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34화 마계의 열쇠로서 숙명을 받아들였을 때,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꿈을 포기하는 것도, 대륙을 지키기 위해 마계로 가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했다. 어릴 때 공부했던 제왕학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배웠다. 이제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고, 그것을 수행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미련이 있다면. -로레인! 마계로 가기 전에 봤던 그 얼굴. 그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지금, 그 소년이 눈앞에 있다. “시몬.” 그저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덤덤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흔들렸다. 왜 이렇게 결심을 흔드는 걸까. 왜 자꾸 나타나서 아프게 하는 걸까.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제 그만해.” 로레인의 쥐어짜 낸 한마디에, 그녀를 안고 있던 시몬이 천천히 몸을 떨어뜨리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더 이상 너희 세계에 속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난 처음부터 네프티스 님의 딸이 아니었어. 악마의 힘에 적합성을 가지고, 마계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야. 나는 태생부터…….” “아니.” 시몬이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로레인 아크볼드야.” “…….” “네프티스 님의 딸이자, 키젠 3학년이자, 소환학과 전공생이자-” 시몬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게 있어 소중한 존재야.” 로레인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누군지는 네 스스로 정하는 거야. 숙명이고 나발이고 아무 상관 없어.” “그게 무슨 억지야!” 그녀가 시몬의 가슴을 밀치며 물러서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말 잘했어! 내가 원하는 건 마계의 열쇠로서 세상을 구하는 것 뿐이야!” “그런데 왜-” 시몬의 눈이 진지해졌다. “그때 내 손을 잡았어?” “!” 심장이 요동쳤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공간을 넘어 들어온 시몬의 손을 왜 뿌리치지 못했을까. “네 표정과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어. 만약 네가 진심으로 우리 곁에 남기를 원한다면-” 시몬이 씩 미소 지었다. “그 외의 문제들은 내가 다 해결할게.” 촤르르르르륵! 그때 시몬의 등 뒤로 사슬검이 날아들었다. 로레인이 급히 시몬의 이름을 외쳤고, 시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을 들었다. <홍펭 오리지널 - 착검> 카앙! 날아온 사슬검이 시몬의 손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다시 촤르륵 소리를 내며 사슬검이 당겨지고, 그것을 붙잡은 바스테리온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눈물겨운 광경이군.” 얼굴 위에 꿈틀거리는 마름모꼴 문신과 함께, 바스테리온이 냉소했다. “열쇠를 주워다 자식이랍시고 키운 가증스러운 어미나, 희생당하는 신세를 자신의 의지라고 위안하는 딸이나, 멋대로 끼어들어 맘대로 하라고 억지 부리는 제3자나.” 철컥. 그가 사슬을 늘어뜨리며 자세를 낮췄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아.” 바스테리온이 양팔을 잡아당겨 사슬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화악! 시몬이 먼저 거칠게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 즉시 군단의 언데드들이 마치 살아 있는 팔처럼 뭉쳐 바스테리온을 붙잡아 그대로 암벽에 처박았다. 쿠쿠쿠쿠쿵-! 거대한 충돌로 암벽이 쩍쩍 갈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로레인의 눈이 커졌다. ‘평소 시몬이 쓰던 절대명령이 아냐!’ 고오오오오오오! “가증이 아니라 모성.” 시몬이 두 눈에 검푸른 칠흑이 일렁였다. “위안이 아니라 각오.” 딛고 있는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억지가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 이내 주먹을 쥐는 것으로 거대한 시체폭발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시몬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군단형 좀비들을 폭발시키며 바스테리온을 암벽 깊이 쑤셔박아 넣었다. “나는 로레인을 구할 거야, 결사.” 쿠우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앙! 쏟아지는 폭발 속에서, 두 개의 사슬검이 연기를 뚫고 나와 절벽에 박히더니, 이내 너덜너덜해진 바스테리온이 겨우 밖으로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자식!” 그가 다시금 공격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시몬은 검지를 앞으로 중지를 옆으로, 엄지를 위로 세운 채 척! 하고 들어 올렸다. 쏴아아아아아아! 세 방향에서 군단형 언데드들의 파도가 바스테리온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마치 악마가 입을 벌린 채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광경. ‘혈참환극(血斬環劇)!’ 이에 바스테리온이 등 뒤에서 한 쌍의 사슬검을 더 꺼내어, 네 개의 사슬검을 무아지경으로 휘둘렀다. 그의 주위가 절단의 영역으로 변하며 그를 집어삼키려는 언데드들이 모조리 고깃덩이처럼 갈라졌다. ‘어떠냐!’ 바스테리온이 피를 줄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지만, 곧바로 이상함을 느꼈다. 몸이 마비가 된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뒤늦게 그는 절단된 언데드의 시체에서 뿜어져 나온 액체나 연기 같은 것들이 사슬을 타고 자신의 몸에 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사슬검을 잠시 멈춘 순간. “시체-” 시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맹독폭발.” 즉시 모든 망자의 육신이 기다렸다는 듯 연기를 뿜어내며 연쇄적인 맹독폭발을 일으켰다. 시몬이 두 손으로 힘을 모으는 시늉을 하자, 폭발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치며 압축했다. 맹독가스가 점점 모여들며 압축, 또 압축하고, 시몬이 손가락을 튕기자, 스켈레톤 메이지 하나가 거기에 불을 붙였다. 후와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폭발과 함께 거대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와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미안, 다시 정정할게 로레인.” 시몬이 씩 웃었다. “네가 싫다고 해도 나는 널 되찾을 거야.” 눈이 부셨다. 뒤의 폭발로 일어난 빛과 열기보다,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그가 내민 손이 더 눈이 부셔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자꾸만 희망을 주려는 걸까. “말했잖아……. 나는 이미 열쇠의 계약을 마쳤어.”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느새 로레인의 몸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며 서서히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건 피의 저주야. 열쇠가 된다는 건 완전히 마계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해. 나는 마계 밖에서 살 수 없어. 그러니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없어.” 자기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듯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시몬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곱씹고 있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계약을 끝낼 조건이 뭐야?” “죽음.” 그녀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내가 죽지 않고선 계약을 끝낼 수 없어.” “그래? 그런 거라면.” 시몬이 저벅저벅 다가갔다. 이제 7군단의 언데드들이 불사의 병사들을 거의 다 해체시키고 있는 가운데, 시몬이 다가가는 방향에 있는 건 바로 천년향의 심장이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 “불가능해! 죽음은 그 무엇으로도 거스를 수 없어! 네크로맨서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하긴 그녀는 천년향의 법칙에 대해 잘 몰랐다. 시몬은 말없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고, 뒤늦게 로레인의 눈이 커졌다. “다쳤던 손이……!” 바스테리온의 칼날을 튕겨내느라 엉망이 되었던 손이 어느새 깨끗이 회복되어 있었다. “시작할게. 5분간 날 지켜줘. 그리고.” 그가 로레인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떠나지 말아줘. 온몸이 조각나도 널 살려 보일 테니까.” 이제 익숙한 준비였다. 순식간에 7개의 마법진을 펼치고 천문대를 작성하며, 외눈 안경을 준비한다. ‘앞으로 한두 번 사용하면 깨지겠구나.’ 너무 많은 임페라투스 콤펠로를 사용한 탓인지 외눈 안경은 금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시몬이 그것을 한쪽 눈에 쓰며 마침내 흑마법을 발현했다. <임페라투스 콤펠로> 우우우우우우웅! 순식간에 모든 사고가 멎으며 천년향의 심장이 새롭게 보인다. 불사와 윤회의 법칙이 소용돌이치는 정보의 결정체. 정신이 일순 아득해졌지만, 얼마 안 가 집중력이 또렷해졌다. 로레인의 계약을 깰 방법, 아까는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확신이었다. 시몬이 이 지식을 응시하며 정보를 기록하려는 그때. [오랜만이야.]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몬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콤펠로를 사용했을 때, ‘문’을 넘어서 다다를 수 있었던 자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자, 모든 것이 아닌 존재.’ [슬슬 한계일 거야. 만물의 덧없음과 하찮음에 진절머리가 나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일렁였다. 그러자 시몬은 자신의 의욕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뒤를 이어오는 새로운 감정이 차올랐다. 덧없음. 생이란 결국 죽고 사라지는 것이며 모든 건 극도의 찰나에 불과한데, 어째서 한 명의 인간을 살리려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 걸까? [이제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너라면 할 수 있어.] 목소리가 속삭였다. 시몬은 그 존재의 손이, 자신의 시야를 잡아둔 천문대 마법을 붙잡아 걷어내고,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하는 의지를 느꼈다. “미안하지만 그쪽으로 갈 때가 아니야.” [응?] 시몬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람을 살려야 해.” [소중한? 소중하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해. 욕구, 욕망, 가치. 그런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나와 함께 한 발 떨어져 모든 것을 관조하자.] 그자가 말했다. [티끌만큼 덧없는 찰나, 그 찰나에 잠깐 존재하는 아주아주 작은 알갱이. 그런 것에 왜 네 모든 것을 걸어야 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덧없기 때문에-” 시몬이 의지력을 끌어올렸다. “소중한 거야.” 샤아아아아아아아! 이내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고. [……네가 그렇다면야.] 째애애애앵! 외눈 안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떠올리던 수식에 뭔가 추가되는 동시에 강제로 콤펠로니아가 풀리며 시몬이 뒷걸음질 쳤다. “허억, 헉!” 시몬이 숨을 헐떡이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로레인의 몸이 조각조각 흩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하반신은 거의 남아 있는 곳이 없었다. ‘로레인! 마계에 가지 않고 날 믿어줬구나!’ “괜찮아?” 사라져 가는 로레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느새 주위에는 불사의 군사 몇 명이 쓰러져 있고, 저 멀리 아직도 힘이 남아 덤벼든 것으로 보이는 바스테리온이 붉은 상처를 입은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시몬이 후욱 하고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믿어?” 시몬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이이이이이잉! 모든 것이자 모든 것이 아닌 존재의 간섭 때문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하지만. ‘무의식에 진리의 잔재가 남아 있어.’ 바힐이 가르쳐 준 그대로 한다. 시몬이 마법진을 펼치고 무아지경으로 그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만드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손끝으로 새겨가는 룬어와 수식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집중력과 흐름에 온몸을 맡긴다. 짧고 강렬한 과정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 마법진이 시몬의 손에서 찬란히 빛났다. 이제 로레인의 몸은 거의 다 조각나고 가슴과 얼굴 정도만 남아 있었다. “허억! 헉!” 점점 사라지려는 로레인의 가슴 위에 두 손을 올린 시몬이 그녀를 보았다. “고마워 시몬.” 스르르르르르- 이내 덧없이 그녀의 존재가 흩어져 사라졌다. 허무와 정적만이 주위를 휘감았다. 그리고- 시몬이 말했다. “어서 와.” 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란색 실이 엉키고 얽히며 한 ‘손’이 생겨났다. 그것은 천천히 흔들리며 허공을 휘젓다가 이내 시몬을 향해 손바닥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이번에는 시몬이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스스스스스- 팔이 생기고 어깨가 생긴다. 복부가 일어나고 하체가 생겨난다. 입이 생겨나며 입이 말한다. “……시몬.” 코가 생겨나고 귀가 생겨나고 마침내 눈이 생겨난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생과 동시에 저주처럼 일렁이던 타계의 기운은 증발했고, 마침내 열쇠의 계약에서 벗어난 로레인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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