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30화 타락의 구원자, 진현이 바위에 걸터앉아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왕으로서 조정에서 군림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거뭇함이 감도는 분홍색 단발과 캐주얼하고 짧은 옷차림, 몸 곳곳에 붙어 있는 반창고까지. 시몬이 알고 있던, 타락의 구원자로 활동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저 여자애가…… 정말로 타락의 구원자야?”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는데.” 메이린과 딕의 소감이었다. 다만 하프 뱀파이어인 카미바레즈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시몬의 옷자락을 꼬옥 붙잡았다. “시몬, 어떻게 하면…… 아?” 이때 시몬의 표정은 너무나 심각했다. ‘……작정하고 왔어. 모두 대피시켜야 해.’ 그가 다급히 팔을 펼쳤다. “모두 후퇴하…….” “진혀어어어어어어언!” 쩌렁! 쩌렁! 호인족 특유의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호란 장군이 격분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저버린 죄를 알렷다.” 장군이 거대한 팔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대신하여 죄악을 심판하겠다! 쏴라!” 키젠 학생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호란의 병사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부적으로 돌돌 감긴 화살들, 던져지는 창들, 쏟아지는 부적과 도술까지. 무엇이든 초토화할 수 있는 방대한 화력이 진현의 정면을 향해 쇄도했다. [음-] 그녀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누구에게 하는 소리야?] 샤아아아아아아아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온갖 화살과 병장기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퍼즐 조각처럼 흩어졌다. 마법이나 부적도 마찬가지. 불꽃이 퍼즐 모양으로 꺼지고 얼음이 퍼즐 조각처럼 쪼개져 허공에 흩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차례 휘날리다 내려앉을 즈음엔, 그 모든 공격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꾸,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한 병사가 두려움에 떨며 활을 겨눈 채 중얼거렸다. [들으시오, 호란 장군.] 목소리를 바꾼 진현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오자 겉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보라색 단발은 찬란한 금빛 장발로, 난해한 디자인의 재킷과 반바지는 우아하고 긴 로브로, 소악마 같은 소녀의 얼굴도 중성적이고 소년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로. [어명이오.] 진현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들을 데리고 본래의 임무에 복귀하도록 하시오. 이 일은 천도제가 끝난 뒤에 책임을 묻겠소.] 스릉! 호란 장군이 으르렁대며 등에 멘 커다란 환도를 뽑아 들었다. 다른 병사들도 자세를 낮추고, 키젠 학생들도 두 팔을 뻗으며 흑마법을 준비했다. 바로 그때. “모두 멈춰.” 후우우우우웅! 시몬으로부터 압도적인 기백이 퍼져 나가며 모든 병사와 동기들이 흠칫했다. 호란 장군마저 놀란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소름 돋아. 주목의 저주?” “그거 아닌 것 같은데.” 그저 칠흑을 뿜어내는 것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은 시몬이 진현의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머릿수의 우위가 무의미한 상대입니다. 여긴 저 혼자 맡겠습니다.” 그가 탈을 벗어서 얼굴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진현이 혀를 달싹거렸다. [결사 킬러! 역시 살아 있었구나? 분명히 코어를 꿰뚫고 타락을 집어넣었는데 어떻게 멀쩡히 서 있는 거야?] 시몬은 그 말은 무시하고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가세요. 너희들도 모두 왕도로 가.” 시몬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가 멈칫해 있는 그때, 메이린이 시몬의 의도를 읽듯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시몬도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확성 수정구를 들어 말했다. “학생회장의 말에 따르자.”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학생들이 일제히 정신을 차리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네크로맨서들은 모두 냉정한 판단이 가능한 자들이었고, 진현이 대적하기 힘든 강자라는 사실도 이해했다. “힘내! 마이 베프!” “시몬, 꼭 무사하세요!” 딕이 시몬의 어깨를 툭 두들겼고, 카미바레즈는 시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가 떠났다. 펄럭! 메이린은 자신이 어깨에 메고 있던 학생회장 코트를 벗어서 시몬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마른 체형의 그녀에겐 상당히 커 보였던 코트가 비로소 주인을 만난 듯 깔끔하게 떨어졌다. “무리는 하지 마.” “알았어, 메이린.” 스윽. 어느새 다가온 아보 교수가 굳은 얼굴로 시몬의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괜찮겠니? 나도 남을까?” 그의 얼굴은 미덥지 않아 보이던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진지했다.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학생들이 크게 다치지 않았던 것도 교수님 덕분이잖아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진현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알겠다. 만에 하나의 상황은 이걸로 대비하렴.” 투욱. 그가 자신의 피가 담긴 주사기를 건넸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사이 호란 장군도 고민 끝에 팔을 세워 신호를 보냈다. “후흥! 진현왕은 무시하고 바로 왕도로 이동하라.” “예!” 모두가 앞을 막은 진현을 우회해 왕도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작별하는 때에 분위기 깨서 미안하지만.] 그녀가 로브에 감싸진 하얀 다리를 쭉 들어 올렸다. [누가 보내준대?] 쿵! 진현이 바닥을 짓밟자 지면이 어두운 색상으로 변질되며 퍼즐 조각처럼 갈라졌다. 땅의 변화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샤텔이 입술을 떨며 외쳤다. “뛰어!” 터어어어어어어어엉! 모두가 급히 지역을 벗어나려 했지만, 밀집해 있던 수비대 다수는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딛고 있던 지면이 빠르게 타락으로 물들어갔다. 타락한 땅이 병사들의 다리부터 빠르게 침식했고, 가슴에서 머리까지 거뭇하게 물들어 변질되었다. “끄으으윽!” “허억!” 몸 곳곳이 나무뿌리 같은 질감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수복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단 한 번의 발 구르기만으로 수백의 병사가 증발했다. “계속해서 다음 공격이 온다!” “흩어져!” 이번엔 진현이 허리를 기울이고 입술을 오므려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지면에 생긴 금이 퍼즐 조각으로 갈라진 채 떠올라 아군 진형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쿵! 대규모 질량 공격. 퍼즐 조각으로 쪼개진 땅에 부딪힌 병사들의 몸이 짓이겨졌고, 그대로 오염되어 해체되기를 반복했다. 진현이 깔깔깔 웃었다. [좋아, 좋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국경 수비대! 하지만 다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렴! 푸웁! 아하하하!] 그녀가 한 손을 펼쳐 허공에 두었다. 카가가가가가가각! 그녀의 손안으로 거대한 흐름이 모이며 어둡게 물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응축되고 있었다. [다들 왜 그래? 날 막으러 모여든 거잖아! 너희들의 목표인 내가 여기 짠 하고 나타났다구!]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막상 만나니 답이 없지?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꼴을 보니 목적이고 신념이고 다 꺾여 버렸네? 나는 신체의 타락도 좋지만, 역시 정신의 타락이 가장 좋아!] 그녀가 모아둔 힘을 날리려던 순간. 촤아아아아앙! 시몬이 꺼내든 지팡이로부터 보랏빛 섬광이 쏘아졌다. 자신을 향해 오는 공격을 감지한 진현이 픽 웃었다. [어떤 공격이든 소용없다니까……!] 퍼억! 퍽! 두 줄기의 섬광이 그녀의 머리와 팔을 뚫고 지나갔다. 그녀의 팔이 툭 하고 지면에 떨어졌고, 그녀가 응축시켜 둔 힘도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마에 구멍이 생긴 그녀가 멍하니 눈을 굴렸다. [엉?] 샤아아아아-! 허공에는 광선이 쪼개진 듯한 조그마한 보라색 퍼즐들이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이 발사한 코랄 섬광도 그녀의 권능 앞에서는 공평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상쇄되고도 아직 형태와 속도가 남아 있어 그대로 그녀를 꿰뚫은 것이다. 스스스스-! ‘수복’의 효과로 그녀의 이마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알을 굴려 그녀는 방금 섬광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역시 너만큼은 정말 특별하다니까. 결사 킬러.] 처음으로 진현에게 타격을 주고 ‘수복’을 강제시켰다. 진현뿐만 아니라 모두의 놀란 시선이 시몬에게로 쏠렸다. “빨리 떠나세요.” 그 말에 미처 피하지 못한 키젠 학생들과 병사들이 빠르게 흩어져 도망쳤다. 진현이 다시 발을 들어 지면을 타락시키려 했지만. 촤아아아아아! 이번에도 시몬의 지팡이에서 코랄 섬광이 날아왔다. 그것은 그녀에게 닿기 직전 퍼즐처럼 변하여 위력이 절반으로 줄었으나, 남은 화력만으로 그녀의 발목을 꿰뚫었다. 휘청하며 쓰러지려던 그녀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버틴 채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왜 잘 안 먹히는 거지?] 코랄 섬광을 자신의 능력으로 100% 막지 못하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 기술, 어디서 본 적이…….]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가 이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 화이트랜드와 옐로우랜드. 쌍둥이 놈들이 점거하고 있던 ‘코랄’ 맞지? 그 망할 쌍둥이! 최악의 적에게 그걸 빼앗기면 어쩌자는 거야! 빌어먹을! 쓸모없는 것들! 죽은 뒤에도 발목이나 잡고!] 진현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감정 변화가 심한 적이라고 생각하며, 시몬은 미소 지었다. “모든 공격을 전부 그 퍼즐화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네.” 시몬이 액자를 양손으로 붙잡고 좌우로 벌리자, 어느새 하나였던 액자가 마술처럼 두 개로 늘어났다. “대충 물체와 현상을 타락시켜 구성의 역순으로 분해하는 원리겠지? 구성 성분이 복잡할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고.” 그 액자에서 지팡이 두 개가 튀어나오더니 다시 한번 코랄 섬광을 쏘아 보냈다. 진현이 이를 악물며 팔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섬광의 위력을 전부 줄이지 못하고 어깨와 허벅지가 꿰뚫리며 핏물이 튀었다. 코랄은 상호 반발하는 두 원소가 융합해 고에너지 상태로 발사되는 방식이었다. 다차원적 연쇄 반응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구성이 상당히 복잡했다. ‘진현을 상대하기에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왔어.’ 완벽한 카운터. 대 타락의 구원자전에 한정한다면 피온 모드보다 코랄 리치와 액자로 무장한 쪽이 훨씬 유리했다. 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가 두 팔을 추욱 늘어뜨렸다. [그래서 뭐.] 다시금 코랄 섬광이 쏘아지며 그녀의 가슴과 머리를 꿰뚫었다. 머리 한쪽이 날아가고, 두개골이 깨진 채 뇌가 드러나며 눈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걸로 날 죽일 수 있어? 뭘 할 수 있는데?] 순식간에 ‘수복’으로 재생한 그녀가 히죽 웃으며 긴 황금 머리를 쓸어넘긴 뒤, 팔을 휘둘렀다. [너희는 못 이겨.] <절공> 쩌어어어어어어엉! 진현의 공간베기가 발동했다. 시몬이 급히 자리에서 뛰어올랐고, 주위의 공간이 찢어지는 효과와 함께 커다란 궤적이 생겼다. 멀리서 휘말린 병사들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큭!” 시몬이 뒤로 물러나는 사이, 진현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로브를 휘날리며 나타난 그녀가 공중에서 두 발을 붙이며 유성처럼 내려왔다. 시몬이 액자를 들고 몸을 날려 피했고, 그녀가 떨어진 곳에 꾸우우우우웅! 소리와 함께 지면이 타락하며 퍼즐 모양으로 갈라졌다. “후읍!” 멀리 착지한 시몬이 코랄 섬광을 쏘아 보냈지만, 그녀는 이번엔 직접 몸을 틀어 피해내더니 다시 거칠게 팔을 횡으로 휘둘렀다. 연속으로 터지는 절공. 주변의 공간이 베이며 수많은 병사들이 해체되어 사라졌다. ‘마투, 아니, 본연의 체술만으로도 압도적으로 강해!’ 시몬이 진땀을 흘리고 있는 그때. [진현왕!] 진현의 등 뒤에서 호란 장군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자신의 병사들은 거의 다 왕도로 보냈지만 호란은 여전히 전장에 남아 있었다. 살벌한 궤적과 함께 호란 장군의 환도가 진현의 뒤통수를 향해 휘둘러졌고. 샤아아아아아! 환도가 진현의 뒤통수에 닿기 직전에 퍼즐 조각처럼 흩어졌다. 진현의 싸늘한 눈동자가 호란을 향했다. [꺼져.] 그녀가 팔을 휘둘러 공간을 베었고, 호란이 놀라운 반응속도로 범위에서 벗어나며 외쳤다. “지금이오! 시몬!” <더 젠틀맨스 어코드(The Gentleman's Accord) - 신사협정> 처억! 호란이 시간을 끌어준 사이, 시몬이 하늘에서 지팡이를 앞세웠다. 허공에 증식하듯 늘어난 수십 개의 액자 속에서 클래식 슈트 차림의 리치들이 튀어나와 그 동작을 따라 하듯 똑같이 지팡이를 겨누었다. [이까짓……!] <터치 오브 피그말리온> 그러나 움직이려던 진현의 발이 석고상처럼 변하여 움직일 수 없었고. 그 순간 모든 지팡이가 불을 뿜었다. <녹시에타스 연계 – 아니마 빈클리스> <신사협정 연계 – 파이널 살루트(Final Salute)> 사방에서 소생 지연 저주와 코랄 섬광이 그녀의 자리로 집중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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