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35화 “……나 어떻게 된 거야?”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로레인의 첫 물음이었다. 마침 군단의 언데드들이 승기를 잡아 불사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해체하고 있었기에, 시몬도 그녀에게 천년향의 비밀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복잡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죽음으로 타계의 계약을 해체하다니…… 믿기 힘드네.” “도박수긴 했지만,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어.” 로레인을 구하기 위해 콤펠로를 켜고 천년향의 심장을 들여다봤을 때, 콤펠로 상태의 자신은 다른 방법들은 모두 내버려두고 다시 한번 ‘불사’를 만들 것을 선택했다. 불사가 로레인이 가진 타계의 계약을 씻어내 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로레인.” 시몬이 진심을 담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로레인의 손끝이 떨렸다. 잠시 앞머리로 눈가를 가리고 어깨를 떨던 그녀가 이내 숨을 아주 길게 토해냈다. 후우우우우우- 모든 비탄, 공포, 의심, 외로움. 그 모든 것을 한숨에 쏟아내듯 길게 내쉰 그녀가, 마침내 한결 선명해진 루비색 눈동자를 띄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촤아아아아악! 그녀가 손에 든 단검을 휘두르자, 천년향의 절벽에 그려진 그림에 금이 가더니 절벽째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결사가 마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막힌 것이다. 그림을 봉쇄한 로레인은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이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고마워. 그리고―” 그녀가 살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몬 너도,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야.” 그 한마디에 방심하고 있던 시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 고마워.” “으응.”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시몬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고, 로레인은 머리를 베베 꼬았다. 그러다 로레인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어쩌지? 네 원래 목표는 콤펠로 상태에서 천년향의 심장을 보고, 구원자를 쓰러뜨릴 ‘죽음’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했잖아. 설마 나를 구하느라 죽음을 만들지 못하게 된 거야?”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임펠라투스 콤펠로는 이제 쓸 수 없다. 바힐이 준 외눈 안경이 부서졌으니까. 하지만. “아무 대책이 없는 건 아니야. 사실 콤펠로 상태일 때 죽음을 만들기 위한 단서들도 몇 가지 적어놨거든.” 시몬이 한 팔에 깃펜으로 쓴 글자를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아직은 추측 단계지만, 죽음으로 가는 길은 분명히 ‘불사’와 관련이 있어. 방금 내가 만든 불사의 수식에 더해, 이 지식들을 합쳐서 바힐 교수님께 전달하면…….”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거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시몬과 로레인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잘려 나간 무수한 언데드의 파편 속, 한 살덩어리가 흐느적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두 다리로 몸의 균형을 잡고, 허리가 서서히 올라오고, 이내 앞으로 휘청이며 몸이 세워졌다. 독에 감염되어 문드러지고 불타서 역한 냄새를 풍기는 바스테리온의 몸. 그중에서도 얼굴에 새겨진 마름모꼴 문신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뿌득! 뿌드득! 문신이 얼굴 중간으로 모여들더니 서서히 윤곽이 잡히며 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사람의 ‘입술’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진현……!” 시몬이 로레인을 뒤로 보내며 경계했다. 바스테리온의 몸이 삐거덕거리며 고개가 옆으로 크게 꺾이고, 귀가 있는 부분에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진현의 것으로 보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뺨에는 소녀 같은 큼지막한 눈동자가 생겨나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1,000년에 걸친 내 계획을 잘도 망가뜨렸네, 결사 킬러. 마계로 가는 모든 길을 막아버리다니.]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뒤쪽으로 한번 시선을 주었다. [악마의 피를 병사들에게 머금게 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불사의 군대는 한 명도 죽지 않았어. 소모값이 없지. 하지만 너희는 어때? 너희가 발버둥 치는 동안 네 동료들은 시시각각 쓰러져 가지.] 그녀기 히죽 웃었다. [네가 날 붙잡아두려고 남겼던 그 세 사람처럼 말야.] 시몬의 심장이 철렁했다. 세 사람이라면 헥토르와 메리다, 그리고 호란 장군이었다. 그들 모두 당한 건가? 시몬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그때, 로레인이 앞으로 나왔다. “너희는 이제 마계로 갈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로레인이 가슴에 손을 얹고 눈에 힘을 주었다. “악마의 피를 원한다면, 여기 있는 나를 손에 넣어야 할 거야.” ‘로레인!’ 시몬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스테리온의 뺨에 생긴 입술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계의 열쇠, 너는 이제 힘을 잃었을 텐데?] “계약이 끝나서 열쇠로서의 힘을 잃었을 뿐이야. 내게는 아직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어.” 그녀의 손끝에서 이능인 붉은 힘을 일으켰다. “내가 로크섬으로 돌아가 버리면, 당신은 앞으로 영원히 나를 잡을 수 없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나를 상대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역시 로레인. 대단한 배짱이었다. 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현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바깥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하지만 인간의 몸뚱이에 담겨 묽어진 악마의 피를 손에 넣는 건, 이젠 내게 그다지 흥미로운 관심사가 아닌걸.] “그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게.” 저벅. 이번엔 시몬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가 다음번엔 무슨 짓을 꾸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앞으로도 네 계획을 방해할 거야.” 시몬이 천천히 손바닥을 움직여 주먹을 쥐었다. “대륙의 바다에서도, 드레스덴 왕궁에서도, 그리고 이곳 천년향에서도 그랬듯이 네 모든 계획은 내가 막을 거야. 이 지긋지긋한 악연, 피차 결착을 내고 싶을 텐데.” [아- 결사 킬러.] 그녀의 동공이 시몬에게로 향했다. 그 안에서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악의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좋아. 너희들의 뻔한 수작은 잘 알았어. 그런데 절대 죽지 않는 나를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지? 이번에 만든다는 죽음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네.]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이미 네가 해본 것들을 모두 해봤어, 결사 킬러. 불사는 만들 수 있지만, 죽음은 만들 수 없을 거야!] 그녀가 낄낄 웃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참! 깜빡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지.]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두 사람의 시선도 돌아갔다. 그곳에는 천년향의 심장이 두근두근 박동하고 있었다. [저 심장을 부수는 거야.] 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시몬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심장을 부수면 불사도 끝난다. 하지만 심장이 파괴되면, 천년향의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천년향은 끝장날 것이다. [그 외에 너희가 불사인 나를 죽일 다른 방법은 없어.] 진현이 희끄무레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자! 심장을 부수는 게 내게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야! 천년향의 심장을 파괴하지 않고, 이 세계에 죽음을 만들어낼 방법은 없거든!] 그 방법. 사실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시몬이 눈을 치켜떴다. “절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 시몬은 이전에 진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게 곧 변화가 시작될 거야! 기대되는데? 나는 너같이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가 타락하는 걸 보는 게 즐거워서 견딜 수 없거든! 그리고 보석일족의 코르비니스의 말도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의 태양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천년향의 심장을 부수는 건 세계의 멸망, 즉 ‘구원’.” 가증스러운 그녀는 자신을 구원자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만들어내겠어.” 잠시 침묵이 일었다. 바스테리온의 몸뚱이를 차지한 진현이 흐느적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방법을 알려줘도 굳이 그런 소릴. 그렇담 좋아.] 힘이 다한 건지, 바스테리온의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숨바꼭질을 시작해 볼까?] * * * 시몬을 잡기 위해서든, 악마의 피를 가진 로레인을 잡기 위해서든, 진현은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러니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 이동하자.” 시몬은 알라제에게 부탁해 심장을 옮길 소환수를 꺼내달라고 지시했고, 잠시 후 어보미네이션 네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 살점 언데드들이 풍선처럼 몸을 부풀리더니, 거대한 심장을 감싸며 막처럼 변했다. 그 아래에는 게다리들이 여러 개 붙어 있어서 그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심장을 옮길 준비가 끝났다. “계획은 있니?” 로레인이 물었다. “일단 우물로 돌아가야 해. 이 숲에서 빠져나가 천년향의 궁궐에 도착한 뒤, 진현과 마주치지 않고 바힐 교수님과 만나는 게 베스트야.” 시몬이 노트를 펼쳐 보였다. 죽음에 대한 힌트들을 여기 기록해 두었다. “이 힌트들과, 무의식에 남은 잔재를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조금 서두르자.” 일단 우물로 향하는 위치를 알아야 했다. 이에 시몬이 선택한 방법은 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인 브루트였다. 잠시 브루트들에게 ‘본체 쟁탈전’을 벌이도록 했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사이 여러 브루트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뽑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는데, 얼마 안 가 시몬이 원하는 브루트가 등장했다. [나는 모험가 브루트!] 나침반을 든 브루트였다. 시몬이 얼른 쟁탈전을 중지하고 뛰어 들어갔다. “우리가 같이 갔던 우물 기억하지? 거기로 가줘.” [모험가 브루트! 본체가 되기 위한 길을 찾는다! 최단 거리로 간다!] 그렇게 모험가 브루트의 길 안내를 받아, 시몬과 로레인. 그리고 아공간에서 꺼내둔 군단 병력 일부와 함께 이동했다. 군단 병력은 곳곳에 흩어놓게 해서 진현의 눈을 속이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그렇게 우물로 가던 중, 갑자기 새로운 환경이 펼쳐졌다. “……이런.” 눈이 쌩쌩 내리는 겨울 숲이 아닌, 구름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한 여름 밀림이 펼쳐져 있었다. 뒤는 겨울이고, 앞은 여름이었다. 로레인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여기 원래 이런 곳이니?” “그럴 리가.” 시몬이 여름 밀림으로 들어선 뒤 가까운 나무에 손을 올렸다. 잠시 가만히 있던 시몬이 표정을 굳힌 채 손을 탈탈 털었다. “타락의 힘에 변질되어 있어. 겨울 숲이 여름 숲으로 변한 거야.” “그렇다는 건…….”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진현이 이곳에 있어.” * * * 같은 시각. “흐으음.” 상앗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던 여학생이 긴 머리를 쓸었다. “……지금쯤 로레인 그 여자랑 알콩달콩 있으려나? 시몬은 알까 모르겠네요.” 마찬가지로 그림 속 세상을 헤매고 있던 세르네가 걸음을 멈추고는 앞을 보았다. 이곳을 지키던 여러 불사의 병사들이 쓰러져 있는 가운데, 생체 감옥과도 같은 거대한 살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내조하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타락의 살덩이에 들어가 있는 그것. 바로 ‘피어’의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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