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76화 시몬이 베히모스 전함을 제작하려 벤야 바닐라와 만났을 때, 벤야는 마누스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해 주었다. 시몬은 마누스와 고장 난 카오스 듀라한에 대한 복구 의뢰를 벤야 쪽에 해둔 상태였으니까. 결과적으로 카오스 듀라한의 복구는 어느 정도 완료됐으나, 전 소드마스터 마누스의 두개골을 얹어서 그것을 조종하는 단계에서 실패했다. 육체를 얻은 마누스는 평소보다 더더욱 폭주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듀라한의 육체가 완전히 바스라졌다고. 뒤이어 마누스가 움직일 만한 여러 몸을 준비해 보았지만 전부 마누스의 폭주를 견디지 못했다. 시몬이 한동안 계속 데스나이트만 운용하고, 드래고니안 슈트를 자신이 직접 다뤄야만 했던 이유였다. -마누스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어, 제군아. 그런데 가장 이상한 점이 뭔 줄 알아? -이상한 점이요? -응. 폭주하고 분노하는 마누스의 사념에서 새로운 의식이 피어나려고 하고 있단 거야. 현재의 마누스는 본래 사념이 날아가고, 오로지 강자에 대한 투지와 검에 대한 집착만이 남은 껍데기였다. 그런데 그 마누스의 사념에서 새로운 ‘이성’이 자리 잡히려 하고 있다. -진짜 이상하지만 말야! 예를 들자면, 사념이 날아간 에이션트의 육체에 다시 새로운 에이션트 언데드가 태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야! 무슨 소린지 알겠니? -……자,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하지. 설명을 하던 벤야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사실 이것도 내 추측일 뿐이야. 이 세상에 관측된 적 없던 현상이니까. 하지만 내 추측이 맞다면 지금 마누스의 흥분과 폭주는 언젠가 다른 존재가 되기 전의 과도기 증상일지도 몰라. -그럼 새로 태어난 마누스는 이전의 마누스와 동일한 존재일까요? 그녀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다르지. 그건 마누스가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야. 이어서 시몬은 벤야와 같이 베히모스 전함을 제작하던 알라제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같은 에이션트 언데드니까 더 잘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데드에 불가능은 없음. 브루트의 예시. 한 몸에서 다양한 이성 존재. 하지만 알라제 또한, 과거의 마누스와 지금의 마누스는 다를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벤야와 알라제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몬은 천천히 눈을 떴다. “…….” 마히할라의 마을 회관의 천장이 보인다. 어느새 밖에서는 평화로운 새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구나. 어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 시몬은 부스스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자리가 좁아서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곳곳에서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칵. 그때 마침 뒷문이 열리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는 메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시몬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야, 메이린. 벌써 씻고 온 거야? 부지런하네.” 시몬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리를 비켜주었고, 메이린은 물기 있는 머리를 매만지며 시몬의 옆자리에 앉았다. 촉촉한 하늘색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찰랑거렸다. “잠을 별로 못 잤어.” 메이린이 투정 부리듯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짐작한 시몬이 쓰게 웃었다. “부장님 코골이 소리가 심하긴 했지.” “그것도 그렇고.”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마을, 어쩐지 계속 찜찜한 느낌이 들어.” 그 말을 들은 시몬이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1군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 때문일 거야. 너무 임무를 신경 쓰지 말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기자 일에 집중하자.” “응!” 쿵쿵쿵쿵! 그때 마침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메이린이 ‘흐긱!’ 소리를 내며 시몬의 팔뚝에 찰싹 붙었다가, 다시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시몬은 웃음을 터뜨렸고,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이내 열린 문으로 그들을 안내해 준 마을 주민들이 나타났다. “자, 이제 일어나시죠! 여러분!” “마을의 일과가 시작됐습니다!” 기자들은 마히할라 마을의 일과를 촬영해야 했고, 관광객들도 모두 체험활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아침에는 우선 토마토 수확을 도와야 했다. 마을사람들과 다 함께 토마토밭으로 갔다. “넓다!” 마을의 땅 대부분이 토마토밭이었다. 어떤 씨앗끼리 교배해서 품종을 개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토마토가 튼실하고 통통했다. 관광객들은 군말 없이 열심히 토마토를 수확했다. 잘 익은 것을 조심스럽게 따서 겉에 상하거나 벌레가 먹은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 다음 끌차에 넣고, 끌차가 모두 차면 옆으로 밀고 가면 됐다. “이거 봐봐.” 메이린이 자신이 딴 토마토를 얼굴에 대면서 배시시 웃었다. “토마토 완전 크지?” “그러네. 유명할 만해.” “린 기자!” 마력 촬영구를 든 여기자 선배가 팔을 빙빙 흔들며 소리쳤다. “그 토마토를 들고 이쪽 보면서 포즈를 취해보세요!” “네!” 메이린은 머리에 쓴 밀짚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는 시늉을 한 채 다른 한 손으로 토마토를 강조하듯 들어 보였다. 찰칵하고 마력촬영구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것을 확인한 기자 선배가 ‘오오오!’ 하고 큰 소리를 내질렀다. “너무 잘 나왔어요! 어머나! 기사 전면에 실어도 손색없겠어요!” “저도 보여주세요!” 메이린이 신이 나서 아이처럼 뛰어갔다. 이내 결과물을 본 그녀가 손뼉을 맞부딪히며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에 시몬도 웃음 지었다. 이후로도 메이린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아저씨! 끌차 여기 두고 갈게요!” “젊은 아가씨가 싹싹하니 좋구먼!” 메이린은 활기찬 성격으로 단번에 마을 주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어딜 가든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 수확 후 분류 작업에서도 메이린의 꼼꼼함이 돋보였다. “이건 아예 다른 품종이에요, 학자님. 저쪽 바구니에 넣어주세요.” “아, 미안합니다.” “거기 스카프 두른 아저씨랑 옆에 파란색 옷 아저씨! 이거 옮겨주세요!” 키젠 부회장으로서 갈고닦은 통솔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이끌기도 하고, 일도 규칙에 따라 정확하게 해냈으며,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친절하고 예의 발랐다. 주민들은 메이린을 기자님 기자님 하고 깍듯이 부르면서 마을의 여러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여긴 외관이 울퉁불퉁하거나 껍질에 손상이 난 토마토들을 모아놨소. 전통 방식으로 토마토를 발로 밟고 으깨서 즙으로 만들지.” “마치 포도주 제조 같네요!” “한번 체험해 보시겠소?” 메이린은 마을에서 준비해 준 원피스로 갈아입고 맨발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채 토마토를 으깨며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들어가 있던 마을 여성들도 웃으며 반겨주었다. “여기! 여기 보세요! 린 기자! 아주 좋아요! 다음에는 꽃받침하고! 그렇지!” 기자 선배는 완전히 메이린의 모습에 꽂히고 말았다. 토마토 축제를 촬영하러 온 건데 거의 메이린의 화보 촬영이 된 느낌이었다. 부장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촬영기 마력 다 쓰겠다! 언제까지 린 기자만 찍을 거야? 우리는 언론사야! 정확한 사실과 정보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하지만-” 여기자가 마력촬영구를 내리며 부장을 바라보았다. “훌륭한 모델이 기사에 실린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확실히 잡아끌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슈잖아요? 이슈가 돈을 만드니까요.” “크흠!” 부장도 그런 부분에서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정보가 실린 기사도 사람이 봐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기자 선배의 말대로 시선을 확 잡아끄는 사진이 있다면 유용했다. “훌륭해요! 포즈와 시선 처리가 너무 완벽해! 기자가 되기 전에 무슨 일을 한 거야?” 네크로맨서다. 하지만 메이린이 저렇게 촬영에 익숙한 건 아마도 극장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 “에몬 기자! 이번엔 에몬 기자가 린 기자를 배경으로 축제의 사진을 찍어주세요! 나는 부장님이랑 옆의 창고를 촬영하고 올게요.” “넵.” 시몬도 마력촬영구를 들고 메이린의 사진을 촬영해 보았다. 바구니 안에서 마을 주민들과 수다를 떨며 토마토를 밟는 그녀의 모습. 뺨과 몸 곳곳에 토마토가 튀었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자연스러웠다. 절묘한 타이밍에 버튼을 누르고, 마력촬영구를 확인해 보니 주위 사람들이 휘척휘척 움직이는 바람에 곳곳에 잔상이 남으며 어지럽게 찍혔다. ‘마력촬영구가 싸구려인가.’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촬영구를 들어 올리는데. “나 찍어주는 거야?” 메이린이 시몬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촬영기로 움직임을 포착하는 게 쉽지 않네.” “그래? 그럼 멈춰서 포즈 취할게. 어떤 컨셉으로 할래?” “……음, 그럼 밝고 즐거운 느낌으로 부탁해.” 그 말을 들은 메이린이 바구니 벽에 붙은 토마토를 손끝으로 살짝 떼서 뺨에 묻혔다. 이내 시몬의 앞에서 브이자를 그린 채 혀를 살짝 내밀며 ‘헤헷’ 하고 악동처럼 웃었다. 메이린이 알아서 다 해주니 촬영이 무척 쉬웠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버튼을 누르며 감탄했다. ‘어떤 포즈도 쉽게 쉽게 해내는구나.’ “다른 컨셉으로도 찍어볼래?” “음, 그럼 이번에 조금 진지한 느낌으로 부탁해.” 메이린이 옆으로 걸어가 바구니 끝에 두 손을 얹고 눈꺼풀을 가볍게 내리깐 채 사연 있는 사람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시몬은 감탄하며 스위치를 눌렀다. 아름답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누리끼리하게 마력촬영구에 찍힌 그녀의 모습, 그리고 시몬은 고개를 드는 순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메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실물이 훨씬 나았다. 이런 마력 아티팩트로는 그녀를 반도 채 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났어?” 뒤늦게 민망한 듯한 메이린의 물음에 시몬이 엄지를 척 세우며 웃었다. “응, 완벽해.” 그렇게 날이 저물며 저녁이 되었다. 오늘도 저녁 식사 하나만큼은 풍족했다. 대부분이 토마토 요리라는 점이 조금 그랬지만, 워낙 토마토가 맛있었으니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장난하는 거요?”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시몬이 고개를 돌려보니 일행 중 한 사람, 요리사가 벌게진 얼굴로 주민들에게 뭐라뭐라 따지고 있었다. “시중에서 먹던 것과 맛이 달라! 전부 다르다고! 우리에겐 이런 걸 먹이고 귀족들에게 유통되는 토마토소스는 다른 걸 보내다니!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요!” “진정하시지요. 다 같은 토마토인…….” “세상은 속여도 내 혀는 못 속여!” 요리사가 노발대발하며 따지고 있었다. 뺨이 살짝 붉어진 게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미 한참 전부터 술에 취해 있던 일행의 주정뱅이가 낄낄대며 말했다. “비법 못 알아냈다고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긴!” 너무 목소리가 컸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그 주정뱅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인간, 랭거스틴에 식당을 가진 요리사야! 댁들 토마토의 맛의 비법을 캐내러 온 도둑놈이라고! 하하하!” 인문학자가 얼른 다가와 주정뱅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여전히 낄낄대며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도둑놈! 푸하하하하!” 결국 인문학자와 용병이 술에 취한 주정뱅이를 숙소인 마을 회관으로 데리고 갔고, 신혼부부가 분노한 요리사를 회관으로 데려갔다. 메이린이 얼른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 일행이 소란을 피워서요.” “괜찮습니다!” 마을 주민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리사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가 봅니다. 비법 같은 건 없고 그냥 평소 그대로인데.” “시중에서 먹는 건 운반 중에 조금 숙성되어 맛이 변한 것일 거요.” 마을 주민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며 웃어넘겼다. 시몬과 메이린도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 다음 날 아침에 요리사가 마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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