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41화 천년향 사태가 마무리된 지 수일이 지났다. 혼란스러웠던 왕도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숨어 있던 백성들이 돌아와 생업을 시작했고, 저잣거리에도 활기가 띠었다. 다행히 천년향의 주민들은 진현의 저주였던 ‘불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불사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게 필멸자로 살아온 시몬의 입장에선 다소 놀라웠다. 세월에 잠식된 사람들과 불사의 병사들은 진현이 사라졌음에도 당장 회복되진 않았지만, 조금씩이나마 긍정적인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금군들은 모두 유폐옥에 수감됐다. 진현과 결사의 계획에 깊게 관여한 자들은 평생을 갇혀 있어야 했고, 그중에서 이성 없이 진현의 말에 따랐던 이들은 참작의 여지를 주겠다고 호란 장군이 밝혔다. 결사의 접근이 확인된 이상, 어찌 됐건 천년향이 그 간섭에서 벗어나 우뚝 자립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요했으니까. 이렇게 모든 것이 빠르게 안정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시몬도 궁궐에 머물며 부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간다! 장난감 새 떼 퍼레이드 쇼!” 딕이 팔을 오두방정 휘젓다가 두 손을 짝 하고 모으자 마정석 장난감들이 일제히 춤을 추거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이를 지켜보는 시몬이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류운이 멍한 눈으로 딕의 장난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푸딩 디저트를 떠먹고 있었다. “아, 힘들어.” 쇼를 마친 딕이 헉헉 힘겨운 숨을 내뱉으며 두 팔을 늘어뜨렸다. “류운 이 녀석, 전혀 반응이 없잖아. 정말 괜찮아지는 거 맞아?”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시몬이 웃으며 류운을 바라보았다. 날아다니는 새 장난감들을 보며 눈이 빙빙 돌아가고 있는 모습. 예전보다 행동에 생기가 느껴졌다. “우린 내일 이곳을 떠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해, 류운.” 시몬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전까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는데.” “…….” 류운은 여전히 단 걸 먹거나 장난감에 관심을 보일 뿐, 말을 하진 않았다. 시몬이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크림이 묻은 그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시몬! 딕! 류운! 오래 기다리셨죠!” 이때 카미바레즈가 커다란 과일 케이크를 든 채 뛰어오고 있었다. “류운에게 줄 디저트가 다 떨어졌다고 해서, 대륙에서 가져온 남은 재료들로 케이크를 만들어봤어요!” 그 옆에는 앞치마 차림의 메이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대륙이랑은 주방 도구도 완전 다르고, 쓰는 향신료도 달라서 조금 애먹었지만 말야. 몇 개 더 구워서 대신들이랑 교수님들께도 나눠 드렸어.” 그렇게 말한 메이린이 곁눈질로 옆을 보며 덧붙였다. “이 요리 초보들이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옆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은 핑크색 앞치마 차림의 로레인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미안, 의욕이 너무 앞섰어.” 마찬가지로 그을음이 묻어 있는 세르네가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깃털을 꽂아서 요리사를 부리면 간단한데, 굳이 수제로 만들어야겠다는 메이린이 잘못된 거야.” “야아! 진짜 죽을래?” 시몬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류운의 시선도 어느새 과일 케이크에 홀린 듯이 고정되어 있었다. 이내 모두가 자리에 앉아 케이크 파티를 벌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디저트를 나누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우선, 로레인의 복귀는 키젠 내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그녀의 퇴학 반려를 ‘특권’이라며 탐탁지 않게 여기는 여론도 조금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희생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지자 그런 말들은 쏙 들어갔다. 이후 로레인은 제멋대로 자퇴서만 남기고 마계에 넘어갔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론에게 몇 번을 고개 숙여 사과했고 아론은 덤덤히 이를 받아주었다. -진도가 많이 뒤처졌다. 따라잡으려면 남들보다 세 배는 더 노력해야 할 거다. -네! 특히 천년향 선발대까지 가서 열심히 싸웠던 에슈 아르젤은, 로레인의 복귀 사실을 알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로레인을 꼭 껴안았다. 로레인 역시 제대로 된 말 없이 떠나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사과했다. 두 사람은 일과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로레인은 생애에 걸친 자신의 비밀까지 말해주었는데, 원래도 사이가 좋았지만 그 후로 전보다 더더욱 가까워졌다. “이런 식으로 자꾸 저 사람이랑 엮여서 싫다니까요.” 로레인의 생애의 비밀을 알게 된 세르네가 툴툴거렸다. 세르네나 로레인 모두 갓난아기 때 친부에게 버려졌다는 점, 하늘섬과 마계라는 타지에서 넘어왔다는 점, 상아탑주와 키젠 총장이라는 거물들의 손에서 자란 아가씨들이라는 점, 각자의 고향을 기반으로 한 태생적 이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 상극인 두 사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통점이 많았다. “이번 일에 누구보다 힘써줬다고 들었어.” 반면 로레인은 이번 사건으로 세르네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아주 강해져 있었다. “고마워, 세르네.” “……닭살 돋으니 저리 가요.” 세르네가 고개를 홱 돌렸고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약이 오른 세르네가 하나 남은 ‘요청권’을 내세워 오늘 하루는 시몬을 독차지하겠다고 선언했고, 메이린이 시몬은 쉬어야 한다며 막아서느라 한 차례 투닥투닥 다툼이 벌어졌다. 우걱우걱! 그사이, 류운은 열심히 케이크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한 조각씩 먹고 있을 때 벌써 혼자 케이크를 네 조각째 먹어치우고 있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카미바레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무 단것만 먹는 것 같아요. 이제 류운도 불사자가 아니니까 건강에 좋지 않을 거예요.” “그러네.” 시몬이 슬쩍 류운이 먹던 케이크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 먹자, 류운.” 류운이 먹을 것을 빼앗기자마자 두 팔을 바둥거리며 접시를 되찾으려 했다. 시몬이 접시를 머리 위로 높이 든 채 뺏기지 않으려 했고 류운이 시몬에게 매달리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순간 류운의 입이 간질거리듯 움직이더니. “먹을 거!” 와아아아아아아! 마침내 말을 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잠식 상태가 크게 호전되어 간다는 증거였다. 감격한 시몬이 류운을 끌어안았고, 멀리서 지나가던 다른 동기들도 축하해 주었다. 류운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다시금 과일 케이크를 먹을 뿐이었다. “이제-” 시몬이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시름 놓고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류운이 케이크를 먹기를 잠시 멈추고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 * * 류운과 시간을 보낸 시몬은 다음 일정을 위해 궁궐 밖으로 나섰다. 궁궐 앞 커다란 마당에는 부적이 잔뜩 붙은 초대형 북이 놓여 있었다. 그 주위에는 호란 장군과 흑사곡 태수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심고(天心鼓)라고 하는 나라의 보물입니다.” 흑사곡 태수가 시몬에게 인사를 건넨 뒤 설명했다. “한번 울린 뒤 포고하면 그 목소리가 천년향 끝까지 닿죠. 천도제 때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말을 전하려 할 때 쓰였던 겁니다.” ‘일종의 국가급 확성 수정구 같은 느낌이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이, 말끔한 장삼으로 갈아입은 호란 장군이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호란 장군이 시몬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직접 정중히 인사했고, 시몬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후 호란 장군은 긴장한 얼굴로 천심고 앞으로 나아갔다. ‘불사의 육체는 사라졌고, 이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갈 의지를 끌어낼 때.’ 시몬이 긴장한 듯한 호란 장군을 바라보았다. ‘모든 건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호란 장군은 이런 역할이 익숙하지 않은지 계속해서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옆으로 슥 지나가며 격려했다. “힘내. 십시오.” 거인혼혈 샤텔 마에르였다. 샤텔의 격려를 듣고 눈이 급격히 커진 호란 장군이 민망한 듯 얼굴 털을 고르더니, 비로소 각오를 다지고는 북채를 손에 쥐었다. 둥둥! 호란 장군이 북채로 천심고를 힘차게 두드리자 웅장한 파장이 널리 퍼져 나갔다. [천년향의 만백성은 들으시오. 나는 호란 장군이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천도제인 오늘, 진현왕의 사악한 술수로 천 년 동안 지속된 불사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오! 길고 지루한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고 무기력하게 정체되어 있었소.] 그녀가 주먹 쥔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진현왕은 없소! 그자가 만든 지긋지긋한 불로불사도 사라졌소! 이에 따라 조정은 한 가지 정책을 공표하려고 하오. 합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으나, 천년향의 대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오!] 호란 장군이 숨을 한 차례 몰아쉬고는 힘주어 말을 이었다. [앞으로 20년간, 천년향의 모든 율법을 폐기하기로 했소.] 주위에 거대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만 아니라면 여러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소! 고향을 떠나 긴 여행을 떠나도 좋고, 본업을 멈추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해도 좋으며,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봐도 좋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것도 좋소! 무엇이든 가능하오.]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롭소!] 그랬다. 세월에 잠식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억압과 감금’이었다면. 세월의 잠식에서 해방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였다. [드디어 우리는 ‘유한’을 손에 넣었소!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럽게도, 모든 일에 끝이 있단 말이오! 꼬이고 꼬인 실타래 같은 인생도! 길고 긴 후회와 슬픔, 심지어 기쁨도 모두 평등하게 끝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소! 혹시라도 목숨을 끊으려 했거나,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려는 자들은, 이 짧은 20년 동안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겠소?] 세월에 잠식되어 멍하니 할 일을 하던 궁전의 시종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호란 장군이 목소리를 높여 천년향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는 유한하며, 그렇기에 소중하오!] * * * 천년향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궁궐에 있던 키젠 학생들은 왕도 주민들의 뜨거운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그 와중에 호란 장군과 흑사곡 태수 등 주요 인물들은 끝까지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섰다. 강을 타고 천천히 이동한 배는 다시 키젠 숙소인 대궐에 도착했다. 대궐에서는 이미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곳에 남아 있던 학생들과 다시금 얼싸안으며 재회했다. 사실 합숙을 이어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키젠에서 흐르는 1시간이 이곳의 10시간이었으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불사가 사라진 상태라 천년향 합숙의 의의가 사라졌고, 밖에서 키젠의 위치를 파악한 결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얼른 대륙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실제로 진현을 제거한 이후 결사 측 역시 여기저기 포탈을 사용해 분주히 움직이는 듯했다. 그렇게 다시금 모두가 합숙을 시작할 때처럼 큰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대륙으로 향하는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잘 가시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찾아주시오!” “도와줘서 정말 고맙소!” 왕도에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온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학생들은 그새 정이 들었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천년향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마 여기서 있었던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손을 흔들고 있는 로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웃었고 시몬도 웃었다. “시몬-!”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류운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까치발을 세우고 그를 보았다. “류운!” “고맙소! 정말 고맙소!” 류운은 떠나가는 배를 따라잡으려는 듯 달리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두 손을 흔들었다. “그대 덕분에 세상에 정말 새로운 게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됐소! 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쩌렁쩌렁 외쳤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보겠소!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말이오!” -내게 죽음을 선물해 주시오! 처음 만났던 때의 류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한 차례 울려 퍼졌다. 시몬이 이를 드러내며 팔을 높이 들었다. “잘 살아 류운!” 배는 포탈을 향해 힘차게 강물을 가르며 나아갔다. * * * 같은 시각. 대륙의 북부, 제2군단장 집무실. 멋들어진 제복 차림에 흑발의 여성이 다리를 꼰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제2군단장이자 북부대공으로 이름 높은, 진 아르스칼트였다. “……확실하느냐.” “예, 확실한 정보입니다.” 그녀의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볼드윈 왕국이 황제의 손에 넘어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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