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26화 이번 천년향 합숙에서 모두가 가장 깊게 고찰한 내용이 있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심장이 멈추는 것만이 죽음인가. 혹은 정신의 상실이 죽음인가.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무엇으로도 답을 내기 힘든 오묘한 개념이었다. 시몬도 많은 생각과 고찰을 거듭했지만, 죽음에 대해 개인적으로 새롭게 정의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했다. ‘시체.’ 시몬이 손에 쥔 리치의 지팡이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구불구불 오래된 나무 지팡이가 아니었다. 흑회색 금속으로 제련되어 곧게 쭉 뻗은, 신사들이 가지고 다닐 만한 현대식 지팡이. 그 끝으로 가리킨 방향에, 이미 수복의 한계를 넘어선 불사의 몸뚱이들이 억지로 꿰맞춰지듯 일어나고 있었다. 맞지 않는 신체 부위끼리 강제로 접합되며, 상실한 신체 부위를 대신하기 위해 세포가 무작위로 분열하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가 날아간 곳에서는 단백질 덩어리가 솟구치며 억지스러운 바람 빠진 얼굴 형상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저건-’ 시몬이 다시 한번 정의했다. ‘시체다.’ 의식이 점점 더 명료해지며 시간이 느려진다. 모든 불필요한 감정들이 휘발되고,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뚜렷하게 자리 잡았다. 잠시 콤펠로 상태에서 활동하느라 이 감각을 잊고 있었다. 이것이 집중이고, 이게 진짜 몰입이다. 이것이 나의 본래 스승이다. 시몬이 비로소 ‘시체들’에 지팡이를 겨누고 흑마법을 외우자. 스스스스스! 주변에 떠 있는 액자들이 흔들리며 팔이 튀어나온다. 정장 소매 너머로 뼈가 보이는 가느다란 망자의 손들이 나타나 시몬과 함께하듯 지팡이를 겨눈다. <더 젠틀맨스 어코드(The Gentleman's Accord) - 신사협정> ‘시체와 시체가 아닌 것을 구분.’ 사고가 가속한다. 시몬의 의식 속에서 적과 아군이 명확히 분리된다. 지팡이들의 방향이 다시금 옮겨간다. ‘과녁을 설정.’ 적의 시체에 가상의 과녁이 생겨났다. 리치들이 제작 기간 동안 코랄 섬광 명중 시험을 수백만 번 해서 그런지, 과녁은 표적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시체가 주저앉은 메이린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시체-’ 지팡이를 든 시몬의 눈빛이 섬뜩하게 날카로워졌다. ‘폭발.’ 메이린을 덮치려던 시체의 몸뚱이가 그대로 폭발해 흩어졌다. “꺅!” 메이린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눈을 떴다. 자신을 공격하던 몸뚱이가 사라져 있고, 전면에는 보라색 방어막이 펼쳐져 있다. “……터, 터졌어? 왜?” -여기는 A1. 바로 이때 통신 수정구에서 시몬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적진에 있는 전원, 즉시 전장에서 이탈해. 내게 생각이 있어. 시몬의 지시가 떨어지자, 모든 키젠 학생들이 일제히 전투를 중지하고 신속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뛰어온 클라우디아가 메이린을 챙겨나 벗어났다. 불사자들이 도망치는 학생들의 뒤를 달려들려고 했으나- 퍼어어어억! 그들의 몸뚱이가 잿빛 폭발을 일으키며 터지기 시작한다. 퍼어어어어어어엉! 수많은 몸뚱이가 리듬에 맞추듯 차례대로 폭발하고, 그 옆으로 또 폭발이 이어진다. 주위가 온통 잿빛으로 가득 차며 흙먼지로 뒤덮였다. 공격당하던 학생들이 모두 물러나자 시몬이 화력을 올렸다. “가자, 신사들.” 시몬의 지시에 액자 속 신사들이 일제히 고조된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킨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지팡이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데들리 에티켓(Deadly Etiquette)> 폭발의 향연이 시작된다. 시체들이 폭발하는 모습이 정돈되게 변했다. 육체가 터지지 않고, 시체의 윤곽선이 그대로인 채로 조용히 무너지고, 그 대신 회백색 파동을 토해낸다. 시체들이 체내의 모든 마나와 힘을 폭발력으로 맞바꾸어 파동을 토해내고, 그 파동에 휘말려 새롭게 시체가 된 몸뚱이가 다시 ‘과녁’으로 설정되어, 새로운 파동의 동력이 된다. 원리상 한번 시체가 만들어지면 연쇄적으로 폭발이 이어지는 형태. 시체가 생겨난다면 폭발 또한 끝없이 반복할 수 있었다. “저건…….” 지켜보던 반장 제이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입술을 떨었다. “시체폭발의 법칙이잖아!”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네크로맨서의 흉악기. 현대의 네크로맨서들은 본인의 언데드를 활용해 시체폭발시키는 걸 선호하기에, 이 기술은 보기 힘들어져 역사 속에 사장되었고, 해당 기술을 제대로 구현하는 네크로맨서도 적었다. 다만 레큘라 왕실 습격 사태에서 리치들이 재현했고, 그 기술은 지금 시몬과 알라제에게로 넘어갔다. 리치들은 사실 클래식한 시체폭발의 선구자였다. 인간이 어려워하는 기술이지만, 망자인 언데드들에게는 막 만들어진 시체를 폭발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후우우우우웅! 이어지는 우아한 잿빛 폭발 속에서 죽지 못하는 불사의 병사들이 일말의 ‘수복’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해체된다. 조각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 모든 광경을 최후방에서 연출한 시몬이 한 손에 쥔 액자를 쿵 하고 찍었다. “자, 연회는 막을 내렀어.” 스스스- 스스스스스스- 두개골에 걸린 마법 때문에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리치들이, 비로소 만족하며 지팡이를 거두고 액자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연주는 끝났습니다.] [품위 있게 퇴장하라.] 잠시 후, 액자의 그림에서는 여러 코랄 리치들이 각기 귀족 같은 포즈를 취한 채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 모든 광경이 끝나고, 폭발과 연기가 걷힌 뒤 학생들이 눈을 뜬 곳에는- 고오오오오오오! 폐허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단해……!” 메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우뚝 언덕 위에 서 있는 리치의 본 아머를 두른 소년이 덤덤하게 지팡이를 내리고 있었다. 입은 슈트는 다르지만, 피온과 꼭 닮은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흥, 진짜!’ 메이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한다니까.’ * * * 지금으로부터 40시간 전. 시몬은 알라제의 조언을 듣고 있었다. “……컨셉?” 시몬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알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는 마법사. 개인의 개성과 에고가 너무 강함. 절대명령으로 매번 통제 불가.] “그 해결책이 ‘컨셉’이라는 거야?” 알라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액자 사용 시 컨트롤이 복잡해짐. 컨셉의 필요성 더더욱 증가. 15기의 언데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개념적인 무언가가 필요. 메타 구조, 표상 설계, 일체 사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시몬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있는데 알라제가 팔을 벌리고 예시를 말했다. [예시 컨셉으로는 음악대. 흑마법이 음악. 전투는 일종의 합주. 모두가 연주하듯 적들을 쓸어버린다는 표상 설계. 망자들의 협동심 상승 기대.] “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시몬이 손뼉을 쳤다. “그럼 바로 그 음악대 컨셉으로 해볼까? 내가 지휘자가 되는 거야.” [예시를 바로 채택하는 군단장. 창의성 부족.] 고블린 모습의 알라제가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코랄 리치. 프라이드 높음. 보통의 컨셉에는 불만족.] “……그럼 어쩌란 거야.” 그렇게 고민하던 시몬은 결국 리치들의 사념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들이 선호하는 것. 이들의 자존심. 그런 것들을 고민해 보고, 여러 물건을 가져와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했고. 결국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우리는-] 시몬이 손을 뻗으며 강렬한 절대명령을 리치들의 머리에 새겼다. [신사다.] * * * 학생들의 분발과 시몬의 시체폭발 마무리로 불사의 군대는 말끔히 사라졌다. 하늘에 드리워진 불길한 안개와 구름도 깨끗이 걷히고, 다시 낙엽이 흩날리는 천년향의 아름다운 경관과 왕도로 이어지는 넓은 강이 펼쳐졌다. “역시 회장이야!” “아까 그 시체폭발은 어떻게 한 거야?” 승리에 환호하며 동기들이 시몬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시몬은 멍하니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주, 죽겠다.’ 애써 동기들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지만, 사실 이성의 끈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정도로 피곤했다. 단순히 체력적으로 지친 게 아니라, 극도로 뇌를 혹사한 탓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칠흑 소모도 소모지만, 정신력을 이렇게까지 소모한 적은 또 처음이었다. ‘역시 리치가 고티어 언데드이긴 하네.’ 15기의 리치를 전부 통솔해야 하는데, 리치 개개인의 에고가 너무 강하고 사념의 전달력도 커서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나마 신사라는 개념이 이들을 한데 묶어주고 있기에, 하나의 부대처럼 컨트롤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도 코랄 리치들은 컨셉에 푹 빠져 있는지, 액자에 들어간 지금도 사념으로 말하고 있었다. [정장을 가다듬고 무대를 밝히십시오.] [오늘의 디너는 피와 침묵입니다.] 시몬이 헛웃음을 흘리며 액자로 흘러나오는 사념의 연동을 끊었다. “얘들아! 이겨서 좋은 건 알겠는데 치료와 부상자 체크부터 하자!” 그사이 제이미와 클라우디아가 다가와 상황을 환기해 주었다. 멍하니 서 있던 아보 교수도, ‘그, 그래야지!’ 하고 말하며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시몬이 힘이 빠져서 휘청거리고 있는데. 툭.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부드럽게 어깨를 짚더니, 조심스럽게 시몬을 뒤로 눕혔다. “어?” 뾰족한 풀밭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촉이 머리에 닿았다. 어느새 시야 위로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툴툴거리고 있었다. “……수, 수고했어.” “메이린!” 무릎베개를 해준 그녀가 큿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피곤하지? 좀 쉬어도 돼.” 메이린은 시몬이 빌려준 학생회장 코트를 벗어 이불처럼 시몬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평온해서였을까. 아니면 쉬어도 된다는 말을 기다렸던 걸까. 시몬은 곧바로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메이린이 입술을 삐쭉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설레는 티도 안 내고 그냥 자?”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시몬을 메이린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그맣게 속삭이듯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메이린이 시몬의 뺨을 한 차례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바로 그때. “우와아아아-!” 옆에서 지나가던 신디 비바체가 한껏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구기고는 입을 쩍 벌리며 소리쳤다. “얘들아 여기 이거 봐! 얘네 사귀나 봐!” “야!! 하지 마아아아!” 메이린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외쳤다. 부상자 운반을 마친 카미바레즈와 다른 학생들도 이내 몰려들면서, 메이린의 시몬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시몬은 꿈을 꾸었다. 궁궐 지하에 위치한 우물의 내부. 시린 눈이 내리는 겨울 숲의 사당. 커다란 심장이 뛰고 있고, 그 앞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움직이는 마름모꼴 문신이 얼굴에 새겨진 남성.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작은 체구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몸 곳곳에 반창고를 붙인 여성이었다. -지시한 이동 준비는 순조롭다, 진현. 대궐에서 왕도로 올라오고 있는 키젠의 움직임도 지체시켰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심장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 심장을 다른 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 거겠지? -그럼. 진현이라 불린 여성이 답했다. 그녀는 사뿐거리는 걸음걸이로 심장 주위를 맴돌며 미소 지었다. -원대한 계획이 곧 실행될 거야. 대륙의 인간들이 대비를 한다고 해봐야, 근원적인 재해는 막을 수 없는 법이거든. 그녀가 천천히 팔을 펼쳤다. -우리의 숙원인 대륙을 구원하는 건 나야. 내가 ‘그분’의 원대한 뜻을 이룰 거야. -그럼 이 심장은 바로 대륙으로 옮기는 건가? -아니.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전에 먼저 거쳐야 할 곳이 있어. 우리는……. 진현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아아아아아아- 그 찰나의 순간을 마지막으로. “허억!” 시몬은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헉!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시몬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자신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진 상태였고, 이곳은 침대였다. 삐걱 삐걱 소리가 들리며 주위가 흔들리는 것 보니 배의 선내인 것 같았다. ‘……다행이야. 강을 타고 왕도로 가고 있구나.’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그 꿈은 뭐지? 너무 생생해.’ 아직도 마지막 진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몸 곳곳에 전율이 남아 있었다. ‘진정하자.’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시몬이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걸어 나갔다. 그리고 방을 지나 밖을 나가는 순간. 쏴아아아아아! 시원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년향 특유의 커다란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이 보였다. “아, 시몬!” “괜찮아? 벌써 일어나도 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카미바레즈와 메이린이 시몬을 제일먼저 발견하고 달려왔다. 다른 동기들도 우르르 모여들었다. “난 멀쩡해.” 시몬이 태연히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내가 잠들고 나서 얼마나 지난 거야?” “그게…….” 메이린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시몬이 잠든 뒤로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중상자가 다섯 명이 생겨서 그들을 대궐로 돌려보내고, 현재 정원 85명으로 왕도로 향하는 여정을 계속했다. 작은 배 다섯 척을 구해서 나눠 탔고, 강을 거슬러 왕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시몬이 걸어서 갑판 밖으로 나와보았다. “어, 시몬이다! 괜찮아?” 신디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시몬도 괜찮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말고는 다른 배들이 없어.’ 시몬이 세르네와 함께 나룻배 유람을 시작했을 때, 주위는 온통 천년향의 배들로 가득했지만 지금 나아가고 있는 건 키젠 일행의 배 다섯 척뿐이었다.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메이린, 혹시 오는 중에 수상시장 같은 곳 봤어?” “수상시장이라면…….” 메이린이 배 앞을 가리켰다. “혹시 저걸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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