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24화 에이젤이 말한 대로였다. 광장에 돌아온 뒤 제인의 살벌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여러분에게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핵심 임무에만 몰두해서, 주민들의 안전과 일반 임무에 소홀함을 보인 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발상의 전환으로 임시 지휘 체계를 갖춘 건 좋았지만-” 이때 제인이 살짝 딕을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느라 현장에서의 창의성을 배제하고 기계처럼 움직인 학생들이 보였습니다. 지시를 따르는 것 못지않게 전세를 읽고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녀가 이번에는 시몬을 바라보았다. “특정 지역의 위기를 간파하고, 해당 지역으로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이동 계열의 전문가부터 찾아내는 학생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라고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실로 오랜만에 듣는 제인의 칭찬에 시몬의 두 뺨이 상기되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여러분의 움직임이 느립니다. 컨디션이나 몸 상태 같은 변명은 목표의 달성 실패에 대한 어떤 변명도 되지 않습니다. 임무 발생 후, 집합까지 5분 이내로 모이도록 하세요. 임무 파악 후 출발하는 데 10분 이상 소요돼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의 눈이 멍해졌다.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낸 제인이 등을 돌렸다. “전원 복귀하겠습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이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갔다. 씻거나 할 여유도 없었다. 다들 바로 눈을 붙일 생각밖에 없었다. 시몬이 학생회 멤버들과 이야기하며 돌아가고 있는데, 딕이 갑자기 털썩 공원 벤치에 드러눕는 게 보였다. “왜 그래요 딕?” 카미바레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딕이 손을 휙휙 흔들었다. “피곤해서 안 되겠다. 먼저 가, 난 오늘 여기서 노숙.” “멍충아!” 메이린이 불같이 화를 내며 다가와 딕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아직 4시간이나 더 잘 수 있거든! 이렇게 딱딱한 곳에서 노숙하면 몸만 상해! 너 또 아프다고 학생회 업무 빠지려고 그러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셔. 노숙은 익숙하기도 하고, 또 왠지 모르게 훈련 한 번 더 할 것 같거든.” 딕이 아공간을 열고 침낭을 꺼내서 안에 들어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지퍼 고리를 잠가 버렸다. 더 잔소리하려던 메이린이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쟤는 진짜, 어휴.” “…….” 시몬이 그 모습을 보고 진지하게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여기서 잘까.” “자지 마!!” 어쨌거나 잠은 제대로 침대에서 자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른 동기들과 함께 먼 길을 걸어 기숙사에 돌아와 누웠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웨에에에에에에엥! 다시 임무가 시작되었다. 딕의 잔머리는 어지간하면 맞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 * 새벽에 훈련을 두 번이나 뛴 뒤에 오전 수업인 제인의 행정 이론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의 컨디션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2학년 시절이 백배는 나아.” “328기에 대한 비난을 철회한다. 그들은 전설이야.” 학생들은 되는대로 튀어나오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칠판에 적혀 있는 글자들을 노트에 필기해 갔다. 그 와중에 제인은 훈련 내내 학생을 지휘하고 오전 수업에 들어왔지만,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가히 철인에 가까웠다. “20분 휴식 후에 다음 수업하겠습니다.” 제인이 분필을 내려놓자 학생들이 와르르 책상 위로 쓰러질 듯 엎드려 곯아떨어졌다. 몇몇 학생들은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러 몸을 일으켰다. 그때 조교 한 명이 제인의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했고,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 헥토르 무어 학생.” 부름을 받은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자지 않고 있던 학생들도 시선을 움직였다. “20분 휴식 후에 두 사람은 군단학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겠습니다. 부족한 행정학 수업 내용은 기숙사에 자료를 보내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와-! 곳곳에서 부러움 가득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인과 조교들이 떠나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남학생이 ‘크흡’ 하고 입술을 떨었다. “이건 차별이야! 나도 행정학 말고 군단학 수업 듣고 싶다!” “꼬우면 군단장이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시몬이 쓴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옆자리의 딕이 팔뚝을 툭 쳤다. “적응기간부터 수업 들으러 가나 보네. 잘 다녀오시고.” “응.” “아, 근데 생각해 보니 좀 아쉽게 됐네.” “뭐가?” 딕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원래는 그 수려한 북부대공 교수님이랑 1:1 과외수업을 듣는 거였잖아. 사실상 널 위한 수업이었을 텐데, 불청객이 끼어든 셈 아니냐?”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들을 사람이 있으면 난 더 좋아. 자극도 될 것 같고.” “흐흐.” 딕이 슬쩍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저 녀석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헥토르 무어는 이미 저벅 저벅 걸어서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시몬도 기지개를 쭉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된다. 군단학 수업!’ * * * 철썩- 철썩-!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북부대공 진 아스르칼트는 자리에 서서 가만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상회담은 무사히 끝났다.’ 시몬 폴렌티아는 암흑연합 전체의 공인을 받은 정식 군단장이 되었다. 아직 자신의 은인인 요나의 명예가 완전히 복권된 건 아니지만, 배신의 군단 이야기가 나오면 치를 떨던 과거와 비교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확연히 좋아졌다. ‘나는 그대에게 목숨을 빚졌느니라. 요나.’ 그녀가 눈을 감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해풍에 휘날렸다. ‘이제는 은퇴한 당신에게 은혜를 갚을 길은 없지만, 적어도 네 아들은 내가 지키겠다.’ 여운이 길었다. 잠시 그렇게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교수님.” 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시몬과 헥토르가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그녀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본래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돌아왔다. “군단학 첫 수업을 시작하겠다.” 본래는 다른 수업들처럼 통합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 들어가야 하지만, 네프티스의 특별 지시로 군단학만큼은 조금 더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진이 바위에 걸터앉았고 시몬과 헥토르가 풀밭에 앉았다. “군단의 정의에 대해. 같은 이야기는 너무 뻔하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녀가 두 군단장 후배들을 돌아보았다. “네크로맨서는 언젠가 누구나 숫자의 한계에 봉착하느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언데드는 대부분이 소대에서 중대 규모이나, 군단장은 그 모든 제약을 초월한다. 어떤 네크로맨서도 ‘언데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지만, 군단장은 가능하지. 그것은 큰 의미이니라.” 그녀가 깍지를 꼈다. “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전쟁을 일으킬 권한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암흑연합에서는 질서의 유지를 위해, 영지나 개인이 ‘군대’를 보유하는 걸 금하고 있느니라.” 시몬이 손을 들었다. “대영지에는 큰 규모의 영지병들이 있지 않나요?” “그것도 영지의 크기를 고려해서 경비병이 조금 많을 뿐. 사실상 군대를 소유하고 있는 건 왕국과 암흑연합, 왕국에서 독립한 자치구들, 그리고 군단장뿐이다.” 시몬과 헥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7군단장, 6군단장, 너희 두 사람 모두 암흑연합의 공식 군단장이 되었느니라. 공식과 비공식의 차이는 크다. 매그너스와 같은 비공식 군단장은 흔히 말하는 비주둔 용병부대나 다름없다. 하지만 공식 군단장은 각기 언데드 군대를 보유해야만 하는 이유, 즉 의무가 있느니라.” 군대를 가졌으니 의무를 다하라. 그것이 기본적으로 암흑연합 내부에서 군단의 의의였다. 1군단은 ‘경계’라고 불리는 대륙 극동부 일대에 주둔하고, 그곳에 사는 드래곤들을 비롯한 거대 개체들의 위협을 막아낸다. 2군단은 사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치는 칼로스 북부에 주둔하고, 북쪽에서 몰려오는 북신과 얼어붙은 언데드들의 진군을 막아낸다. 3군단은 대륙 남부의 항만에 주둔하고,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태들과 수중 언데드의 공세를 막아낸다. 4군단은 유령궁에 주둔하고, 아직까지 누구도 클리어하지 못한 미스테리 유령던전의 위협과 이상현상을 봉쇄한다. 5군단은 중앙 사막에 주둔하고, 상단들이 통행하는 중요한 길목들을 지키며 사막의 중심지를 수호한다. 6군단은 벨른 대협곡과 군도에 주둔하고, 근방의 들끓는 해적 무리와 협곡에서 기어 나오는 몬스터들의 위협을 막아낸다. 설명을 듣던 시몬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7군단은요?” “으음.” 진이 팔짱을 꼈다. “애초부터 7군단은 조금 특별했느니라. 본래 역할은 데스랜드에 주둔하고 그곳에서 출현하는 언데드 무리를 막아내는 것이었지만, 7군단은 늘 데스랜드를 넘어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설명을 하던 그녀가 슬쩍 먼 미소를 지었다. “특히 요나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더 굳어진 것도 있느니라. 배신의 군단 사태 전에 요나가 암흑연합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이지. 7군단은 늘 방랑하고, 대륙 전역을 수호했다.” 그녀가 시몬과 눈을 마주쳤다. “마치 건방진 것,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시몬이 감격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의 헥토르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턱을 괬다. “어쨌든 군단장의 근간은 ‘병력’과 ‘영토’이니라. 이제 두 사람 다 암흑연합에서 공인된 군단장이니, 영토를 가질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그녀가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헥토르 무어, 도시국가 벨른과 5대 군도는 어떻게 됐느냐?” “접수했습니다. 이제는 섭정이 아닌 제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헥토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직 완전히 복속하지 못한 협곡의 언데드들과, 혼란을 틈타 날뛰는 해적이 있지만, 적응기간이 끝나고 로크섬 밖으로 나가게 되면 복속은 시간문제입니다.” “너는 그곳을 6군단의 ‘영역’이라고 대륙에 선언하였느냐.” “본래 벨른은 6군단의 영역이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닙니까.” 으흠. 진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가르칠 게 많겠구나. 공식 군단장이 된 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 “그럼 다음으로 건방진 것.” 진이 이번에는 시몬을 바라보았다. “너도 공식 군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 네 영토는 확정했느냐?” “아, 아직입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데스랜드나 프로스트 필드는 사실상 확고한 7군단의 영역이었지만, 시몬은 공식 군단장의 자격을 얻은 뒤 그곳들을 자신의 권역이라고 암흑연합에 선포하지는 않았다. “그래. 영역에서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영역을 선포하면 뭐가 좋은 겁니까.” 헥토르의 물음에 진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영역은 군대를 가진 자의 의무이니라. 전시가 아닌 평시에 군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명목상으로도 지켜야 할 영역이 있어야만 한다. 군단장으로서 성과를 평가하는 항목이기도 하지, 물론 그런 것 외에도.” 그녀가 팔짱을 꼈다. “전 세계의 어디든 언데드는 없애야 하는 족속들이다. 하지만 군단의 영역 내의 언데드는 그에 대한 공격 행위가 엄금되어 있느니라. 제3자의 침입을 제한하고, 영역 내의 여러 자원을 합법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지.” “그렇군요!” 그녀가 시몬을 돌아보았다. “프로스트 필드나 데스랜드는 이미 네 확고한 영토나 다름없으니 굳이 빠르게 영역을 공표할 필요는 없어 보이니라. 그곳 외에, 혹시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싶은 곳이 있느냐?” 시몬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 곳 있습니다!” 비명의 정글. 매그너스와의 전쟁에서 소멸한 아케뮤스가 머물던 그곳. 시몬은 다시 비명의 정글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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