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37화 시몬과 로레인은 운반 중인 심장과 함께 우물을 통과했다. 이내 우물 밖으로 빠져나오니 숲의 경관은 사라져 있고, 어둑어둑하고 물때 냄새 가득한 궁궐 지하에 도착해 있었다. ‘전에 카쟌이랑 같이 왔었지.’ 시몬은 이미 한번 와본 곳이라 익숙했다. 다행히 지하를 지키던 불사의 군대도 보이지 않았는데, 요새와 궁궐을 지키느라 밖으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움직이자, 로레인.” “응.” 시몬과 로레인이 궁궐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그 뒤를 심장을 감싼 어보미네이션이 뒤따랐다. 어보미네이션은 게처럼 생긴 다리로 계단을 어렵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었다. 시간도 조금 남았겠다. 시몬은 계단을 오르면서 손바닥을 펼치고 한 가지 흑마법을 준비했다. “그건 뭐니?” 로레인이 물었다. “네게 걸었던 것과 같은 ‘불사의 저주’야. 바힐 교수님과 상의하기 전에 미리 한번 만들어보려고.” 시몬이 칠흑을 움직여 손바닥 위의 수식과 요소들을 바꿔 나가고 있었다. 로레인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콤펠로가 끝나면 기억은 휘발된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런데…….” 두 번이나 사용했던 흑마법이어서 그럴까. 마법진을 구성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칠흑의 기억하는 성질처럼, 기억의 무의식에서 수식의 일부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 바힐과 함께 했던 ‘부스러기 모으기’ 훈련으로, 무의식을 끄집어내는 데 능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옳은 것, 옳다고 믿는 것을 취한다.’ 시몬이 빠르게 수식을 맞춰 나가며 계단을 올랐다. 어둑어둑하고 음침한 지하.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걱정 말고 마법진에 집중해 줘. 당장 인기척이나 마력 반응은 없어.” 로레인이 말했다. “우리는 계속…….” 그때. 소리가 들렸다. 흐흥- 흠- 으으음- 흐음- 으으음- 이 노랫소리. 시몬은 섬뜩함을 느끼며 마법진 제작을 멈춘 채 고개를 들었다. ‘진현의 노랫소리다!’ 세월에 잠식된 불사의 병사들을 움직일 때 들리던 그 음성이었다. ‘……불가능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는 없어.’ 시몬이 계속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노랫소리가 반복되듯 울려 퍼질 뿐이다. “시몬.” 그때 로레인이 먼 허공을 가리켰다. “저길 봐.” 투둑- 툭- 저 멀리 허공이 퍼즐 조각처럼 툭툭 깨져 나가떨어지고, 그 안에서부터 길고 매끄러운 무언가가 서서히 튀어나왔다. 사람의 팔이었다. ‘…징그러워.’ 시몬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긴 팔이 서서히 손바닥을 펼치더니, 이내 시몬과 로레인을 향해 뻗어왔다. “시몬! 달려!” 쿠쿠쿠쿠쿠쿵! 거대한 팔이 두 사람이 달리는 계단을 강타했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계단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스스스스스! 스스스스! 허공의 깨진 틈바구니에서 더 많은 여성의 팔들이 튀어나와 그들에게 손바닥을 벌리며 다가왔다. 시몬이 즉시 팔 하나를 겨냥하며 손끝을 세웠다. <엑사니미스(Exanimis)> 대상을 튕겨내는 저주를 발사했지만, 저주가 팔에 닿기 전에 퍼즐 모양으로 쪼개졌다. 시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 팔에도 진현의 힘이……!” 이번엔 로레인이 앞으로 나섰다. 손안에 붉은 이능을 모아 단검의 형태로 제련한 뒤, 그것으로 허공을 그었다. 붉은 검격이 일어나 다가오던 거대한 손이 베었다. 역시나 로레인이 가진 마계의 힘은 제대로 분해하지 못하는 모양. 마치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상처 입은 손이 움찔 물러섰다. ‘맘 같아선 코랄 리치를 꺼내고 싶은데……!’ 문제는 정신력 소모였다. 모든 정신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먹는 코랄 리치를 계속 쓰면, 방금 얻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과 집중력이 휘발될 것만 같았다. 우웅! 다행히 시몬이 나서지 않는 만큼 로레인이 대활약했다. 그녀는 아공간에서 목 없는 언데드, 듀라한 두 기를 꺼내 이능으로 강화한 뒤 다가오는 팔들과 싸우게 했다. 동시에 그녀도 직접 뛰어올라 검기를 끝없이 날려 보냈다. 열쇠의 힘만 사라졌을 뿐이지, 여전한 강함이었다. “시몬! 네 쪽으로 하나 가!” 쿠웅! 그 말에 시몬이 재빨리 뛰어올라 다가온 팔을 피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팔 하나가 계단의 아랫부분을 강타했다. 격렬한 흔들림과 함께 뒤따라 올라오고 있던 어보미네이션이 심장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큭!” 시몬이 심장을 되찾기 위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지만, 팔들이 구불거리며 방해했다. 투욱. 두 개의 팔이 손바닥을 붙인 채 펼쳐서 떨어진 심장을 받아냈다. 손들이 그대로 심장을 어루만지자, 타락의 힘으로 심장을 보호하던 어보미네이션이 곤죽처럼 녹아내렸다. 두근 두근 두근! 온전히 드러난 심장이 손바닥 위에서 박동했다. [나는 분명 기회를 줬어. 시몬 폴렌티아.] 심장에 이상현상이 벌어졌다. 심장 윗부분에 종기가 난 것처럼 무언가가 불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시몬은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설마!’ 퍼억! 심장의 껍질을 찢으며 팔이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이에 허공에 머물고 있던 거대한 팔이 내려와 작은 팔의 손끝에 자신의 손끝을 맞닿게 했다. 파아아아아앗! 빛이 번쩍이며 ‘잉태’가 시작된다. 두근! 두근! 심장의 내부에서 몸뚱어리가 줄줄 흘러내린다. 금빛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 작은 체구와 팔다리, 머리까지. 막 태어난 아기처럼 점액에 범벅이 된 소녀의 형상을 한 존재가 서서히 올라와 미소 지었다. [내가 말했지? 심장을 부수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구.] 스윽. 팔들이 긴 로브를 가져와, 구멍 난 몸의 소녀에게 입혔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비극은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 시몬 폴렌티아.] 그녀는 몸에 난 구멍 위로 익숙한 듯 반창고를 쓱쓱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 같잖고 알량한 정의감으로 천년향의 심장을 부수지 않았으니, 나는 살아서 너희 키젠 모두를 죽일 거고, 대륙으로 넘어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학살할 거야.] 마지막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린 그녀가 두 개의 반창고를 교차해 제 머리 위에 툭 하고 붙인 뒤 입꼬리를 쭉 들어 올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네 정의감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을, 불사의 목숨으로 영원히 지켜보며 후회하렴.] 말을 마친 그녀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시몬을 바라보았지만. “…….” 시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혐오를 넘어서서 한심함, 이제는 오히려 딱하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전형적이네.” [뭐?] “인질의 목에 칼로 상처를 내고, 그걸 가까이 오는 경비병 잘못이라고 말하는 범죄자의 사고방식.” 시몬이 피곤한 표정으로 목을 주물렀다. “칼을 쥔 건 너고 인질을 상처 입히는 것도 너야. 그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협박공갈로 타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 시몬이 자신의 머리를 두 차례 툭툭 두들겼다. “나는 절대로 네 뜻대로 되지 않아, 타락의 구원자.” […….] 진현의 이마에 핏줄이 뿌득뿌득 섰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너는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작은 암세포를 축출하는 데 한 세계를 멸망시키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 시몬이 주먹을 꾹 쥐자 검푸른 칠흑이 피어올랐다. “너만 가볍게 도려내고, 이 세계를 구할 거야.” 하. 하하하……! 그녀가 입을 뺨 끝까지 쭈욱 찢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너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거슬려, 시몬 폴렌티아.] 이제 됐어. 그렇게 말한 그녀가 두 팔로 제 얼굴을 붙들었다. 꾸르르륵! 마치 찰흙을 주무르듯 그녀의 얼굴은 힘을 가하는 대로 뭉개졌다. 얼굴에 이어 가슴, 배, 다리까지 전신을 마구잡이로 주물러 댔다. [정말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그녀가 제 가슴 위에 손바닥을 툭 올렸다. [나 자신을 타락시키는 건 말이야!] 화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힘의 파장이 그녀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시몬이 외쳤다. “로레인!” “준비됐어!” 이때 로레인이 단검에 모은 마계의 힘을 참격의 형태로 진현에게 날려 보냈다. 주변 전체가 온통 시뻘겋게 물들 정도의 강력한 광범위 공격이었지만, 허공에서 튀어나온 열 개의 팔들이 가로막으며 대신 공격을 받아냈다. 아쉽게도 진현에게 닿지는 못했다. 참격에 당한 팔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수복을 진행하는 사이, 시몬의 시선이 손바닥 사이로 보이는 진현의 본체 쪽으로 향했다. 샤아아아아아아! 빛이 뿜어져 나오며 변화가 시작됐다. 곤죽이 된 몸이 부드럽게 펴지며 우아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옥색의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길고 매끈한 몸통, 은빛 장식이 가득한 갑주가 그녀를 감싸며, 마침내 두 팔을 펼쳤다. 스스스스스스-! 허공에 나와 있던 여러 팔들이 공간의 틈으로 들어갔다가, 진현의 등 뒤에서 피어 나왔다. 엄지와 약지를 붙여 원을 만든 열 개의 팔들이 좌우로 펼쳐진다. 화아아아아악! 주위의 공간마저 급격히 변화한다. 칙칙하고 어둡던 지하실이 빛의 사원처럼 변하며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이 빛의 사원의 신처럼 군림하여 시몬과 로레인을 내려보고 있었다. <진현 오리지널 – 천수관명(千手觀命)> ‘……타락은 역전.’ 시몬이 그녀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추악한 모습에 타락을 건 결과가 이렇게 나오네.’ 진현이 자애로운 음성을 흘리며 열 개의 손을 펼쳤다. [불사의 몸인 너희에게 자비를 내려주마.] 놀라운 힘의 압력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이들의 전투가 벌어지려는 그때. “늦었네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쿠우우우우우웅! 시몬과 로레인이 있는 계단으로 무언가 강하게 부딪혔다. 이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시몬의 눈이 반가움으로 커졌다. “세르네!” “반가워요. 피어를 데려왔어요.” 밝게 손을 흔들어 보인 세르네가 이내 피곤한 표정으로 로레인을 보았다. “결국 돌아왔네요. 왕재수.” “세르네.” 늘 앙숙처럼 지냈지만 로레인은 그런 그녀도 반가운 듯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세르네도 결국 픽 웃으며 받아넘겼다. “피어.” 시몬이 타락의 살덩이에 갇힌 피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이 싸울 시간이에요.] 뚜둑! 뚝! 뚜두두둑! 시몬의 절대명령에 피어의 몸을 뒤덮은 타락의 살갗에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쩌어어어어어엉! 마침내 금이 가며 피어가 튀어나왔다. [크하하하하하!] 철컥! 척! 예상대로 타락의 힘은 에이션트 언데드에겐 닿지 않았다. 피어의 몸이 본 아머로 분해되어 시몬의 몸에 자리 잡았다. 드디어 엄청난 힘과 함께 안도감을 느끼며 시몬이 씩 웃었다. [크흐흐! 이제야 제대로 싸울 맛이 나는군 소년!] “기다렸어요 피어.” 피어는 잠시 연결된 사념으로 시몬을 살피다가,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단독으로 군단기를 쓸 정도라니, 그사이 상당히 성장했군! 이제는 내 보조가 없어도 될 정도인가!] 스릉! 시몬의 파멸의 대검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함께하면 더 강하죠.” 우웅! 로레인이 이마에서 붉은 뿔을 일으키고. 펄럭! 세르네가 등 뒤에서 천사와도 같은 흰 날개를 펼쳐냈다. “이 결전에서.” 악마와 천사의 형상을 한 소녀들 사이에서,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진현을 향해 드높이며 외쳤다. “널 이기고, 천년향을 구하겠어.”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