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40화 진현의 생명을 나눠 가지고 있던 파편들이 모두 소멸했고, 악몽 같았던 타락의 구원자는 사라졌다. 쏴아아아아아― 진현이 죽음을 맞이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파멸의 대검을 짊어지고 지면에 내려선 시몬이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올려다보았다. 찬 비가 몸과 머릿속의 열기를 씻어내려 주는 것 같았다. 단비 같은 비였다. “시몬!” “타락의 구원자는요?” 그때, 각자의 몫을 해낸 로레인과 세르네가 달려왔다. 시몬이 웃으며 엄지를 척 세웠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소멸했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로레인이 안도하듯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숨을 토해냈고, 세르네가 후훗 웃으며 비에 젖은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쏴아아아아아―!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시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불사의 병사들이 행동을 중지한 채 우뚝 멈춰 있었다. 그들을 옭매던 타락의 힘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내려진 진현의 명령도 사라졌기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리라. 빗물이 투구 안으로 들어가고, 온몸이 무겁게 젖어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르네가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진현이 죽어도, 한번 불사의 병사가 되어버리면 영영 되돌리지 못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어.” 시몬이 눈썹 사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일단 다시 궁 지하로 내려가서 천년향의 심장을 가져와 보자. 심장에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두 사람이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 로레인은 차박차박 빗물에 젖은 땅을 밟으며 한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병사의 등을 살짝 밀어 비가 내리지 않는 처마 밑으로 옮겨주었다. 시몬이 말을 멈추고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비 맞는 게 안타까워서.” 그 말을 들은 시몬도 빙긋 웃더니, 병사들을 비 맞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살짝 힘을 주어 밀거나 손을 이끌기만 해도 병사들은 넘어지지 않고 순순히 걸어서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이들 모두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을 뿐, 확실히 생물로서의 자각은 남아 있었다. 세르네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도와주었다. 마치 양치기 개가 양 떼를 모는 것처럼, 이제는 조금만 움직임을 유도해도 그들은 움직였다. 그러던 중. “…….” 시몬은 불사의 병사들 중에 유독 익숙한 체구를 발견했다. 남들보다 작은 몸집에, 소형 사이즈의 갑주를 입은 병사. 시몬은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투구를 벗겨보았다. 쏴아아아아아!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소년. 다름 아닌 시몬이 천년향에서 처음 만났던 류운이었다. “류운, 나야.” 시몬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늦어서 미안해. 나 기억해?” 류운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미 결사의 ‘불사의 군사화’에 당한 건지, 그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흐르지 않았다. 그가 대륙의 디저트를 먹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행복해하던 모습이 그 옆으로 겹쳐 보였다. ‘반드시 구해야 해.’ 시몬은 류운이 비를 맞지 않도록 처마 밑에 데려간 뒤,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며 상냥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반드시 널 원래대로 되돌릴게.”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로레인과 세르네가 기다리는 쪽으로 걸어가다가, 못내 마음이 쓰여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니. “!” 류운이 고개를 움직여 시몬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마치 자신을 격려하는 것 같았기에, 시몬이 한층 더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세 사람은 진현과의 전투 이후 궁궐 지하에 방치되어 있던 심장을 가지고, 안전한 궁궐 내부로 옮겨왔다. 그즈음 궁궐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경 수비대를 이끌고 왕도로 내려온 호란 장군과, 태수들을 설득하여 진현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도마뱀 얼굴을 온전히 드러낸 흑사곡 태수. 선발대를 이끈 키젠의 교수인 아론, 별야, 스테이시 교수. 후속 원정대를 이끈 아보 교수까지. 그 외에도 몇몇 천년향의 대신들이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시몬이 로레인과 세르네를 대동한 채 방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우리 귀염둥이!” 별야가 제일 먼저 한걸음에 뛰쳐나와 시몬을 꽈악 끌어안았다. “역시 해냈구나! 꺄하하학!” “벼, 별야 교수님!” “수고했다 시몬.” 그 뒤로 다가온 아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론 교수님……!” 이어서 스테이시 교수와 아보 교수도 시몬에게 안부를 묻는 동안, 커다란 그늘이 시몬의 위로 드리워졌다. “후흥! 천년향을 구해낸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영웅이여!” 호란 장군이었다. 진현이 사라지고 타락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평온해진 얼굴이었다. “천년향을 구할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지른 무례에 용서를 구합니다.” 도마뱀 얼굴의 흑사곡 태수도 예를 갖췄다. 시몬이 손사래를 치며 애써 웃었다. “영웅이라뇨.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시몬의 시선이 잠시 창 밖으로 향했다. 여전히 세월에 잠식된 불사의 병사들이 우뚝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천년향을 구했다고 말할 시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동의하듯 표정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잠시 후 언데드들이 천년향의 심장을 가지고 왔다. 워낙 커서 그런지 이 넓은 궁궐의 방이 꽉 들어찬 듯한 느낌이었다. “소승이 살펴봐도 되겠사옵니까.” 이때 승복을 입은 남자가 심장을 향해 걸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시몬이 경계하자, 흑사곡 태수가 곧바로 안심시켰다. “태청 도사는 천년향에서 가장 뛰어난 도사입니다. 왕도에서도 우리와 함께 싸웠죠.” 태청 도사는 심장에 부적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여러 도술을 걸었다가 해체하기를 수차례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왕의 힘은 확실히 사라졌사옵니다. 허나 심장이 ‘불사의 저주’에 오랜 세월 물들어 있었기에, 본디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는 단언키 어려운 일이옵니다.” 곳곳에서 탄식과 우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힘들게 진현을 쓰러뜨렸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이때 시몬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동시에 시몬의 몸에 살짝 기댄 세르네가 후후 웃었다. “진현왕이 어떻게 죽었겠어요? 시몬이 드디어 ‘죽음’을 만들어냈다구요.” “저, 정말이오?” 세르네의 말에 좌중이 급격히 들썩였다. 시몬은 우선 죽음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전체적인 상황을 짚고 넘어갔다. “제가 듣기론 천년향의 국민 70% 이상이 세월에 잠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불사의 군대가 되어 습관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죠. 이대로는 천년향에 희망이 없다는 걸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시몬의 냉정한 진단에 호란 장군과 흑사곡 태수, 그 밖에 천년향 대신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에 잠식된 사람들을 되돌리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시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 두 번째는 필사의 육체입니다.” 그 말에 한 대신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이해하겠소만, 필사의 육체가 필요한 건 어째서요?” “저 자신을 예시로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진현과 싸우기 위해 불사의 힘을 스스로 제 몸에 받아들인 최초의 인간입니다.” 시몬은 불사를 얻은 뒤, 고작 며칠 만에 사고와 정신마저 빠르게 불사자처럼 변해 버렸다. 죽음이나 상처 따위에 무감각해지는 등, 불사의 육체는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설명했다. 사실 이 부분은 굳이 시몬이 설명하지 않아도 천년향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다 병에 걸려서 생활이 불편해지면, 그날 밤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져 목숨을 끊고, 소생해서 돌아오는 풍습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필사의 육체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시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모든 인생에는 끝이 있다는 안도감이 되돌아올 때,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바뀌게 될 겁니다.” 시몬이 설명을 마쳤고, 천년향 조정에서는 곧장 회의가 열렸다. 시몬은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불로불사는 어떤 세계를 가든 인류의 숙원이고, 대륙에서도 현재까지 많은 네크로맨서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불사를 포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회의 분위기는 뜻밖에도 달랐다. “나는 천년향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세월의 잠식을 견뎌왔소. 허나…… 너무도 오래 살아온 탓인지 그런 의지도 많이 무뎌졌소.” 흑사곡 태수가 나서서 말했다. “천년향은 지난 1,000년 동안 정체됐소! 아무런 발전이나 변화 없이 똑같은 일만 되풀이 됐지. 이제는 우리가 용기를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불사가 사라지면 죽음의 공포와 다시 마주하게 되겠지만, 그런 진통 없이 어찌 진정한 발전과 행복을 바라겠소!” 다른 대신들도 하나둘 동의의 뜻을 밝혔고, 그렇게 회의 끝에 천년향 측도 불사의 법칙을 끝내는 것에 동의했다. 결론이 모아져 시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제 다시 시몬이 나설 차례였다. 그가 심장 앞으로 걸어왔다. ‘침착하자.’ 이미 대궐에 있는 저주학 교수 바힐과 연락하여, 모든 소생 지연 효과를 해제했고 소생 중이던 사람들도 모두 천년향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잡념을 비우고 마음을 다잡은 시몬이, 눈을 감고 두 손을 펼치며 마법진의 원을 그렸다. 몸 앞으로 마법진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죽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로 감탄이 번져 나갔다. 특히 태청 도사는 이게 무엇인지 아는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놀라워했다. <역전(力田), 필사의 저주> 그렇게 마법진에 죽음을 담아낸 시몬이 심장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이 힘을 부여했다. 키이잉! 죽음을 심장에 부여하자, 사람에게 사용했던 때와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심장에 이미 걸려 있는 불사의 저주가 필사의 저주에 충돌하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시몬이 힘겨운 소리를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밸런스를 맞춰야 해!’ 죽음이 너무 강하면 심장이 시들어 버릴 것이다. 반대로 생명이 너무 강하면 다시 이전의 정체된 천년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중요한 건 균형. ‘내가 원하는 건, 무조건적인 죽음도 무조건적인 삶도 아니야!’ 시몬이 류운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필요한 건 순환!’ 샤아아아아아아! 노란색과 검은색을 오가던 심장이 마침내 두 색이 어우러져 짙은 녹색으로 변해갔다. “오오!” 한 대신이 감격스러운 탄성을 토해냈다. “바로 이겁니다! 과거 천년향 심장이 가졌던 바로 그 색이오!” 전신에 힘이 빠진 시몬이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졌고 기다리던 로레인과 세르네가 서둘러 그 뒤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이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강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 시몬은 자신의 가슴을 붙잡았다. 로레인도 가슴에 손을 올렸고. 다른 천년향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덜덜-!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던 사람들은 입술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는 놀라며 멈췄다. 턱을 괴고 있다가 팔꿈치에 퍼지는 저릿한 감각에 자세를 고쳐앉는 사람, 몸을 꼬집어보는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중에 흑사곡 태수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지금 이 순간 깨달았소.” 그가 감격한 얼굴로 손을 벌벌 떨었다. “살아 숨 쉬는 게 무엇인지를.” * * * 천년향의 생태계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불사의 법칙이 사라지고, 순환이 찾아왔다. 물론 사람만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저길 보세요!” 대궐에 남아 있던 키젠 학생들이 앞을 가리켰다. 대궐 밖 환경에도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영역에 한 발자국만 침범해도 예민하게 굴며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단목마들이, 싸움을 멈추었다. 영역에 누군가 들어와도 다투지 않고, 서로의 몸을 핥아주기까지 하는 등 변화한 모습을 보였다. 알을 낳고 죽기를 반복하던 개구리 몬스터, 하루앓이들도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스스로 늪 밖으로 헤엄쳐 나와 맑은 물에서 물고기를 사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특별한 변화가 있다면. 치르르- 치르르- 세계에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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