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20화 드디어 만났다. 다른 세계의 신을 풀어놓아 대륙의 바다를 멸망의 기로로 몰아넣은 자. 보물섬으로 수많은 선원을 끌어들여 타락시키고, 산맥의 몬스터들을 내려보내 신성연방에 무수한 피난민을 만들어낸 자. 보석일족을 희생시키고, 드레스덴 왕궁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힌 장본인. 그 모든 비극의 시작. ‘타락의 구원자!’ 꽈아아악! 시몬이 양손에 힘을 주어 파멸의 대검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춰 선 대검은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한 손으로 대검을 붙잡은 채,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시몬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어?] “일전에 궁궐에서 느낀 기운과 확연히 달랐으니까.” 꾸욱. 시몬이 한층 더 발을 내디디며 살벌하게 말했다. “진짜 왕은 어디에 숨긴 거지?” “한번 찾아봐.” 그녀가 히죽 웃으며, 검을 붙잡은 반대쪽 손을 치켜들었다. “날 쓰러뜨린 뒤에.” 머리 위로 올라간 그녀의 손이 일자로 내려왔다. ‘!’ 일순 시몬의 모든 세포가 ‘죽음’을 경고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의 털에 소름이 내달렸다. 확실히 보였다. 내려오는 그녀의 손 위로 허공이 잘려져 있는 것을. 촤아아아아악! 시몬이 급히 파멸의 대검을 잡아당기며 물러섰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는 방향의 공간이 갈라지며 새까만 참격이 그어졌다. ‘공간 베기!’ “이 힘을 너만 쓸 수 있는 줄 알았어?” 그녀가 옷자락을 흔들며 이번엔 횡으로 손을 그었다. 시몬이 급히 제자리에서 도약했고, 허공이 거대하게 갈라졌다. 촤아아악! ‘젠장!’ 시몬이 바닥을 미끄러뜨리며 착지했다. 피어의 외침이 머릿속을 울렸다. [소년! 평소보다 페이스가 너무 거칠다! 호흡을 진정시켜라!] 이마에 피가 죄다 쏠린 느낌이었다. 어떤 전투에서도 빠르게 냉정을 되찾는 게 시몬의 강점이었지만, 정말로 타락의 구원자가 눈앞에 보이니 눈이 돌아가서 평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뇌의 모든 부분이 반응한다. 가증스러운 몸짓 하나, 손짓 하나가 혐오스럽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저 손짓에 죽고 농락당했는가.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 절대로 놓칠 수 없다. 구원자 중에서도 특별해 보이는 상격의 존재, 같은 구원자인 보석일족의 코르비니스도 얼마든지 버림패로 던질 수 있는 위치. ‘여기서 반드시 쓰러뜨린다!’ 저런 거물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결사의 계획을 정면으로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가 뒷짐을 지며 쿡 웃었다. “열이 잔뜩 올랐네.” 천년향의 왕을 상징하는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이 절반, 구원자로 활동할 때의 검은빛이 감도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절반. 양쪽의 머리를 휘날리며 그녀는 발끝으로 사당의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떤 원리의 힘이 작용한 걸까. 그녀의 발을 중심으로 넓은 바닥이 퍼즐 조각 같은 형태로 갈라져 공중에 떠올랐다. “요잇.” 그녀가 긴 소매를 휘두르자, 거대한 퍼즐 조각들이 시몬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인간을 언데드처럼 타락시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몰라!’ 저 정도의 강자와의 싸움에서 탐색전은 필수적이었다.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기에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거대 퍼즐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겼다. 그러는 사이사이 타락의 구원자는 한 걸음 한 걸음 여유롭게 거닐며, 마치 산책하듯 움직였다. “알지? ‘그분’이 너를 아주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시몬 폴렌티아.” 쩡! 쩡! 쩌정! 퍼즐 조각을 가르는 검격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같이 갈래? 너도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 궁금하잖아.” 쩌어어어어어어엉! 공간째로 베는 참격으로 날아오는 퍼즐들을 모조리 날려 버린 시몬이 대검을 바닥에 꽂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널 죽지 않을 만큼만 박살 낸 뒤에, 물어보는 쪽이 더 빨라.” <카오스 스피어> 콰르르르르르릉! 무수한 자줏빛 벼락들이 예측 불가능한 각도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줏빛 벼락이 뒤로 돌아 그녀의 등을 향해 날아든 순간. 촤아아아-! 벼락은 그녀의 살갗에 닿기 직전, 무수한 퍼즐 조각처럼 변해 대기 중에 흩어졌다. “!” 촤아아아! 촤아아아아아아! 다른 공격도 마찬가지. 수십 발의 자줏빛 벼락들이 그녀의 몸에 닿지 않고 전부 퍼즐처럼 조각나며 사라졌다. 그녀가 한쪽 눈은 가늘게, 한쪽 눈은 크게 뜨며 미소 지었다. [넌 날 못 이겨.] 시몬이 이를 악물고 검지를 세워 들었다. <시크니스> <패럴라이즈> <말레디코> 자신 있는 즉발 저주들을 난사했으나 그조차 그녀에게 닿지 않고 퍼즐처럼 조각나 버렸다. 아공간을 열고 좀비들을 보내 시체폭발을 일으키고, 스켈레톤을 꺼내 본 스피어를 날리고, 오버로드를 꺼내 원거리 참격을 날렸으나 어떤 공격도 그녀의 몸에 닿지 않았다. “요잇.” 이번엔 그녀가 장난스럽게 손을 휘두르자, 주변의 공기마저 퍼즐 모양처럼 갈라져 시몬을 향해 날아왔다. ‘압축 공기 같은 건가!’ 시몬이 몸을 날려 피했고, 퍼즐 모양의 공기가 지면에 부딪히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충격파가 퍼져 나왔다. 그녀가 ‘호잇’ 하고 발끝으로 바닥을 걷어차자, 이번엔 바닥이 대형 퍼즐처럼 갈라져 시몬을 향해 쇄도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투사체들. 시몬은 몸을 던지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후읍!” 벽을 타고 달리며 피하던 시몬이 눈앞을 가로막는 퍼즐 조각을 향해 파멸의 대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아!’ 퍼즐 뒤에서 느껴지는 힘의 파장. 시몬이 억지로 공격을 중단하고 몸을 틀었다. <절공(絶空)> 공간을 가르는 참격이 퍼즐을 가르고, 그 너머에 있던 시몬의 허리를 깊게 베었다. 그녀가 퍼즐 뒤에서 맨손으로 베기 자세를 취한 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뭘 해야 이길 수 있지? 조급해서 생각이 꼬여!’ 준비하고 있는 건 데스나이트, 미르미즈, 카오스 리퍼, 소용돌이. 하지만 머릿속에서 초 단위로 생각이 바뀌며 집중력이 점점 흐트러졌다. 시몬이 참격을 연달아 날려댔으나 여전히 그녀의 앞에서 퍼즐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생각해! 어떻게 이길지 생각해 내!’ 시몬의 머리가 점점 가속하여 열기로 달아올라 갔다. 그런데. [에이, 진짜? 아직 한창 재미있는 중인데.] 시몬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통신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위에서는 아직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나 봐.]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허공에 결사의 포탈이 나타났다. [다음에 봐.] 시몬의 머리가 가열차게 돌아갔다. 기만인가? 아니면 정말 도망치는 건가? 바스테리온도 진지하게 싸우려 하지 않았다. 시간을 끄는 이유가 뭐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시몬의 뇌가 뜨거워졌다. 그녀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얼굴이 잠시 머리에 스쳤다. 결국 시몬이 모든 혼돈의 힘을 대폭발시키며 비장의 한 방을 날렸다. <카오스 폴> 세상이 온통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시몬이 사용했던 혼돈기 중 손꼽히는 한 방. 전방만을 타격하는 공격이 아니다.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혼돈의 번개가 그녀에게 내리꽂히려 하고 있었다. [와우.] 처음으로 반응한 그녀가 팔을 뻗어 포탈을 터치했다. 그러자 포탈마저도 퍼즐처럼 분해되고, 그녀가 손을 휘둘러 퍼즐이 된 포탈을 자신의 앞으로 보냈다. 조각들이 서로 결합하고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벽이 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사방을 뒤덮는 혼돈의 힘이 포탈에 빨려들어 갔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힘이 일거에 사라졌다. 그리고. “끝났어.” 시몬이 그녀의 등 뒤에서 파멸의 대검을 내리긋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엥?] 그녀의 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커졌다. <군단기 – 비월> 촤아아아아악! 그녀의 어깨에서 허리까지, 몸이 대각선으로 갈라지며 피가 푸슈욱 뿜어져 나왔다. [뭐야, 뭐가 어떻게…….] 시몬이 크게 숨을 토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녹아들 듯 사라지며, 그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공간을 베는 게 아니었……! 카이 로……!] 그녀의 몸이 검상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시몬이 손끝을 내리는 것으로 아직 남아 있던 카오스 스피어들이 그녀의 몸을 덮쳐 분쇄했다. 쿠르르르르르릉! 전신이 폭연으로 뒤덮였고, 마침내 그녀의 몸이 갈가리 흩어졌다. 시몬은 그녀의 심장 고동이 멎고, 마력반응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후욱!” 전신의 힘을 폭발시키며 혹사한 탓에 손가락을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카이 로? 방금 무슨 말을…….’ 푸욱! 그 순간. 가슴에 차가운 감각이 엄습했다. 들끓던 뇌가 식고, 정신이 뚝 하고 끊기는 듯한 느낌. 시몬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자신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여성의 피투성이 손이 보였다. ‘……왜?’ 분명히 사라졌어야 할 그녀의 기운이―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시몬의 고개가 삐거덕거리며 뒤로 향했다. 팔이 먼저 생겨나 있고, 그 뒤로 노란색 빛무리가 모여들며 서서히 어깨, 가슴, 목, 얼굴과 하체로 퍼져 나가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시몬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건……!’ 바스테리온과 그의 부하들이 그랬듯 결사는 가지지 못한 힘. 천년향 생물의 ‘소생’이었다. [놀랐어?] 갓 형성된 입술이 움직여 그렇게 말했다. 이내 코가 형성되고, 웃고 있는 눈이 만들어졌다. [내가 천년향의 주민이었단 사실이?] “!” [이제 숨길 이유가 없겠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저번에 궁궐에서 네가 봤던 왕도 나고, 계속 이곳을 다스린 것도 나고, 이야기 속에서 신에게 불로불사의 소원을 빌었던 것도 나야.] 그녀의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타락의 구원자이자, 천년향의 왕, 진현(眞顯).] 푸욱! 그녀가 시몬의 등에 박아둔 손을 천천히 뽑아냈다. 시몬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네가 패배한 이유는 두 가지야. 첫째는 감각에 너무 의존한다는 점.] 그녀가 시몬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네 감각은 확실히 예측을 넘어 예지의 경지에 닿아 있어. 지금까지 숱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이었겠지?] 그녀가 한 차례 손뼉을 쳤다. [하지만 감각이 너무 정밀한 나머지, 너는 왕과 다른 힘을 풍기는 나를 별개의 인물이라 착각했어. 또 내가 죽었을 때 힘이 사라진 걸 감지하고 승리를 확신했지. 너무 자기 감을 과신하면, 이용당한다구.] 고개를 든 그녀가 빙글빙글 돌며 노래하듯 두 팔을 벌렸다. [두 번째는 말이야. 시몬 폴렌티아, 너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지? 그러니까-] 그녀가 손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 번의 패배에 이렇게 많은 걸 잃는 거야.] 뜨거운 피가 쏟아진다. 쏟아진 피가 웅덩이를 이룬다.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점점 식어가는 게 느껴진다. [방금 공격으로 코어를 파괴했어. 함부로 칠흑을 일으키면 죽을 거야.] 흥- 흐응- 흐음- 흥- 진현이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어갔다. [물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두진 않을 거야. ‘그분’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시거든! 그래서 타락의 힘을 네 몸에 전파시켰어.] 그녀가 바닥에 쓰러진 시몬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변화가 시작될 거야! 기대되는데? 나는 말이야, 너같이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가 타락하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겁거든!] 꺄하하하하!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쿠쿵-! 멀리서 폭발음이 울렸다. 그녀가 풋 하고 웃으며 사당 밖을 바라보았다. “다른 방해꾼들이 또 왔나 보네. 완성이 가까워질 때쯤 올 테니, 점점 타락해 가는 자기 자신을 보며 즐기고 있으렴.” 그녀가 후후 웃으며 사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시몬은 피투성이가 된 채 그대로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소년! 정신 차려라! 소년!] 피어의 외침도 이제는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시몬은 이제 곧 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몸 곳곳에 이상한 기운이 퍼져 나가며 변질되고 있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대로 ‘타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상한 존재가 되어 결사의 보스에게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생각해.’ 몸이 식어가는데, 정신은 오히려 맹렬히 달아올랐다. 날카로운 집중력은 지금의 상황을 똑바로 관조했고. 그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시몬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현, 네가 실패하는 이유는 두 가지야.’ 화아아아악!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되찾자, 몸에 칠흑이 사라지고 신성이 차올랐다. ‘첫 번째는 코어를 깨뜨렸다고 승리를 단정 지은 오만.’ 시몬은 그 신성을 이용해 회복마법을 구사했다. 찢어진 장기를 수복하고, 피를 멎게 했다. 하지만 신성으로는 깨진 코어를 재건할 수 없고, 타락을 막을 수도 없었다. ‘두 번째 이유-’ 시몬이 고개를 들어 저 앞에 놓인 천년향의 심장을 보았다. ‘내가 여기까지 온 진정한 목표를 모른다는 것.’ 비록 상황이 꼬였지만 처음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시몬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켓에서 바힐의 외눈 안경을 꺼내 착용했다. <시몬 리메이크 - 임페라투스 콤펠로> 솔직히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흑마법을 칠흑이 아닌 신성 기반으로 재배치해서 사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흑마법과 백마법은 사용하는 룬어는 물론 회로 설계와 수식도 전부 다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직전에 각성한 알 수 없는 이 집중력. 지금이라면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워 있는 시몬의 눈앞에 일곱 개의 마법진이 펼쳐진다. 먼저 이 마법진들로 천문대를 구성하고, 그것으로 심장을 바라보며, 외눈 안경에 신성을 깃들게 했다. 백마법이든 흑마법이든 그 원리만큼은 같았다. 스스스스스스스! 시몬은 마침내 초월적인 콤펠로 상태에 진입했다. ‘놀라워.’ 임페라투스 콤펠로 상태에서 심장을 보니, 어마어마한 정보의 파도가 밀려 들어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금방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깨닫고 손톱으로 팔뚝에 필요한 것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허억! 헉! 지금 필요한 것. 죽음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 시몬은 그것을 써 내려간 뒤 임페라투스 콤펠로를 해제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몸에 새겨둔 설계도를 기반으로 마법진을 만들었다. 시간이 없다. 진현이든, 바스테리온이든, 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시몬이 경이로운 집중력으로 불가해의 마법진을 완성하고 자신의 몸에 새겼다. 이제 최후의 단계가 남았다. ‘부탁해요 피어.’ [크흐흐,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피어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관리자에게 끔찍한 짓을 시키는구나! 자신은 있나? 소년.] ‘네.’ 시몬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100% 확신해요.’ 피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일을 겪었어도 여전히 감을 믿는 건가! 이제야 소년답군!] 피어의 본 아머의 팔 부분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손끝을 날카롭게 세웠다. 시몬이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피어.’ 그리고 시몬은- 피어의 팔이 자신의 심장을 완전히 꿰뚫는 것을 느꼈다. * * * 멀고 멀었다. 길고 길었다. 맥락도 이유도 없이, 그저 그렇게만 느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생각 없이 아주 오랫동안 부유한 것 같았다. 이 부유가 끝나기는 할까? 아니면 영원히 계속될까? 그렇게 떠돌던 중. 손이란 게 생겼다. 손을 좌우로 움직여 보니, 놀랍게도 감각이 느껴졌다. 느리고, 저항감이 있으면서도- 포근했다. 뒤이어 팔이 생겼다. 이제 손을 크게 휘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마다 무언가 떠내려가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함이 계속 이어졌다. 따뜻한 것으로 어깨가 생기고. 가슴과 복부가 생겼다. 그리고 목을 지나 입이 생기는 순간. 이상하다. 입이 있는데 숨을 쉴 수가 없다. 얼른 입을 막는다. 마침 팔과 다리가 생겼기에 그것을 마구 휘저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팔다리를 휘젓고 있는 중에, 코가 생겼다. 코로도 숨을 쉴 수가 없었기에 팔다리는 더더욱 정신없이 일해야 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팔다리를 강하고 빠르게 움직일수록 점점 위로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갔고. 코와 입이 숨을 쉬었다. 뭔가를 토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이 열렸다. 쏴아아아아아아아! 눈앞을 가득 채운 건 출렁이는 물결이었다. 눈과 함께 귀가 열리고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머리가 만들어지며 마침내 사고가 흐릿한 부유 상태에서 벗어나,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이제 모든 감각을 받아들이고, 그 감각으로 생각한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곳은 ‘강’이다. 포탈을 통해 배를 타고 키젠 일행 모두와 함께 천년향에 들어왔던 바로 그 시작지점이었다. 쏴아아아아아! 시몬은 참았던 거친 숨과 물을 토해내며 하하 웃었다. 살았다. 살아 있다는 것에 이렇게 안도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단풍이 수없이 떨어지는 이 아름다운 천년향에서 저 멀리 숙소인 대궐도 보인다. 살아 있는 게 기뻐서 다시 한번 크게 숨을 쉬었다. “됐다.” 시몬은 마침내- ‘불사’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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