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36화 길을 안내해 주는 모험가 브루트를 따라, 시몬과 로레인은 여름 밀림을 걸었다. 높게 자란 풀, 잎이 길고 넓은 밀림 특유의 나무들까지. 겉보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숲처럼 보였다. “타락의 구원자는 만물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거야?” 로레인의 물음에, 시몬이 고개를 저으며 옆의 나무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멀쩡한 겉모습과는 달리 안에서 공허하게 텅 빈 소리가 났다. “아니, 이것도 일종의 타락이야.”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내부는 뒤틀리고 비비 꼬여 있다. 타락한 채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건, 천년향 세계 특유의 생명력 덕분이다. 아마 다른 세계였다면 진작에 시들었으리라. “성질의 역전. 그게 바로 진현이 가진 ‘타락’의 본질이라고 봐.” 여름 숲을 지나다 보니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걸은 끝에 시몬은 비로소 이 열기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용암……!’ 우물과 가까워지니, 어느새 한 지역이 부글부글 끓는 용암지대로 변해 있었다. 언덕들은 분화구처럼 바뀌었고, 사방에서 썩은 계란 같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세계를 비틀다 못해 환경마저 격변시키는 힘. 사실상 진현의 권능은 이제 타락을 넘어서 만능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심해서 가자.” 조심성 없는 모험가 브루트가 폴짝폴짝 뛰어가다가 용암 구덩이에 빠져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시몬이 말했다. 그렇게 용암지대를 지나 쭉 걸으니 마침내 사당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우물. 그 위에 앉아 있는 건 가증스러운 긴 금발을 늘어뜨린 진현이었다. [왔구나?] 그녀가 태연히 우물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고는 시몬과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계속 도망 다닐 줄 알았는데 제 발로 술래 앞에 찾아오다니, 기특하네.] 시몬은 아공간을 열고 리치의 지팡이를 꺼내서 손에 쥐었다. 팔과 어깨에 리치의 본 아머들이 착착 달라붙었다. “무슨 소리, 술래는 그쪽이야.” 깔깔깔깔!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동료들을 미끼로 쓰고 도망친 주제에 말이 많네! 그거 알아? 날 상대하던 세 사람은 모두 타락의 포로가 됐어. 셋 다 프라이드가 높아서 그런지 타락시키는 재미가 아주 각별하더라구.] 그녀가 입가에 손을 올리고 남성의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덩치가 큰 드래곤 친구, 얼마나 고집이 센지 너덜너덜해진 채로도 필사적으로 나를 막아 세우더라구.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끼하하하하학!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퍼졌지만, 시몬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시몬을 보며 헹 하고 흥이 깨진 듯 혀를 찼다. [뭐야, 시시해. 그렇게 세상 다 산 노인처럼 그러기야? 불나방처럼 달려들 때가 더 재미있었는데.] “너와의 전투에서 한 가지 지침을 정했어.” 시몬이 차분히 말했다. “네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을 믿을 것.” [오, 그래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자기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그런 걸 나한테 말해줘도 괜찮을까?] 두 팔을 벌린 채 목소리를 한껏 드높이던 그녀의 입가가 쩍 벌어졌다. [그런 믿음을 내가 이용할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어.” 시몬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건 확신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게 내 감이야.”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무미건조하게 바뀌었다. 마치 떫은 감을 입에 댄 것처럼 혀를 쭉 내밀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재. 미. 없. 어.] 그녀의 목소리에 언짢음이 깃들었다. [그렇게 감각에만 의존하다가 대차게 당한 거 기억 안 나? 왜 이렇게 학습능력이 없지? 뇌가 상한 거야? 그 대갈빡에는 뭐가 들어갔길래!] 시몬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역정을 냈지만, 이쪽은 정답을 맞힌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역시.’ 진현이 혐오하는 건 불변(不變), 부동(不動). 그녀는 타락의 구원자이기에, 변화를 원한다. 불로불사의 왕이 변화를 추구하고 불변을 혐오한다니 조금 아이러니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 생각해 보자면, 천년향의 불사는 불변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시몬.” 그때 로레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내가 앞에서 싸울 테니 서포트를 부탁해.” 피어가 없으니 배려해 주는 것 같았다. 시몬이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너도…….” “열쇠의 계약이 사라져서 마계를 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몸에 깃든 내 본연의 이능만으로도 충분해.” [짜증 나아아아!] 저 멀리서 진현의 외침과 함께 들끓는 용암이 곳곳에 퍼즐 모양으로 떠올랐다. [죽어!] 터엉! 텅! 터어엉! 믿기 힘들 만큼 거대한 용암 퍼즐 조각들이 날아왔다. 시몬은 어보미네이션이 운반하던 심장을 전장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 로레인은 손안으로 단검을 불러들이더니 검지 끝을 세워 단검의 칼날을 따라 천천히 그었다. <인퍼널 인챈트> 손끝이 칼끝을 떠나는 순간, 칼날이 선명한 루비색으로 물든 채 형태가 변화하고, 그녀가 즉시 단검을 휘둘렀다. 째애애애애애애애앵! 마치 악마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퍼즐 조각이 두 쪽으로 갈라져 좌우로 떨어져 내렸다. 스윽. 자세를 낮춘 로레인이 지면을 한 차례 걷어찼다. 그녀의 몸이 붉은 잔상을 그리며 쏘아져 나가더니, 날아오는 용암 퍼즐을 발로 딛고 날아올랐다. 터엉! 텅! 텅! 터엉! 발 디디는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지나 싶더니 순식간에 그녀가 퍼즐들을 밟고 진현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절공(絶空)> 진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손날을 휘둘렀다. 공간을 가르는 검은 참격이 그어졌으나, 로레인은 순간적으로 무릎이 땅에 닿을 듯이 몸을 낮추고 허리를 크게 꺾어 피해낸 뒤 진현을 지나쳤다. 이내 놀라운 허리 힘으로 자세를 복원하며 진현의 등을 향해 단검을 휘둘러 붉은 참격을 날려 보냈다. [그딴 공격, 백날 해봐.] 진현은 늘 그랬듯 태연히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촤아아아악! 로레인의 붉은 검격이 그녀의 등을 베었다. 검격이 중간에 퍼즐 형태로 쪼개지긴 했으나 해체 속도가 느렸고, 절반이나 남은 위력이 진현의 등에 상처를 낸 것이다. 눈을 부릅뜬 진현이 ‘크읍!’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시몬에게 들었어. 네 타락의 권능은 구조가 복잡한 힘일수록 변질에 시간이 걸린다지?” 로레인이 똑바로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앞세웠다. “미안하지만 내가 다루는 마계의 힘은 키젠에서도 17년간 연구하다 포기한 완전 미지(未知)야.” [기어오르지 마!] 진현이 팔을 내밀어 퍼즐화한 압축공기를 방출하려는 순간. 퍼억! 보랏빛 섬광이 번쩍이며 날아와 그녀의 팔을 날려 버렸다. [결사 킬……!] 퍼억! 퍽! 연이어 그녀의 어깨와 머리 한쪽도 섬광이 뚫고 지나갔다. 뇌수가 터지고 팔이 날아갔지만 모든 공격을 받고도 ‘수복’으로 버티고 있었다. 천 년을 산 천년향의 왕답게 수복 속도마저도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후웅! 그사이 로레인은 단검을 허벅지의 포켓에 넣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등 뒤로 아공간이 열리고, 소환학 시간에 만든 개과 언데드인 ‘스컬독’이 우르르 쏟아졌다. <로레인 오리지널 – 인퍼널 게이트> 그녀의 앞으로 붉은 이능이 모여 ‘대문’ 형태의 마법진이 펼쳐지고, 그것을 통과한 스컬독들의 형태가 시뻘건 힘으로 뒤덮여 변모했다. 그들이 사방에서 진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용없다니까!] 이에 진현도 퍼즐 형태로 만든 지면을 던져 스컬독들을 파괴했으나, 몇몇 스컬독들이 빠르게 우회해서 진현의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에 진현의 권능이 발현하여 가까이 온 스컬독들이 퍼즐 형태로 바뀌어 즉시 흩어졌지만. [!] 소환수가 사라져도, 극도로 복잡한 로레인의 붉은 힘은 그대로 남아 진현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퍼억! 동시에 코랄 섬광이 날아와 왼 다리를 날려 보냈다. 털썩 한쪽 무릎을 꿇은 진현이 이를 갈며 손바닥을 땅에 짚었다. [기껏해야 20년도 못 산 햇병아리들이!] 쿠구구구구구! 지면이 퍼즐 모양으로 일어나, 시몬의 코랄 섬광이 날아오던 방향을 방패처럼 가렸다. 후우우우웅! 그사이 로레인이 폭연을 뚫고 들어와 단검을 내질렀다. 이에 진현은 순간적으로 몸을 세워 그녀의 단검을 어깨로 받아내고는, 자신의 긴 금발을 움켜쥐었다. 찰랑이는 금발 머리카락이 타락의 힘으로 검게 물들더니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여 로레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아윽!” 붙잡힌 로레인이 뼈가 부서질 듯한 압력에 괴로워했고, 진현은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꺄하!’ 하고 웃었다. [내가 바로 타락의 구원자 진현!] 머리카락에 손을 뗀 그녀가 다시 한번 손에 타락의 힘을 끌어올려 제 머리카락에 투여했다. [이 모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구원’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가시나무처럼 변화하며 곳곳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났다. 로레인의 몸에서 무수한 핏줄기가 솟구쳤다. 진현이 혀를 내밀어 악마의 피를 받은 뒤, 입안으로 삼키며 음미했다. [네년만큼은 철저하게 타락시켜서 완벽한 연극을 만들 거야! 죽음의 마녀가 피눈물을 흘릴 만큼! 모녀가 서로 칼을 겨루는 비극의-!] 진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머리 위에서 무수한 액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 위에서 클래식 정장을 입은 리치들이 지팡이를 세우고 있었다. 시몬이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그런 일은 없어.” <터치 오브 피그말리온> 진현의 몸이 순간적으로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주위에 떠돌던 타락의 힘이 사라졌고. 그걸로 충분했다. 화아아아아아악! 로레인이 두 팔을 떨치며, 해방하는 듯한 자세로 돌이 된 머리카락을 산간조각 내며 빠져나왔다. 동시에 시몬도 마지막까지 준비하던 마법진을 발동했다. <바힐 오리지널 – 아니마 빈클리스> 소생 지연의 저주가 진현에 적중하는 동시에 석고상이 쩌억 소리를 내며 갈라졌고, 진현이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무슨 짓거리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소생을 늦추는 저주, 아니마 빈클리스가 그녀의 몸에 새겨진 상태에서- 푸우우우우욱! 이를 악물고 득달같이 달려든 로레인이 붉은 단검으로 진현의 심장을 꿰뚫었다. 가히 완벽한 협공이었다. [아.] 진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건……!] “잘 가.” 전신의 상처를 ‘수복’하며, 불사가 된 로레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다시 소생할 즈음엔, 우리가 죽음을 완성한 뒤일 거야.” [개짓거리!] 진현이 로레인의 팔을 붙잡고 발버둥 쳤으나 로레인이 주문을 외웠다. “멸(滅).” 이내 진현의 몸에서 붉은빛이 폭사하며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완전한 해체. 비로소 그녀의 몸이 대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절그럭. 전투가 끝나고 로레인이 손에서 단검을 떨어뜨리며 숨을 헐떡였다. “우리가 해냈어. 시몬.” “…….” 분명히 진현은 완전히 해체됐다. 시몬은 그녀의 힘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때와 같아.’ 하지만 머릿속에 드는 기시감. 이번의 ‘감’은 시몬에게 새로운 경고를 하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로레인.” “응?” “진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올 거야. 시간이 없어.” 두 번 속지는 않는다. 시몬이 말했다. “심장을 가지고 이 숲에서 빠져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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