고 강력한 의지를 뿜어내서, 언데드들의 출현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적이 반응하지 못하도록 옥죄는 거야!” “저도 해볼게요!” 시몬이 새 아공간, 에브하임을 자신의 옆에 살짝 열고는 팔을 휘둘렀다. 화아아아아아악!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튀어나온 좀비들이 쏟아져 나와 나무에 부딪혔다. ‘정말이다. 언데드 방출 속도가 훨씬 빨라!’ 지켜보던 그녀가 짝짝 손뼉을 쳤다. “좋아! 처음부터 진형을 짠 채로 언데드 부대를 소환하거나, 흑마법을 발동시킨 채 아공간에서 나오게 할 수 있어. 조금 더 세밀하게 움직여 볼까?” “네!” 의외로 마지막 합숙은 네프티스와 함께하게 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같이 훈련을 해나갔고, 어느덧 날이 저물어갔다. “그럼 복습하고 있어! 나는 본부에 일 좀 하러 다녀올게!” 네프티스가 떠나려는 그때. “네프티스 님.” “응응!” “제게 린, 룬 교수님을 주신 건…….” 시몬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1군단을 쓰러뜨리라는 요청이신가요?”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헤헤 웃었다. “그렇게 알아들었으려나?” * * * 그렇게 네프티스가 떠나고, 시몬은 풀밭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전히 멍한 기분이었다. 린과 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력으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군단이 하나 더 줄어들어도 괜찮은 걸까.’ -키리리리! 그때 시몬의 옆으로 송장거미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시몬이 의아한 눈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 -키릭 키릭! 송장거미는 1군단으로 향하던 거미부대의 대장, 에르제베트로부터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편지 내용을 읽어가던 시몬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국경?’ * * * 다음 날 아침. 볼드윈 왕국 국경 앞. -으어어어어. -으으으. 드넓은 황무지 위로, 바글바글한 메뚜기 떼를 연상케 하는 수천 마리의 좀비들이 멈춰 있었다. 가지각색의 형태를 갖춘 그들 중 일부는 새까만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좀비들 전원이 데스랜드에서 온 7군단의 좀비들이었다. 시몬이 천년향으로 가기 전에 내린 ‘1군단을 향해 움직여라’는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고, 이들 모두가 1군단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건, 간이 철조망을 친 채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붙잡고 있는 왕국군이었다. [아, 그러니까! 왜 통과를 못 한단 건데?] 그 앞에서 언데드들을 통솔하는 존재가 병사들에게 따지고 있었다. 귀족 도련님 같은 옷을 입고, 왕관을 비스듬히 머리에 쓴 작은 체구의 좀비, 바로 좀비부대의 대장 프린스였다. [우리는 1군단을 치러 갈 뿐이라고!] “말했지 않나, 언데드.” 왕국군 병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왕 전하의 명이다. 우리도 명령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아이, 진짜.] 작은 좀비가 바닥의 돌멩이를 팍 차며 짜증을 냈다. 이에 공명하듯 주위의 좀비들도 각자 고개를 들더니 ‘어어어어!’ 하고 끔찍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왕국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자, 자꾸 이러면 무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해보든가!]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 그때. 화아아아아아악! 저 멀리 언덕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한 차례 번쩍였다. 왕국군 병사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텔레포트 마법진? 큭……!” 휘이이이잉! 갑자기 한 차례 자욱한 모래바람이 몰아닥쳤고, 병사들이 모두 몸을 움츠리며 눈가를 가렸다. 그렇게 한바탕 모래바람이 지나간 뒤 그들이 눈을 떴을 때는. “!!” 에이션트 언데드의 뼈로 이루어진 본 아머와 무형의 망토로 무장한 남자가 떡하니 서 있었다. 등 뒤에는 하얀 대검이 매여 있었다. [시몬!] 프린스가 신이 나서 달려들어 주먹을 뻗었다. 시몬도 놀아주듯 그와 주먹을 툭툭 부딪히며 핸드 셰이크를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손뼉까지 짝! 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한 프린스가 시몬의 옷자락을 붙잡고 일러바치듯 말했다. [저 멍청한 인간들이 우릴 통과 못 하게 막고 있어!] 그 말에, 눈구덩이에서 검푸른 불꽃을 흘리고 있던 피어의 투구가 서서히 돌아가며 왕국군을 응시했다. “!” “크흠!” 그 위압감에 왕국군들이 움찔하며 경계했다. 스윽. 남자가 손을 세워 들었다. 왕국군 한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방패를 세워 들려는데, 그 손이 천천히 피어의 투구의 아래로 향하더니 턱 부분을 붙잡고 가볍게 머리 위로 열어젖혔다. 그리고 나타난 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시몬이 미소 지었다. “4왕국 전체에 저희 7군단의 통행 협조를 부탁드렸을 겁니다. 언데드 군대를 통과시켜도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리듯 차분한 태도에 논리적인 이야기.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목소리였다. “알죠, 아는데. 저희도……” 한 병사가 홀리듯 말을 이어나가려는 그때, 선임병으로 보이는 왕국군 병사가 정신 차리라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말을 이었다. “왕명입니다.” 그 또한 투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 어떤 군대도 영토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명입니다.” ‘볼드윈의 국왕이?’ 시몬이 턱을 쓸었다. 그 어떤 군대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 사실 결사의 공세 때문에 정신없는 지금, 왕국 영토를 통과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외부 군대는 7군단뿐이다. 사실상 7군단을 지목해서 한 행위나 다름없었다. ‘1군단을 치려면 반드시 볼드윈의 영토를 통과해야 하는데…… 갑자기 뭐지?’ [아, 답답하네 진짜! 너희한텐 아무런 피해도 안 준다니까! 우리 목표는 1군단 놈들뿐이야!] 프린스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드레스덴 왕궁이 1군단에 깨진 거 몰라? 그것들을 방치하면 앞으로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질 거라고! 너희는 예외가 아닐 줄 알아?] “……흠.” 왕국군 병사들의 얼굴빛이 흐려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시몬은 설득하려는 걸 포기하고 다시 한 차례 주위를 살폈다. 바리케이드나 철조망 곳곳에 벌건 물감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이 빨간 건 뭡니까?” “어, 언데드의 접근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뿌리라는 지시를…….” [웃기고 있네!] 프린스가 그 붉은 물감에 보란 듯이 얼굴을 올려보았다. 당연히 그는 멀쩡했고, 병사들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프린스가 왕관을 붙잡으며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시간 아까워! 시몬! 쟤들 그냥 밀어버리고 통과하자!]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과해. 이 사람들은 잘못 없어.” 1군단과의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볼드윈 왕국과 트러블이 일어나는 건 곤란했다. 게다가 혼란은 늘 결사 측이 원하는 바. 시몬이 등을 돌려 걸었다. “이 병력은 내가 직접 데려가지 뭐. 아공간을 열게.” 시몬의 말에 프린스가 눈을 깜빡였다. [네 아공간은 지금도 이미 병력으로 꽉 차서 자리 없지 않아?] 시몬이 씩 웃으며 팔을 휘둘렀다.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 장만했지.” 출렁! 허공이 한 차례 흔들리더니, 유리창처럼 매끈하게 공간이 좌우로 벌어지며 무수한 해골 뼈들이 득실거리는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에는 이미 시몬의 다른 언데드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프린스가 오오! 하고 감탄성을 흘리며 폴짝 뛰었다. [엄청 넓네! 와아!] 그렇게 프린스를 필두로 수천의 언데드들이 아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왕국군 한 명이 중얼거렸다. 어딘가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수천 병사를 빨아들이는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이내 그렇게 많던 좀비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갔고, 프린스가 사념으로 소감을 보냈다. [여기 엄청 편해! 칠흑도 풍부해서 쉬기 좋아!] ‘그렇지?’ 네프티스 덕분에 시몬도 크게 한숨 놓이게 됐다. 시몬이 사념으로 말했다. ‘그런데 프린스. 데스랜드에서 병력은 계속 오고 있는 거야?’ [응, 얘들은 선발대고 뒤에 오는 병력이 십수만 마리는 더 있어.] 아무리 이번에 얻은 아공간이 넓다고 해도, 들일 숫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기존의 언데드에 수천의 좀비들을 넣은 것으로 새 아공간도 거의 꽉 차버렸다. ‘프린스는 여기 남아 다른 좀비들을 지휘하면서 일단 대기해 줘.’ 시몬이 고개를 들어 왕국군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볼게.’ * * * 국경에 도착해 문제를 확인한 시몬은, 키젠 하수인을 만나 텔레포트 마법을 타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다. 다음 목적지는 볼드윈 왕국의 왕도, ‘사가루인’이었다. ‘여기구나.’ 시몬도 사가루인은 처음 와봤다. 레스힐 남작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볼드윈 왕국 출신이기는 했지만, 많은 암흑연합의 젊은 세대들이 그렇듯 왕국 자체에 대한 애국심은 적었다. 암흑연합 자체를 자신의 소속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왜 성 밖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펼치신 거예요?” 텔레포트를 유도한 키젠 하수인은, 굳이 안전한 성내를 내버려두고 성에서 꽤 떨어진 인근 숲에 마법진을 설치한 상태였다. 숲 인근에는 오크나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위험했다. 하수인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학생회장님. 저희도 성내로 모시고 싶었지만 최근 사가루인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말입니다.” “음.” 뭔가 문제가 있긴 있는 듯했다. 시몬은 일단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뒤 숲을 지나 쭉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 안 가 왕도 사가루인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에게 들었던 대로네.’ 볼드윈 왕국은 암흑연합의 중부와 동부 일대에 위치해 있고, 상업으로 먹고사는 중소왕국이다. 방대한 영토와 재력으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한 드레스덴 왕국, 신성연방과 국경을 맞대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칼로스 왕국, 자신들만의 확고한 정치적 뿌리와 기틀이 있고 유목업과 관광업이 발달한 샤헤드 왕국과는 달리 볼드윈 왕국은 크게 한 가지 내세울 게 없었다. 물론 나쁘게 말해야 내세울 게 없다는 거고, 좋게 말하면 밸런스가 좋았다. 그리고 암흑연합 중심부에 영토가 있어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이 있지만, 격변기나 혼란기에는 중심부라는 죄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운명을 타고난 왕국이기도 했다. 그런 왕국의 중심, ‘사가루인’. 가장 발달한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왕궁이 위치하고 있어 행정의 중심지였다. 수천 년 전의 중세 양식 성곽과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수많은 왕국병들이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성문 앞에서 검문하는 것도 아니고, 성문과 꽤 떨어진 지점부터 바리케이드나 철조망을 친 뒤에 사람들을 엄격히 가려 받고 있었다. 사가루인에 들어가려는 많은 상인들이 곤란한 듯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녁에 백작가와 큰 거래가 있는데 이제 와서 막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국왕 전하의 명령이오.”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유명인이 된 시몬은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눌러쓴 채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도 목책이랑 성벽에 그 붉은 물감이 칠해져 있네.’ 시몬이 그것을 보며 헛웃음을 한번 흘린 뒤, 고개를 들었다. ‘사가루인이라.’ 이곳은 도시 자체가 유적지로 선정됐을 만큼 대륙의 역사에서 유서 깊은 곳이었다. 사가루인을 가진 자, 세상을 가지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볼드윈 왕국에서는 다른 발전한 대도시를 내버려두고 오로지 그 상징성 때문에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하지만 사가루인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이곳에서 일어난 일로-’ 시몬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왕도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쇠퇴가 시작됐다던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사이 시몬의 차례가 되었다. 왕국병이 말했다. “얼굴을 보이고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왕국병의 태도는 심드렁했다. 검문은 형식적인 느낌이 강했고, 어차피 전부 들어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슥. 그러나 시몬이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을 때 한 번. 그리고 키젠 학생증을 제시했을 때 또 한 번. 경비병의 표정이 놀람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제, 제7군단장님께서 어쩐 연유로 사가루인까지……!” 곳곳에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군단장이라고?” “신문에서 얼굴 본 것 같아!” “세상 끝까지 결사를 쫓아가 해치운다던데, 사가루인에 결사가 나타난 거 아닐까?” 이런저런 소리를 한 귀로 흘린 시몬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국경 통과 관련 문제가 있어서요. 국왕 전하를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만.”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왕국군이 떨리는 손으로 시몬의 학생증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외부자의 출입은 현재 금지되어 있습니다.” 시몬이 빙긋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외부자라뇨. 저도 볼드윈 왕국의 국민인데요.” 그러자 주위 사람들도 한마디씩 했다. “옳소! 우리도 볼드윈 사람들이야!” “2년 만에 온 내 고향인데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여기 있소! 이유는 말해주고 길을 막든가 해야 할 것 아니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고 있는 그때. “무슨 소란이냐.” 저벅 저벅. 망토를 두르고, 그 안에 경갑을 받쳐 입은 뾰족한 인상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국군들이 일제히 그에게 경례 자세를 취했다. “듣지 않아도 알겠군.” 코가 뾰족한 남자가 시몬을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인사했다. “키젠의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 아니신가? 반갑소. 나는 왕실 네크로맨서 오드발이라고 하오.” 시몬도 마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게 해서 미안하지만 그만 돌아가 주지 않겠소?” 그가 미소 지었다. “이는 왕명이오. 거절하겠다면 볼드윈 왕에 대한 반역으로 판단, 완력으로 저지할 수밖에 없소.” [크하하하하!] 그 소리를 들은 피어가 껄껄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사념의 목소리가 아니라 진짜 웃음소리였다. [저놈이 군단장 앞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피어, 침착해 주세요.” 모욕이라고 생각했는지 오드발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시몬이 조용히 타이른 뒤, 오드발을 보며 말했다. “저는…….” 시몬이 다시 말하려는 그때. 어느덧 하얀 안개 같은 것이 일어나 주위를 뿌옇게 덮었다. 상대의 흑마법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오드발도 당황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참방- 참방- 짙은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저 뒤에서 바닷물이 찰랑이는 소리와 함께, 높은 부츠를 신고 코트를 걸쳤으며, 챙이 긴 모자를 삐딱하게 쓴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내 후배에게 무슨 짓이지? 오드발.” 한쪽 눈이 의안처럼 삐거덕거리는 남자. 시몬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커졌다. ‘제독!’ 암흑연합 제3군단장, 통칭 남부제독으로 칭송받는 바다의 관리자. ‘라즌 맥밀런’이 이곳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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