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23화 바힐이 제시한 방법은 놀라웠다. 원리 자체는 간단했다. 자신이 천년향이라는 세계에 저주를 걸고, 학생들이 그것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대궐이 일종의 전파 기지, 바힐 자신이 일종의 전파탑이 되는 셈이다. 이야기를 들은 메이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정말 가능해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바힐이 답하며 팔을 펼쳤다. “여러분이 사용할 저주는 저주학 시간 때 배운 ‘녹시에타스’입니다. 주변 환경에서 저주를 끌어와 사용하는 기술이죠.” 즉, 바힐이 <아니마 빈클리스>의 서포트 저주를 천년향에 흩뿌리고 학생들이 ‘녹시에타스’를 사용하면, 녹시에타스를 쓰는 것만으로도 아니마 빈클리스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식이다. 초고난도 기술로서 숙련이 필요한 <아니마 빈클리스>를, 키젠 학생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핵심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제가 ‘아니마 빈클리스’ 저주를 직접 세계에 거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곳에서 하기에는 장비와 시간이 부족하군요. 그래서 고안한 방법입니다.” 시몬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방금 그 말, 바힐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자,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바로 실습으로 증명해 보죠.” 이어지는 실습 시간에 바힐은 세계에 얕은 저주를 걸었고, 학생들도 준비한 저주를 사용했다. <녹시에타스(Noxietas)> 주위의 환경에서 저주를 끌어오는 <녹시에타스>가, 정말로 <아니마 빈클리스>로 변해서 날아가 몬스터에 적중했다. 이어서 바로 하루앓이와 단목마를 공격해서 해체시켜 보았는데, 모두 소생이 지연되는 걸 확인했다. 처음에 해체했던 하루앓이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와, 이 정도면……!” “거의 죽음에 가깝지 않나?” 학생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냥 발상하는 것들을 툭툭 간단히 현실로 옮겨내는 바힐의 모습에, 시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일정은 여러모로 바힐 교수님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렇게 지침이 정해졌다. 제인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모두의 앞에서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이제 우리는 불사의 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억제력을 확보했습니다.” 제인이 말했다. “현재 아론 교수님을 위시한 선발대가 왕도에서 결사 측과 교전 중이지만, 전세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이제 본군을 구성하여-” 그녀가 마침내 선언했다. “천년향의 왕도로 진격하겠습니다.” 거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진현은 구원자로서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세월에 잠식된 본인의 백성들을 군사화하려 하고 있죠. 우리는 1,000년에 걸친 이 사악한 계획을 무너뜨리고, 대륙을 지킬 겁니다.” 학생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타락의 구원자 진현의 무력화, 그리고 둘째는 천년향의 심장을 그들로부터 회수해 오는 겁니다.” 가볍게 흠 하고 헛기침을 한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원정대의 사령관이자, 인솔 교수를 발표하도록 하죠.” 이때, 제인은 조금 고민했다. 선발대에는 아론, 별야, 스테이시 교수가 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 대궐에 남아 있는 교수 중에 누구를 원정대에 보낼 것인가. 제인 본인은 총사령관으로서 현장과 대궐의 상황을 조율하며 지휘해야 했고, 바힐은 세계에 <아니마 빈클리스> 저주를 걸어야 하니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홍펭이 가장 적절해 보이나, 대궐의 핵심 전력인 그녀가 떠나 버리면 본진의 방비가 너무 허술해진다. 만약 진현이 바힐의 저주에 대해 알아내면, 역으로 이쪽을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아보 교수님. 교수님이 시몬 학생회장과 함께 원정대를 이끌고 왕도로 향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고, 아보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 제가요?” “예, 부탁드립니다.” 딱 잘라 말한 제인이 다시금 모두를 바라보았다. “원정은 이틀 뒤입니다.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우리의 어깨에 수백만의 목숨과, 대륙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이상.” * * * 바힐이 저주를 준비해야 했기에, 원정대가 출발하기 전까지 이틀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이때 시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피어를 구해내기 전까지 피온 모드로 싸울 수 없어. 혼자 싸울 준비를 해야 해.’ 시몬이 교복 가슴에 달린 피어의 배지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눈구덩이 쪽에 불이 들어와 있었을 텐데, 지금은 전원이 꺼진 것처럼 새까맣기만 했다. 피어가 진현에게 붙잡혔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어는 언데드인 만큼 ‘타락’에 면역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피어의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면 시몬에게도 영향이 왔을 테니, 일단은 그가 무사하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악화되지 않은 것에 만족하며, 당장 앞으로 어떻게 싸울지 고민해야 했다. ‘……어떻게 진현을 상대해야 할까.’ 타락의 구원자 진현은 지금까지 상대해 본 구원자들 중에 단연 압도적으로 강했다. 사실 지금도 어떻게 이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비월’로 유효타를 내긴 했지만, 진현이 비월에 당해준 것도 소생을 통한 기습을 위한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강자를 피어 없이 어떻게 이길 것인가. 아무리 강력한 언데드를 보내도, 전부 퍼즐 모양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준비하던 전력을 꺼낼 때였다. 시몬은 준비물들을 챙겨 이동했다. * * * 시몬은 코랄 리치를 연구 중인 에이션트 언데드, 알라제를 만나러 왔다. “알라제, 여기 있어?” 알라제는 대궐 옆에 위치한 산속 동굴에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구까지 와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라제?” 시몬이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발을 디디며 랜턴을 비추었다. 절컹! 한 차례 쇳소리 같은 게 들렸다. 움찔한 시몬이 다시 랜턴을 소리가 난 방향으로 비추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어?” 스스스스스스! 이때, 발밑에서 물결이 일렁이듯 보라색 형체가 여럿 솟아올랐다. 그것은 언데드들이었다. 흑요석을 압축한 듯 새까맣게 벼려진 뼈, 그 위로는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듯한 칠흑 로브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특히 두개골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로브의 목 부분에서 검푸른 칠흑이 연기처럼 솟구쳐서 얼굴을 덮고 있었는데, 무언가의 마법인 듯 그 연기가 두개골에 살을 붙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흐릿하지만 기묘한 생전의 흔적을 가진 얼굴이었다. 남성 11명, 여성 4명. 각자의 표정을 가지고 지팡이를 쥐고 있는 이 언데드들이 검푸른 눈동자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로브 아래로 그들의 가슴에는 ‘라이프 베슬’이 두근두근 박동하고 있었다. 15개의 박동이,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일치한 채 고동쳤다. “설마 이 언데드들이…….” [완성됐음.] 척. 척. 시몬을 닮은 하얀 고블린, 알라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1세대 코랄 리치 15기 완성. 완성된 리치 부대, 바로 시험훈련 개시.] “……지금?” 알라제가 손을 휘둘러 신호를 주자, 리치 한 기가 즉각 반응하며 손에 쥔 지팡이를 옆으로 치켜세웠다. 촤아아아아아아아! 일순 어두운 동굴이 보랏빛으로 환하게 물들었고, 쏘아져 나간 광선이 저 멀리 떨어진 지하 동굴 끝에 부딪혀 폭발했다. “와!” 이번엔 예전과 달랐다. 코랄 광선은 동굴 벽에 붙어 있는 과녁판 정중앙에 구멍을 뚫고 명중했다. [코랄 광선 명중률 보강 완료, 속박계 저주 내장 완료.] 거기에 이번 천년향 합숙에서, 바힐은 약속대로 리치가 사용할 만한 속박 저주를 논문으로 작성해서 시몬에게 주었고, 시몬은 이를 브린어로 번역해서 다시 알라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변환해 놓았다. 그로 인해 속박기술까지 다수 장착. 이제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 대신.] 쿠쿵-!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코랄 리치의 로브 아래로 뭔가 거대한 게 달려 있었다. 마치 벌의 꼬리 부분 같은 두꺼운 살덩어리 기관이었는데, 내부에 푸른색 빛과 붉은색 빛이 일렁이며 깃들어 있었다. [코랄 출력 기관 장착으로 기동력 현저히 저하.] “……왜 중간이 없는 거야.” 시몬이 머리를 텁 하고 짚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칠흑 로브를 휘감고, 두개골로 올라오는 칠흑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 리치들. 특히 가슴에 라이프베슬이 선연히 빛나는 모습은 네크로맨서라면 누구나 가슴 뛰게 할 만큼 멋있었지만, 저 코랄을 보관한 육중하고 무거운 기관 때문에 기동성이 떨어진 모습은 아쉬웠다. [기동력은 코랄 리치에게 불필요.] 알라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압도적인 사거리와 위력. 먼 거리에서도 대공 요격과 대인 저격 가능. 모든 걸 갖춘 언데드. 모든 걸 갖추지 못한 언데드와도 같음.] “……그래, 그 말도 맞지. 특화가 필요하단 거잖아.” 시몬이 잘했다고 알라제를 칭찬해 준 뒤 저벅저벅 걸어와 아공간을 열었다. “뭐, 기동성을 살릴 수단은 많아. 내친김에 이걸 시험해 볼까 해.” 쿠웅! 시몬이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고풍스러운 액자에 담긴 ‘초상화’였다. 그 초상화에는 여인이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천년향에 와서 새로 얻은 새로운 아공간이야.” [해당 아티팩트에서 놀라운 파장이 느껴짐.] 알라제가 분석하듯 말했다.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아티팩트 아님. 강력한 마력적 효과 내장.] “그럼, 한번 작동시켜 볼까.” 긴장이 된 듯 한 차례 손바닥을 비빈 시몬이 액자에 마나를 부여하고는,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그러자. 촤르르르르르르르! 액자 안에서 똑같이 생긴 무수한 액자들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와!” 뭔가 동화 속에서 볼 법한 광경이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액자들로 가득 차버렸다. 스윽- 그런데 그걸 본 코랄 리치들이 날아다니는 액자를 ‘위협’이라고 인식했는지, 액자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앙! 리치에게서 발사된 코랄 광선이 액자 속으로 빨려들어 가더니, 바닥에 널려 있던 다른 액자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이 또 다른 액자에 빨려 들어가며, 공간 전체가 섬광으로 뒤덮였다. “멈춰!” 촤아아아앙! 파아아아아아앙! 식겁한 시몬이 알라제를 끌어안고 몸을 던졌다. 주위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날뛰는 액자들이 지면을 따라 굴러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섬광을 반사했다. 동굴 벽이 무너지고 파편도 산산조각 났다. 어떤 액자는 제자리에 빙글빙글 돌며 보랏빛 섬광을 마구 난사하기까지 했다. 동굴 전체가 붕괴 직전이었다. “……으, 으음.” 시몬은 액자를 하나 앞세워 방패로 삼은 채 알라제와 함께 쪼그려 있었다. ‘정말로 피어 없이 리치들만으로 싸울 수 있을까?’ 문득 피어가 보고 싶어지는 하루였다. * * * 이틀 뒤. 드디어 원정일 아침이 밝았다. 모두가 긴 여정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전투를 위해 키젠 교복으로 갈아입은 카미바레즈는 끙차끙차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시몬은 일어났으려나?” 이틀 동안 시몬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 된 그녀는 결국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래도 아침 일찍 시몬을 본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걸음도 가벼웠다. 혹시나 아침을 못 먹었을 때를 대비해 도시락도 준비했다. 이윽고 시몬이 연구를 시작한 동굴 근처까지 도착했다. 카미바레즈가 손바닥을 입가에 대고 외쳤다. “시몬! 어디 계세요? 오늘이 원정일이에…… 아!”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동굴 입구가 대폭격이라도 맞은 듯 무너져 있었다. 거의 산 한쪽이 통으로 무너져 내린 상태였고, 지면 곳곳에 길쭉한 자국 같은 게 나 있었다. “시, 시몬?” 놀란 그녀가 얼른 무너진 입구로 뛰어갔다. 주변의 지반 자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시몬! 거기 계세요?” 콩콩 하고 막힌 동굴 입구를 두들겨 보았지만 대답이 들려올 리 만무했다. 그녀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올라 동굴 주변을 살폈다. ‘결사의 습격은…… 아닌 것 같아.’ 대궐에는 결계가 펼쳐져 있고, 이 동굴도 그 결계의 끝자락에 보호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건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진 흔적이었다. 심지어. ‘봉우리가 잘려 있어.’ 곳곳에 선이 그어져 있었고, 저 멀리 다른 산봉우리를 베어낸 듯한 흔적이 보였다. 그녀의 동공이 격렬히 흔들렸다. ‘……시몬,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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