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32화 저벅저벅. 시몬은 천천히 용상 위를 걸었다. 왕 외에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왕좌의 계단에, 시몬은 발에 지긋이 힘을 주어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용상 위로 모두 올라온 그가 고개를 들었다. 용상 너머로 보이는, 벽에 붙어 있는 한 폭의 그림. 마치 봄이 오는 것을 표현하듯 연분홍빛 꽃잎이 가지 끝에 곱게 매달려 있고, 그 아래로는 푸른빛을 띤 어린 새싹들이 푸르게 펼쳐진 아름다운 그림이다. 시몬이 용상을 밟고 올라서서 그 그림과 눈높이를 맞추고 마주하는 순간. 우우웅! 그림이 출렁거리더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 속 나비들이 살아 움직이고, 나무들이 흔들린다. ‘이게 바로 스테이시 교수님이 말씀하신…….’ 비밀의 통로였다. 천년향에는 ‘던전’이 없지만, 던전처럼 공간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사물이 존재했다. 지하에 있는 우물이 그랬고. 용상의 이 그림이 그랬다. 각오를 마친 시몬이 무릎을 굽힌 뒤, 훌쩍 도약해서 그림 안으로 들어갔다. “!” 주위 환경이 수채화처럼 은은한 색조로 물들어간다 싶더니, 이내 생동감이 살아나며 아름다운 자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흔히 천년향에서 보던 낙엽이 아닌, 분홍색 꽃잎이 은은히 흩날리는 ‘봄’의 길. 싱그러운 벚꽃잎이 흔들리는 나무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선 오솔길에, 시몬은 와 있었다. 살랑- 그때 꽃잎 사이로 반짝이는 뭔가가 손안에 내려왔다. 그것을 본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르네의 깃털!’ 확실했다. 시몬이 얼른 그것을 자신의 몸에 꽂아보았고. -어머나, 무사히 도착했나 보네요. “세르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무사한 거야? 다친 곳은 없고?” -호호호, 걱정해 주는 거죠? 그럼요. 조금 다쳐서 붕대를 둘렀지만 지금은 다 나았어요. 시몬이 안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디야?” -시몬이 들어와 있는 그 그림 속이에요. 잠입했다가 살짝 길을 헤매는 중이지만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보다……. 그녀의 목소리에 무게가 더해졌다. -모든 비밀을 풀었어요. 타락의 구원자, 진현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말해줄게요. “역시 대단하네!” 시몬은 앞으로 달리면서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현재 천년향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이야기하던 그녀가 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왕도까지 오는 길에 불사의 군대를 상대해 보니 감상이 어때요? 시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싸울 만했어. 바힐 교수님의 ‘아니마 빈클리스’가 개발된 이후로는 병사들의 소생 시간이 지연되고 있으니까.” -맞아요. 네크로맨서들은 어떻게든 해답을 찾을 것이다. 키젠 학생들과 교수진만으로도 이런 성과를 낼 정도인데, 홈그라운드인 대륙에서 암흑연합 전체가 역량을 총동원한다면 방법을 찾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진현은 생각했어요. 단순히 사람을 불사로 만드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럼 어떻게 하겠단 거지? 결사의 연구실로 데려가서 신체 개조라도 하려는 걸까?” -그건 어렵겠죠. 수복의 효과 때문에 몸을 약물로 도핑해도 금방 원상 복귀될 테니까요. 하지만……. 세르네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악마의 피를 주입한다면 어떨까요? “!” 시몬이 걸음을 멈추었다. 꽃잎이 휘날리는 오솔길. 그 앞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스윽. 슥. 탈을 쓰고, 넘실거리는 주황색의 길디긴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자들. 창을 어깨에 짊어진 채 앞을 막고 있는 건 진현의 근위대인 ‘금군’이었다. -왜 그래요? “별거 아니니까 계속 말해줘. 방금 악마의 피라고 했지?” 시몬이 성큼성큼 금군들을 향해 걸어갔다. 금군들도 어깨에 짊어진 창을 내리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래요. 육신의 성질을 근본부터 바꿔 버리는 영구적 변질. 타락의 구원자가 너무나도 탐낼 만한 물건이죠. 시몬이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어깨를 옆으로 틀었다. 벼락처럼 나타나 내지른 금군의 창이, 시몬의 가슴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나갔다. -천년향에서는 악마를 도깨비라고 불러요. 그리고 도깨비는 ‘황천’에 사는 존재들이죠. 시몬이 한 손으로 창대를 붙잡았다. 힘주어 끌어당겨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팔꿈치로 얼굴에 쓴 탈을 가격했다. 쩍! 소리와 함께 탈에 금이 가고, 중심을 잃은 금군이 무릎을 꿇자 시몬이 그의 턱을 무릎으로 쳐올렸다. -진현이 황천에 가려는 이유는, 바로 불사의 군대를 악마의 피로 강화하기 위함이에요. 음,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려나요? 그 실험의 증거가 바로……. 쩌적! 마침내 탈이 갈라져 쪼개지고 금군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시몬의 눈이 부릅떠졌다. 탈 너머로 드러난 그의 이마에는 뿔이 달려 있었다. -금군이에요. * * * 겨울 숲, 천년향 사당. 휘이이이이이잉! 차디찬 눈발이 흩날렸다. 눈과 서리가 소복이 쌓인 나무들, 발 디디는 곳마다 흰 눈이 덮인 이곳에, 두 개의 사슬을 팔에 휘감은 바스테리온이 걸어가고 있었다. 척. 흰 입김을 뿌리며 걸음을 멈춘 바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커다란 절벽이 솟아 있었다. 그 중심에는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듯한 ‘그림’이 색이 바랜 채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뿔 달린 괴물, 긴 혓바닥. 그리고 벌을 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바로 ‘황천’을 그린 그림이었다. “……오래 걸렸다.” 그렇게 중얼거린 바스테리온이 눈을 감았다. “이제,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을 때다.” 그가 품에서 염료가 든 약병을 들어 올리더니, 엄지로 뚜껑을 따고는 그림을 향해 던졌다. 약병에서 쏟아진 염료가 그림을 가득 적시고, 이내 그림이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움직이는 그림의 윤곽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그 안에서 새로운 공간의 틈이 열렸다. 천년향에서 황천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뿐인 통로였다. “황천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황천으로 들어가 악마의 힘을 얻은 뒤, 모든 세계를 손에 넣을 것이다.” 바스테리온이 입김을 흘린 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수백 명의 탈을 쓴 금군들이 서 있었고 그 뒤로 수천 명에 이르는 무장한 불사의 군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군세였으나, 바스테리온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수백만이 아니라 수천인가.” 진현의 계획은 완벽했다. 자그마치 1,000년을 기다린 계획이었다. 천도제를 치르고, 세월에 잠식된 천년향의 백성들을 타락시킨 뒤, 황천으로 끌고 가 악마의 피를 마시게 할 생각이었다. 금군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수백만의 불사자 군대. 아무리 규격 외의 전력을 가진 대륙이라고 해도 결코 막을 수 없는 진격이었으리라. 하지만 불과 얼마 전에,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황천으로 갈 수 있는 모든 포탈의 좌표가 일그러졌고. 거기에 천도제 한 달 전에 숙적인 키젠까지 이곳에 나타났다. 결국 시간에 쫓기듯 왕도를 요새화하면서 버티고, 운용 가능한 수의 병력만 움직여 지금 이곳 겨울숲까지 데려온 것이다. 계획의 막바지에 계획이 어그러진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수천을 불사와 악마의 피로 무장시키는 것만으로도 대륙을 무너뜨리는 데는 충분하리라. “천년향의 심장을 가져와라.” 두근! 두근! 금군들이 좌우로 물러나고, 그 사이로 거대한 들것에 실린 노란색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성만 한 크기의 심장이었지만, 금군 네 명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다. “진입해라.” 가장 중요한 심장부터 옮기려는 바스테리온의 지시에, 금군들이 그림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스테리온이 뒷짐을 지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바스테리온 님.] 뒤에 있던 금군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정말 심장을 저쪽 세계로 옮기실 겁니까? 심장이 사라지면 천년향의 생태계에 속한 모든 이들이 40시간 내로 죽을 겁니다.] “그 시간이면 이 인원이 모두 들어가는 데 충분하겠지.” 바스테리온이 서늘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 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금군이 물러나고 바스테리온은 다시 심장을 들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금군들을 지켜보았다. 천년향은 불사의 힘을 빼오는 것만으로 쓰임새를 다했으니 무너져도 상관없다. 비로소 아껴두던 천년향의 구원이 진행될 것이다. 이미 다른 세계에서 몇 차례 구원을 성공시킨 진현은 천년향의 구원을 바스테리온의 몫으로 남겨 그를 ‘구원자’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것은 더없이 순조롭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터어어어어어엉! 마치 그림이 침입을 거부하듯, 들것에 들린 천년향의 심장이 튕겨 나오고 금군들도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뭐지?” 입술을 뿌득 깨문 바스테리온이 옆의 금군들을 향해 손짓했다. “가서 이유를 알아내라.” 금군들이 고개를 끄덕인 뒤, 무기를 쥐고 일제히 그림을 통과했고. 잠시 후. 터어어어어어어엉!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림 밖으로 튕겨져 나와 눈밭을 나뒹굴었다. 바스테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금군들의 몸 곳곳에 깊게 베인 상처가 그어져 있고, 몇몇은 절단되어 있었다. 그대로 해체되는 자들도 있었고, 몸에 노란색 실이 일렁이며 ‘수복’이 진행되는 자들도 있었다. “빌어먹을!” 바스테리온이 두 팔에 휘감은 사슬검을 늘어뜨려 양손으로 붙잡았다. “따라와라.” 그가 직접 그림 속을 향해 뛰어들었다. * * * 주위가 그림의 색상처럼 흑색으로 일그러졌다가 이내 공간이 살아나듯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왔다. 투욱. 시커먼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황량한 대지. 그곳에 발을 디딘 바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어둠.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에는 황폐해진 육지가 허공을 떠다녔고, 그가 딛고 있는 땅의 전면에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낡고 갈라진 문. 높은 계단과 붉은 기와가 늘어진 그곳은 일종의 입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결사.” 소름 끼치는 살기를 흘리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성. 이마에 달린 붉고 선명한 뿔은, 악마의 피를 마신 그 어떤 금군보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바스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이곳으로 향하는 모든 포탈이 막혔다고 했더니.” 숨쉬기가 어려워 한 차례 숨을 헐떡인 바스테리온이 이를 갈았다. “‘문지기’가 있었나.” 그녀가 천천히 걸어와 로브를 벗었다. 그 얼굴을 보고 한차례 숨을 삼킨 그가 뒷걸음질 치다가 사슬검을 꽉 붙잡았다. “미쳤군.” “너희를 막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미칠 수 있어.” 그녀가 손을 들었다. -크르르륵! -그그그그! 천년향에서는 도깨비, 대륙에서는 악마라고 불리는 뿔 달린 생물들이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며 곳곳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희생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네프티스의 딸!” 그녀. 마치 악마처럼 붉은 힘에 취한 듯한 로레인 아크볼드가 손에 붉은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게 내 숙명이야.” 천년향에서는 황천, 그러나 이곳을 대륙에서 부르는 이름은 바로- ‘마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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